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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신인 만화평론 공모 수상작 : 대상(지정평론)> 만화, 우리가 진짜 보고 싶은 풍경

더 비싼 고가의 상품으로 팔려지기 위해서는 우선 소비자의 시선을 끌어야만 한다. 즉, 상품으로서의 가치부여는 보다 참신하고 아름다운 외양과 매력적인 겉모습에 우선적으로 주어진다. (중략) 옷차림이 제2의 인격으로 인식되고, 화장품과 미용산업의 급속한 발전 등은 모두 이와 무관하지 않다.

2019-10-17 최윤주



더 비싼 고가의 상품으로 팔려지기 위해서는 우선 소비자의 시선을 끌어야만 한다. 즉, 상품으로서의 가치부여는 보다 참신하고 아름다운 외양과 매력적인 겉모습에 우선적으로 주어진다. (중략) 옷차림이 제2의 인격으로 인식되고, 화장품과 미용산업의 급속한 발전 등은 모두 이와 무관하지 않다.1)

위 인용문은 웹툰 <여신강림>(야옹이, 네이버웹툰)이 창작된 사회적 배경이자, 작품 내에 그려지고 있는 현실을 설명하기에 맞춤이다. 시각문화가 폭발적으로 발전하고 외모지상주의 담론이 그 어느 때보다 팽창된 사회에선 만화 역시 이 현실과 밀접히 유관한 소재를 취한다. 교우관계와 연애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메이크업을 시작한 여고생 주인공이 그 증거다. 이렇게 탄생한 주인공 주경은 매회 화장과 착용을 수행하며 만화 밖 외모지상주의 현실을 만화 안에서도 착실히 살아낸다. <여신강림>이 외모지상주의를 제동 없이 답습하고 나아가 조장한다는 비판은 이러한 맥락에서 꾸준히 있어왔다.
그런데 <여신강림>과 외모지상주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다. 실제적인 메이크업 방법(<겟 레디 위드 미> 등)이나 핍진한 10대 문화(<연애혁명> 등)를 무기로 인기를 끌어낸 다른 만화들과 비교해 <여신강림>만의 매력은 무엇인가? 충분히 익숙한 흐름의 순정만화가 어째서 이토록 인기를 끄는가? <여신강림>의 또 다른 문제에 관한 논의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출발한다. 바로 <여신강림>의 셀링포인트가 이야기 내부가 아닌 그것을 담아내는 ‘그림’에 있다는 사실이다.
시각문화의 발전과 외모지상주의 심화의 정점에 ‘쓸모없어도 예쁘면 산다’는 소비 방식이 놓여 있는 것처럼, 독자(소비자)들은 이제 만화 역시 ‘재미없어도 예쁘면 본다’. 이런 상황에서 앞선 인용문은 외모지상주의 사회에서 상품으로서의 만화가 지금 어떤 방식으로 소비되고 있는가에 대한 진단으로도 읽힐 수 있다. 담론 재생산에 대한 비판을 잠시 접어두더라도 <여신강림>을 두고 고민해야 할 또 하나의 문제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이런 시장에선 만화가 예쁘고 재미없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뻐서’ 재미없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만화 밖 현실이 아니라 만화라는 양식 자체를 위협하는 중대한 문제다.
만화에서 그림은 텍스트의 부차적 보완물이 아니라 텍스트와 상호 결합해 이야기를 전달하는 핵심적인 표현 요소다. 간혹 ‘만화’라는 양식이 아니었다면 결코 완성될 수 없었을 것 같은 인상을 주는 만화들이 있다. 양식의 필연성을 인지하고 핵심 표현 요소들을 놓치지 않고 균일하게 활용해낸 결과일 것이다. 그저 예쁘게만 그려질 것 같은 순정만화 그림체에도 작화로서의 기능이 존재한다. 미형으로 발달된 순정만화의 그림체는 자주 서사와 무관하게 그저 예쁜 그림을 제시하는 데 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섬세한 표정과 예민한 감정 표현 기술을 발달시킨 것도 사실이다. 순정만화만의 독특한 표현 방식은 작가의 감성 표현이자 독자와 감성을 공유하게 하는 장치다.2) 이를테면 순정만화를 감상할 때 두 눈의 반짝임을 잃은 주인공의 모습에서 독자는 인물의 어두워진 내면을 읽어낼 수 있다.
그렇다면 순정만화로 분류되는 <여신강림>에서도 이러한 감성 표현과 공유가 충분히 이뤄지고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이에 대한 대답은 부정적이고 그 대답은 그림에 담겨 있다.


<여신강림>의 그림들은 대체로 정적인 구도를 취한다. 거의 대부분의 컷이 정면을 응시하며 간혹 측면 구도로 그려지는데, 흡사 카메라를 의식하며 찍힌 인물사진과 유사하다. 표정도 마찬가지로 정적이다. 기본적으로 무표정, 혹은 미소 짓는 표정에 고정됨으로써 자연히 얼굴에 담긴 감정보단 얼굴의 ‘예쁜’ 생김새에 집중하게 한다. 극이 전개되면서 보다 다양한 표정이 필요해질 때에도 무표정과 미소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단지 짜증이 날 땐 미간의 주름이, 당황하면 땀방울이, 슬플 땐 눈물 레이어가 추가된다는 느낌이다. 그마저도 예쁜 형태를 유지하기 어려울 땐 동공과 명암이 생략된 단순한 형태로 제시되며, 특별히 얼굴 근육 전체를 사용해야 하는 역동적인 표정은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짤’을 패러디해 웃어넘기게 한다.
이런 작화를 기반으로 섬세히 감성을 전달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여 연애가 핵심 서사인 순정만화임에도 불구하고 짝사랑을 앓는 주인공 주경의 감정은 섬세하기 이전에, 진지하게도 전달되지 않는다. 전개상 꽤 중요한 국면일, 남자주인공 수호에게 고백할지 고민하는 장면이 그렇다. 고백 후 차여 친구로도 남지 못하는 것과 가만히 있다 수호에게 다른 애인이 생겨버리는 두 가지 부정적 미래를 상상하며 불안에 싸인 주경의 모습은 또 한 번 패러디 짤로 귀결되며 가볍게 그려진다. 짝사랑으로 인한 불안과 지독한 외모 콤플렉스로 인한 자신감 결여가 뒤엉킨 장면이 ‘순정’만화라 하기엔 너무 가벼워 보인다. 관계의 미래를 두려워하며 내뱉는 대사가 겨우 “뜨흑! 상처다.. 마상,..!”인 것과 애초 고민의 과정이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형태로 그려진 것이 정말 우연일까.
이 같은 전달 방식은 이후 진지한 대목에서도 감상을 방해한다. 어렵사리 서로의 마음을 알았지만 일본에 있는 수호의 아버지가 사고로 중태에 빠지면서 둘은 고백과 동시에 이별하게 된다. 행복이 정점일 때 갑자기 들이닥친 불운한 사건에는 비극성을 심화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함에도, 그간 고수해왔던 작품 내 작화 관습이 걸림돌이 된다. 수호의 고백을 받은 주경은 깜짝 놀라다 이내 울컥 얼굴을 구기는데, ‘예쁘지 않은’ 표정이 모처럼 진지하게 그려져 있다. 하지만 작품 내에서 그런 표정이 패러디 장면에만 그려진 탓인지, 즉각 진지하고 슬픈 표정임을 이해하는 데 제동이 걸린다. 한편 비행기에서 우는 수호의 모습은 측면에서 찍힌 예쁜 얼굴에 눈물만 덧붙여진 형태다. 눈물을 흘리고 있으니 우는 것이고, 울고 있으니 슬퍼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는 있으나 여기에 독자가 충분히 이입하고 공감할, 인물의 감정과 극의 분위기를 공유할 여지는 없어 보인다.

△ ‘예쁘지 않은’ 표정이 모처럼 진지하게 그려져 있지만(오른쪽),
작품 내에서 그런 표정이 패러디 장면에만 그려진 탓인지
즉각 진지하고 슬픈 표정임을 이해하는 데 제동이 걸린다.

이입을 막는 그림에 장면 장면은 조각나 이어지지 않고, 자연히 서사 역시 제 굴곡을 갖추기 어렵다. <여신강림>의 연재 초반에는 주인공의 콤플렉스는 물론, 화상 입은 미지의 인물이나 알코올 중독 부모를 둔 수진의 가정사 등 꽤 심각한 설정들이 등장했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처음 설정이 제시된 이후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남겨진 ‘떡밥’들을 뒤로 하고 지금 <여신강림>이 수개월째 몰입하고 있는 것은 주인공들의 연애 장면을 보여주는 일이다. 
그림이 사실상 작화(animation darwing)라기보단 일러스트에 가깝게 기능한 결과, 서사를 추동할 힘을 잃어버린 것이다. 결국 서사도 되지 못하는 행위만 남고, 남은 공간을 다시 화려한 그림이 채우는 과정의 반복이다. 그림이 전면에 내세워져 있으나 그림으론 무엇을 할 수 없는 아이러니가 이렇게 발생한다. 그림체가 유독 ‘예쁜’ 만화마다 따라붙는 ‘작가님 못생긴 거 못 그리시죠’라는 유행어가 더는 칭찬이나 농담으로만 받아들여질 수 없는 이유다. 이야기를 이야기답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못생긴’ 것도 그릴 줄 알아야 한다. 혹 예쁜 것만 그리기로 작정한 것이라면, 적어도 그 ‘예쁨’의 스펙트럼을 넓혀야 한다. 하지만 지금 <여신강림>의 작화에는 이러한 기능적 측면이 거의 거세되어 있다. 그래서 ‘순정’도, ‘만화’도 이 작품을 설명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이것은 차라리 서사가 최소한으로 축소된 비주얼 중심의 뮤직비디오에 가깝지 않을까. 마치 마음에 드는 뮤직비디오 장면을 캡처하기 위해 흐름을 끊고 계속 정지 버튼을 누르듯, <여신강림>의 페이지는 가장 예쁘고 예쁘고 예쁜 장면에 멈춰져 있다.

‘스낵컬처’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듯, 바쁘고 힘든 와중에 가벼운 즐거움을 찾기 위해 만화를 찾는 대중의 수요를 전적으로 비판하거나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어떤 만화들은 가벼움 그 자체가 목적이자 가치일 수도 있다. 하지만 특정 작품군에 대한 소비의 쏠림 현상이 생산의 쏠림으로 이어지고 그 영향이 결국 시장 전반은 물론 개별 작품 내부에까지 침투되는 상황3)은 아무래도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실제로 비주얼 중심의 웹툰을 주력 삼는 카카오페이지는 최근 ‘AI 키토크’ 기능을 도입했는데, 그림체 카테고리를 스토리와 분위기보다 상위에 위치시켰다. 작은 눈과 두꺼운 다리, 3등신 정도 되는 독특한 그림체로 시작한 <유미의 세포들>이 독자들의 요청을 거듭 거쳐 마침내 큰 눈에 가는 다리, 8등신의 그림체로 자리 잡게 된 사례 역시, 이쯤에서 진지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 이동건, <유미의 세포들>

그러니까 지금 작가와 독자가 당면한 가장 큰 두려움은 그리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이대로는 우리가 그토록 좋아하는 만화가 재미와 감동을 잃고 말지도 모른다는 것. 기능 없이 예쁘기만 한 소비재들의 결말은 인테리어 소품으로라도 제 자리를 찾을지 모르나 재미도 감동도 없는 만화의 결말은 어디로 향할 수 있나. 서사를 텅 비운 채 오로지 ‘예쁜’ 만화만이 범람하는 풍경, 만화를 좋아하는 이들에겐 디스토피아나 다름없을 그 풍경이, 어떤 구도로 그려지든 그리 아름다울 것 같지는 않다.


주)

1) 엄묘섭, "시각문화의 발전과 루키즘", 문화와 사회/5(-), 2008., 73-102, 한국문화사회학회
2) 김지영, "순정만화의 멜로적 형식과 감성의 정치학", 어문논집/0(53), 2006., 419-459, 민족어문학회
3) 위근우, "웹툰 내 장르 다양성은 왜 보장되어야 하는가?", 지금, 만화/3(-), 2019., 4-9, 한국컨텐츠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