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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하게 발랄한, <지영>

지영 (지영, 주로출판사) 리뷰

2025-05-31 이용건

끔찍하게 발랄한 <지영>

『지영, 지영

0. 지영이는 지영이의 진짜 이름이 아니다.

지영소수자의 자기 말하기를 보여준다는 설명은 절반쯤만 맞는 말이다. 명랑한 표정으로 세계를 누가 봐도 술집 여자인 복장으로 뛰어다니는 지영은, 세계를 배반하기만 한다.

문학계에 주변부로 밀려났던 이들의 목소리를 공론장에 끌어오는 긍정적인 효과를 낳은 오토-픽션의 유행은 그것만을 낳은 것은 아니다. 작가들은 진실과 허구의 사이 속에서 새로운 윤리로 무장한 현시대 독자들에게 공명하기 위해서, 적어도 자신의 세계만큼은 일관되고 정확하게 재배치할 수 있다고 믿어야 했다. 그러니까 자신이 속하지 않은 세계에 대해서는 함구해야 하는 것이 윤리로 들어선 시대의 반작용으로, 자신의 세계만큼은 자신이 겪은 그대로가 현실의 사실적 재현이라고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건이후를 인과율에 따라 재배치한 뒤에 교훈 또는 자신의 감상을 추출하는 오토-픽션 소설들은, 교훈이 얼마나 바람직한지와 무관하게 화자에게 특권적 위치를 부여한다. ‘나의 세계에서 틀릴 리 없다는 자기 확신.

[지영]의 세계 속에서는 이러한 종류의 자기 확신이 없다. 그러니까 지영화자를 자신의 발랄한 얼굴로 구별하는 [지영]에서 는 언제나 . 일인칭은 없고, 지영은 지영으로 둔갑한다. 만화의 첫 챕터에서 어차피 제가 본명을 알려줘도 아무도 안믿기에, “알려줘도 상관없다는 지영의 대사가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이 만화는 화자를 반사한 지영을 통해 현실을 만화 속으로 투영한다. 그러니까 지영이는 지영이의 진짜 이름이 아니, 그렇기에 지영은 세계를 배반할 수 있는 일종의 권능을 획득한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해보자면 지영이 배반하는 세계지영의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세계다. 우리의 세계 속에 있는, 아니 우리의 세계 자체를 존속시킨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성매매는 키스방의, 모던바의 문을 닫고나오면 세계 바깥으로 추방된다. [지영]은 세계에 속해있지만, 세계에 속해있다고 말할 수 없는 키스방과 모던바의 세계를, 그러니까 우리의 세계를 배반하고 세계 내부에 아주 위험하게 위치시킨다. ‘지영의 성매매는 키스방과 모던바로 대표되는 성 판매, 호스트바와 토닥이로 대표되는 성 구매로 이루어진다. 페미니즘의 지형도 속에서 피해자로 할당받은 각본을 배신하고, 자신이 참여한 세계를 서술하는 [지영]에서는, ‘윤리적 교훈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성 노동자에 부여된 각종 부정적인 이미지들을 무마하거나 외면하기 위해 피해자로서 말하기를 관습적으로 반복해 오던 기존의 재현들은 [지영] 앞에서 힘을 잃는다. ‘자발성비자발성부역자피해자를 일대일로 간편하게 대응시키던 기존의 선분을 구부리고 휘는 [지영]의 세계 속에 선분은 오직 입체를 이루는 부분이다.

1. 선분과 입체

지영은 세계의 선분을 해체하고 입체적 단면으로 재조립하는 대신, 만화적 양식을 선분으로 채운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해보자면, 세계의 단면을 입체적으로 구성하기 위해, 단순한 양식을 채택한다. 이연숙 평론가의 추천사대로 [지영]의 그림체가 현실과 현실 아닌 것을 훌쩍 오갈 만큼 가벼우며, 무거운 침묵과 발랄한 폭소를 함께 담을 수 있을 만큼 탄성이 좋은 까닭은, 그것의 단순함에 있다. 전형적인 만화의 캐릭터처럼 단순하게 그려진 [지영]은 바로 그 단순함을 통해 독자들이 [지영]의 세계를 수용하게 만든다. [지영]의 세계를 독자들이 읽을 수 있었던 까닭은, 2등신 또는 3등신인 캐릭터들로부터 보이는 직관적인 미숙함때문이다.

강덕구가 아마추어리즘을 정의하면서 인용한 앤디 메리필드를 재인용해보자면,1) 삶의 아마추어는 전 세계를 포용한다. 능력주의 속에서 전문가와 대비되는 단어인 아마추어는 미숙함을 특징으로 한다. 무엇인가 탄성을 자아내거나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대신, 친숙함과 무해한 귀여움(이연숙)’을 속성으로 가지는 아마추어는 바로 그렇기에 보편적이다. [지영]의 미숙한 그림체는 독자들에게 침투하기 위한 일종의 음모이며, 일단 침투한 후에는 자리를 비켜줄 생각이 없는 고약한 심보의 상징이다. 그러니까 귀여움과 무해함으로 중무장한 [지영]에게 마음을 한켠 내준 뒤에는, 돌이킬 수 없이 꼼짝없이 연루되고 마는 것이다. ‘지영은 발랄한 그림체로 우리의 세계를 구성하는 선분들을 꼬아놓을 것이고, 그 꼬아놓은 선분들이 세계의 단면이자 자기 자신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지영을 내쫓고 우리의 세계를 다시 안전하게 만들 수 없을 것이다. ‘지영은 쫓아내려고 노력하기에는 너무 하찮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2. [지영]의 세계

[지영]에 대해서 쓰고 싶다는 생각은 나의 아주 오래된 생각이었다. 포스타입에 연재된 [지영]을 읽을 때부터 모두가 [지영]을 읽도록 설득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지영]에 대해서 무엇인가 을 한다는 것이 이 작품을 훼손하는 일은 아닐지 걱정되었다. 쓸데없는 말을 덧붙이는 것은 아닐까, 내가 [지영]에 대해서 쓸 만큼 이 작품을 알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을 뒤로한 채 일단 쓰기로 시작한 까닭은, 누군가가 나의 글을 지적해 주기 바랐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적은 (높은 확률로 정당하겠지만) 정당하지 않은 단순한 공격일지라도, [지영]을 보다 복잡하게 만들 수 있지 않겠느냐고 생각했다. 나는 [지영]의 작가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니까, ‘지영의 말처럼 거짓으로 사는 것은 쉽, “진짜로 사는 것은 어려운일이다. 이 작품을 읽고 나서 내가 처하게 된 곤경과 어려움을 모두가 공유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1) SeMA 비평연구 프로젝트: 2022 라운드테이블 2. 아마추어리즘과 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