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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 구도의 클리셰에 대한 새로운 관점: <착한 여자 안선해>

극복하는 과정 중 자신을 마주해 나가며, 독자들에게 항상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작품

2024-03-28 손유진


작년 여름, <악인의 서사>라는 제목을 가진 책이 출판되었다.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는 SNS 상의 담론에 응하기 위하여 기획된 이 서적은 예술을 평면적으로 바라보는 이상의 슬로건에 의문을 제시하고 있다. 최근, 악인 혹은 범법자에 대한 온정적인 태도를 차단하기 위해 악인을 이해할 여지를 남기지 않도록 악인에게 ‘서사’를 주어서는 안된다는 담론이 인기를 얻고 있는 실정이다. 악(惡)이 가진 매혹이 우리에게 실질적으로 유해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비판적인 입장에서는 윤리에 대한 입체적인 사유 없이 피상적인 선(善)을 추앙하는 태도가 지양되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러한 대립 구도에서 등장하는 또 다른 슬로건은 시몬 베유를 인용 및 각색한 구절로, 다음과 같다. “악은 지루하고 선은 매혹적이다.” 이는 <중력과 은총>에서 문학이 예술로서 현실에 관계하는 것은 오직 도덕적 기여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맥락에서 등장하는 구절이다. 즉 “문학이 지루함과 부도덕의 양자택일에서 벗어나”기 위해 문학은 도덕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 


여기서 진행되고 있는 논의 또한 예술의 현실성과 연관되어 있다. 예술이 실제 세계에서 행사하는 힘이 감상자를 선하게, 혹은 악하게 바꿀 수 있다고 또한 이 때문에 악을 묘사하는 작업에는 특정한 방향성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악인의 서사’를 부정하는 입장이다. 반면 악을 묘사하는 데 있어 작가의 자율성을 중시하는 관점에서는 비록 예술이 현실적 힘을 가졌을지라도, 그것이 오직 도덕적 수단이어서는 안되며 수용자는 예술이 묘사하는 악의 매혹에서 다층적인 맥락을 산출해낼 힘이 있고 이 역시 예술의 중요한 역할임을 강조한다. 또한 이러한 입장에서는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악성에 대하여 관용과 이해를 금기시한다면 이는 오히려 선의를 가장한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가능할 수 있겠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중요한 것을 간과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선악의 관념과 양자의 관계 양상이 작품 내부에서 어떠한 기능으로서 작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즉, 작품이 선악을 어떻게 정의하고 어떠한 관점을 취하는지 그 질문이 피상적인 선악의 대립 구도에 선행되어야 한다. 각개의 작품에서 이야기하는 선악의 정의와 기능이 상이한 상황에서 독자가 이를 하나의 모호한 합의 아래 두고자 할 때, 이 논의는 주관성에 의존하는 소모적 언쟁으로 변모한다. 우리는 이때 하나의 작품을 사례로 선의에 대한 정의가 어떻게 재해석되고 있는지 살펴보며 상술한 주장을 근거 짓고자 한다. 


<착한 여자 안선해>는 선의를 ‘호구짓’으로 정의하고 있다. 평범한 회사원 ‘선해’는 그의 유약한 심성으로 인해 타인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해 착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선해는 쌓여가는 피로와 억하심정을 곱씹으며 자신에 대한 평가, 즉 ‘착하다’는 말이 착취자의 이데올로기임을 깨닫는다. 또한 그것이 선해 자신의 나약함을 정당화하는 방어기제라 정의하기도 한다. 일상에서 선의란 단지 상호간 자신의 안위를 유지하려는 방어기제인 것이다. 이러한 선해 나름의 정의를 통하여 그는 “선의 지루함”에서 벗어나 선이 감추고 있는 권력관계와 마주한다. 이는 악의 서사에 대한 양측의 정의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본작은 선한 인물의 양가적 사유를 통하여 오히려 선인에게 악, 즉 도덕을 벗어나는 서사를 부여하는 제 3의 길을 택한다.


특히 선해는 자신의 선량함이 강압적인 가정환경에서 기인했음을 인지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마주해 나간다. 그는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잡역을 거부하는 데서 시작하여 가족과의 갈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등 추상적인 선악 개념을 일상에 자연스럽게 녹여내고 있다. 따라서 <착한 여자 안선해>는 선의 일상적인 정의를 구축하고 그것이 권력관계와 연관됨을 밝혀내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창작자는 선악 개념을 다루는 데 있어 항상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따라서 독자 또한 작품에 충실한 감상을 내놓을 때 선악의 논의는 더욱 생산성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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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유진

만화평론가(2019 만화평론 공모전 신인 부문 가작 수상)
텍스트의 의미를 중심에 두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