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들은 왜 스포츠 만화를 좋아하는가?
스포츠 만화에 관한 칼럼을 의뢰받고 언제 처음 스포츠 만화를 읽었는지 기억의 편린을 더듬었다. 생각해 보니 아마 초등학생 시절 읽었던 것 같다. 어떤 스포츠 만화였는데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이 만화의 한 장면은 잊히지 않는 스틸 샷처럼 선명하게 머리에 남아있다. 청소년 축구 대표 선수를 선발하는 회의를 마치고 나온 감독이 한 선수에게 말한다. “예상대로 유비는 1차 회의에서 청소년 대표로 선발이 되었다. 장비야, 너는 청소년 대표로 선발되지 못했다. 미안하다”라고 말한다. 청소년 대표로 선발되지 못해 풀이 죽은 장비를 향해 감독은 다시 말한다. “그런데 말이다. 그게 사실은 뻥이다. 우리가 어떻게 널 여기에 두고 경기에 나가겠니”라고 하면서 함께 기뻐하는 장면이다. 어떤 포인트에서 임팩트를 받아서 지금까지 기억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장면이 초등학생의 마음에 무언가 남긴 것 같다. 이 만화가 바로 <춤추는 센타포드>다. 축구 만화의 대가 오일룡 작가의 대표작으로 1990년대 아이큐 점프에서 연재되었다. 당시 많은 독자가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주인공 유비에게 자신을 이입하며 만화에 푹 빠졌으며 필자 역시도 아이큐 점프를 나올 때마다 사서 모으며 다음 내용을 애타게 기다렸다.
어렸을 적 스포츠 만화에 관한 또 다른 기억은 야구 만화 <4번 타자 왕종훈>이다. 만화의 일본판 제목은 <4P 다나카군>으로, 드래곤볼과 함께 90년대 아이큐 점프의 판매 부수를 올려주는 인기 만화였다. 주인공의 이름은 당시 빙그레 이글스의 장종훈 선수의 이름을 따서 왕종훈이라고 붙였다. 평범한 야구선수 왕종훈이 ‘1%의 재능과 99%의 노력’을 외치며 혹독한 훈련을 통해 에이스가 되는 이야기를 다룬다. 하필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이 만화를 알게 되어 수능을 앞두고 장장 단행본 52권을 독파하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불리는 고3 수험 시기를 <4번타자 왕종훈>과 보내며 만화 속 주인공과 함께 웃고 함께 울었다.
1970~80년대 스포츠 만화는 성인을 대상으로 신문이나 만화잡지에 연재되면서 많은 인기를 누렸지만 2000년대 중반부터 웹툰이 유행하자 그 인기는 다소 시들해졌다. 최근 들어 스포츠를 소재로 하는 웹툰이 다시 꾸준히 제작되는 추세다. 2024년 8월 기준 네이버웹툰에서 해시태그 ‘#스포츠’를 검색하면 총 41개의 만화를 확인할 수 있다. 소재도 탁구, 야구, 축구, 배구, 농구, 펜싱, 유도 등 다양하다. 다만 같은 기준으로 #로맨스(824개)나 #판타지(494개)를 검색했을 때 비해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니다.
스포츠 만화가 다른 장르에 비해 적은 이유는 추측 가능하다. 스포츠 만화의 주인공은 다른 장르보다 평범하게 시작하는 대기만성형 캐릭터가 압도적으로 많다. 만화 초반부터 먼치킨 캐릭터가 독자에게 사이다를 제공해야 이탈이 적기 때문에 요즘 웹툰 독자의 소비 성향에 따라 스포츠 만화가 상대적으로 적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요즘 웹툰의 작화 퀄리티가 평균적으로 높아지면서, 스포츠 만화가 다른 장르에 비해 상대적으로 손이 많이 가는 이유도 그 영향이 있다. 하지만 경기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인고의 시간을 극복하고 에이스로 거듭났을 때의 뿌듯함과 경기 진행 중간 느낄 수 있는 박진감, 독자의 심장을 웅장하게 만드는 이야기가 다른 장르에서 느끼기 어려운 스포츠 만화만의 매력이기도 하다. 독자들은 왜 스포츠 만화를 좋아할까? 독자들이 스포츠 만화를 통해 느끼는 매력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 먼치킨 vs 대기만성형
주인공의 유형은 스포츠 만화의 서사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스포츠 만화에서 독자를 작품 속으로 몰입하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속한 종목에서 월등한 실력을 갖추는 것이 전제된다. 아무리 감동적인 서사를 펼치더라도 주인공에게 우수한 실력이 없으면 스포츠 만화는 서사를 진행하기 어렵다. 그 압도적인 실력을 처음부터 타고났느냐 아니면 후천적으로 습득했느냐에 따라 만화의 서사가 결정된다. 스포츠 만화에 나오는 클리셰는 후자, 즉 노력을 통해 후천적으로 실력을 갖추는 이야기가 많다.
평범한 주인공이 우연한 기회에 어떤 운동을 시작하고 혹독한 훈련을 치르고 라이벌과 대결에서 승리하며 에이스로 성장하는 것이 많은 스포츠 만화에서 볼 수 있는 설정이다. 이 서사구조는 크리스토퍼 보글러의 ‘영웅의 여행’과 맞닿아있다. 할리우드의 스토리 컨설턴트 크리스토퍼 보글러는 신화학자 조셉 캠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서 영감을 받아 영웅의 여행을 12단계로 소개하며 영웅이 어떻게 탄생하는지 설명했다.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1) 일상 세계에서 평범한 일상을 살던 주인공이 (2) 모험을 떠나라는 요청을 받는다. (3) 처음에는 모험을 거부하거나 망설이지만 (4) 지혜로운 조언자에게 도움을 받아 (5) 일상을 떠나 모험의 세계로 들어간다. (6) 새로운 세계에서 시험을 겪고, 동료를 만들고, 적과 마주친다. (7) 가장 큰 위험이나 도전에 직면하여 (8) 때로는 실패를 경험한다. (9) 결국 노력 끝에 시련을 극복하고 목표를 달성하거나 보상을 얻어 (10)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11) 마지막 위기나 시험을 겪고 완전히 변화하여 (12) 경험과 지식 또는 영약을 가지고 일상으로 돌아와서 그것을 나눈다. 이 구조는 많은 이야기에서 그대로 또는 변형되어 사용된다. 모든 단계가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주인공의 성장과 변화, 도전과 극복의 과정을 보여주는 효과적인 공식이다. 고구마를 먹는 것같이 답답해 보이는 주인공의 노력은 어떤 계기를 통해 목표를 달성하고 영약을 가지고 일상으로 돌아오는 식이다.
스포츠 만화의 클리셰가 노력을 통한 주인공의 후천적 성장이라면 최근 스포츠 만화는 먼치킨, 회빙환 코드를 적용하여 도입부터 독자에게 시원한 사이다를 선사한다. 주인공은 만화의 세계관에서 자신이 알고 있든, 아직 자신에게 숨겨진 타고난 능력을 모르든 최강의 실력자이다. 작가는 이런 세계관을 독자와 미리 공유했기 때문에 독자는 아무리 강한 적이 도전하더라도 결코 걱정하지 않는다. 물론 타고난 실력자라고 해서 성장 서사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라이벌과 갈등을 겪고 여러 사건을 통해 다듬어지고 성장하기 때문에 느끼는 재미도 있다. <테니스의 왕자>의 에치젠 료마가 여기에 해당한다. 1학년이지만 타고난 실력으로 주위를 압도하지만 이 역시 갈등을 수습하며 모두가 함께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독자는 편안한 마음으로 주인공이 펼치는 이야기를 즐기기만 하면 된다. 결국 스포츠 만화의 먼치킨과 대기만성형 캐릭터는 모두 독자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매력을 가졌다.
2. 갈등을 극복하고 언제 하나(One-Team)가 되는가?
모든 서사에는 갈등이 존재한다. 갈등이 없는 이야기는 독자를 몰입시킬 수 없다.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목표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갈등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또한 라이벌, 빌런과의 대결은 주인공이 성장하는 데 필요하다. 독자는 등장인물과 함께 갈등을 겪으면서, 눈앞 공동의 적을 맞아 힘을 합치면서 하나의 팀으로 바뀌어 간다. 갈등이 입체적일수록 클수록 그 갈등을 해결했을 때 모두 하나 되는 감동은 더욱 커진다.
네이버웹툰의 축구 만화 <빌드업>이 있다. <빌드업>은 평범한 고등학생 강마루가 자신이 좋아하는 축구에 도전하는 이야기다. 축구는 좋아하지만, 아무도 끼워주지 않아 혼자 기본기만 연습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하자고등학교 축구부에 입부한다. 주인공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먼치킨이라기보다 축구를 한 경험이 거의 없는 대기만성형 캐릭터 유형에 해당한다. 그런데 설정이 조금 특이하다. 주인공은 학원물의 단골 소재인 ‘찐따 빵셔틀’이다. 축구 경험이 없는 초보가 플레이메이커의 역할을 하며 경기장 중앙에서 폭넓은 시야와 정확한 패스로 경기를 지배한다. 자칫 개연성 없는 전개일 수 있지만 학원물과 스포츠 만화가 캐릭터에 절묘한 매력을 부여했다. 일진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항상 주위를 살피며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의 위치를 기민하게 파악하는 것이 마루의 일상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경기장을 폭넓게 볼 수 있었고 기본기가 탄탄했기 때문에 동료에게 정확하게 패스를 하는 능력을 지녔고 결국 모두에게 신뢰를 얻는다.
하자고등학교 축구부에 있는 선수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 모두 ‘잘난’ 사람들이다. 자신이 뛰어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동료를 인정하지 않는다. 갈등은 점점 증폭되고 팀이 하나가 되지 않으니, 경기는 힘들기만 하다. 갈등을 중재하고 중간에서 이들을 하나로 만드는 것이 주인공 마루다. 갈등을 해결하고 하나가 될수록 팀은 강력해지고, 약체였던 팀은 어느새 주변에서 두려워하는 강팀이 된다. 마루의 성장에 가슴이 웅장해진 경험을 한 독자는 이제 마음을 열고 원팀으로 똘똘 뭉친 하자고등학교 축구부를 응원한다.
야구에 ‘9회 말 2아웃부터’라는 말이 있다. 지고 있는 상황에서 아웃 카운트 하나면 끝나는 경기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역전시켰을 때, 그리고 약팀이 강팀을 이기는 스토리라면 다른 어느 때보다 카타르시스는 배가 된다. 약팀이 마지막에 역전을 통해 강팀을 이기는 서사는 그 자체만으로 짜릿함이 있다. 현실에서는 일어나기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이 여정을 함께하며 독자는 주인공과 하나 된 팀에 몰입하며, 주인공의 승리는 곧 독자의 승리로 귀결된다.
3. 스포츠 만화를 통해 접하는 스포츠의 매력
야구, 축구, 농구, 배구 등은 인기 스포츠는 평소에 미디어에서 중계방송을 많이 볼 수 있다. 반면 양궁, 사격, 레슬링, 유도 등 이른바 우리나라에서 비인기 종목으로 분류되는 종목은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에서 대체로 좋은 성적을 내지만 그때만 잠깐 대중의 관심이 되곤 한다. 대중이 잘 모르는 종목을 소재로 한 스포츠 만화도 찾아보면 의외로 재미있는 만화가 많다. 인기 스포츠 외에 개인적으로 만화를 통해 처음 알게 된 스포츠 종목도 여럿 있다. 개인적으로는 수구와 펜싱이다.
하일권 작가의 <두근두근두근거려>는 여자수영복에 관심을 두는 남자 고등학생이 여장을 하고 고등학교 수구팀에 들어가서 벌어지는 일을 그렸다. 전부터 ‘수구’라는 종목을 이름만 알고 있었는데 이 만화를 읽으면서 수구라는 종목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앞에서 살펴본 기준을 적용하자면 이 만화는 개인의 성장도 다루지만, 오히려 서로를 향한 갈등을 해결하고 하나의 팀이 되는 것에 조금 더 중점을 두었다. 여자수영복을 소재로 사용하여 자칫 어색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하일권 작가식 전개로 어색하지 않게 풀어낸 작품이다. 펜싱을 소재로 한 <인피니티>도 비슷하다. 피하는 것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주인공이 축구부에서 나와 펜싱부에 입부하여 전개되는 이야기다. 개인의 성장과 갈등 해결 코드를 모두 적용하여 독자의 감동을 끌어냈다.
스포츠 영화와 스포츠 만화는 독자를 몰입시키는 서사구조는 비슷하지만, 영화와 만화는 분명하게 다른 차이가 있다. 바로 장면을 포착하는 방식이다. 영화에서 2~3초 내외로 지나가 버리는 짧은 장면을 만화는 놓치지 않고 순간적으로 포착, 극적으로 여러 컷을 표현하여 역동성을 극대화하였다. 스포츠 만화의 매력은 독자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마치면서
많은 사람이 스포츠를 인생에 비유하기도 한다. ‘인생은 9회 말 2아웃부터’라는 말이 있듯이 스포츠는 짜릿한 역전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승리의 환희, 패배의 아픔, 끊임없는 도전과 성장의 과정 등 스포츠가 가진 본질적인 요소가 만화와 만나 개인의 성장과 갈등 해결 코드로 독자들에게 깊은 감동과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여전히 스포츠 만화가 사랑받는 것이 아닐까?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2024 파리올림픽이 한창 진행 중이다. 다른 올림픽 때보다 대한민국 선수단의 활약이 돋보인다는 반가운 뉴스가 연일 들려온다. 사격, 양궁 등 전통적으로 우리나라가 강세인 종목에서의 선전은 물론 기대하지 않았던 종목에서 예상외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뿌듯함을 느낀다. 페어플레이 정신을 가지고 매 경기 최선을 다하는 우리 선수단의 활약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