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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를 찌르는 퀴퀴한 현실의 냄새, <흙수저를 위한 나라는 없다>

흙수저를 위한 나라는 없다(동해수산, 네이버웹툰) 리뷰

2025-05-31 김윤진

코를 찌르는 퀴퀴한 현실의 냄새, <흙수저를 위한 나라는 없다>

『흙수저를 위한 나라는 없다, 동해수산

제목에서부터 비관적인 정서가 강력하게 느껴지는 <흙수저를 위한 나라는 없다>동해수산이라는 필명을 쓰는 작가가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그려낸 만화다.

202010월부터 20213월까지 네이버 웹툰의 베스트 도전에서 연재된 이 만화는 총 7편의 짧은 구성임에도정확하게 말하자면, 본편은 6편이고 마지막 1편은 에필로그다첫 화부터 강력한 흡입력으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실화다라는 단언으로 시작되는 1화에서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부모님에 대한 기억을 중심으로 자신의 불우한 어린 시절을 생생하게 회상한다. 과거시제의 문체임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이 그것을 마치 현재시제인 것처럼 경험하는 이유는 사실적인 동시에 상징적인 묘사 덕분일 테다.

거칠고 투박한 그림체에도 불구하고 이 만화에는 현실의 냄새가 짙게 배어있다. 이는 경험하지 않고서는 쉽사리 상상할 수 없는, 구질구질한 현실의 민낯이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저자의 아버지형근이 학부모의 묘사, ‘아무렇게나 어질러진 집구석이나 달리 할 게 없어 만화책과 포르노를 보던장면의 묘사 등이 그렇다. 한편, 속도감 있게 내달리는 그의 만화에는 상징적인 묘사도 두드러진다. 대기업 취업 후 느낀 괴리감을 표현하거나 가난으로 인한 고통의 구조를 도식화한 장면이 대표적이다. 흙수저였던 어린 시절에 대한 생생한 회고를 지나, 대기업 입사 후 호수 같은 평정심을 지닌 아내를 만나 얻게 된 깨달음으로 1화는 마무리된다. “만약 정말로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돈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걸 깨닫기 위해서일 것이리라라는 작가의 말은 그가 이제는 흙수저를 벗어났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렇다면 흙수저란 무엇인가? 2010년대에 들어 확산한 수저계급론은 부모의 경제력과 영향력을 수저에 빗대어 표현한 것으로, 재산, 인맥 등 부모가 자식을 뒷받침해 줄 능력이 충분할 경우는 금수저로 표현하며 부모에게 경제적인 도움뿐 아니라 정서적인 지지조차 얻을 수 없는 경우를 흙수저로 표현한다. 취업 경쟁이 심해지던 상황에서 개인의 성취를 결정하는 것은 노력이 아니라 전적으로 부모의 재력에 달려있다는 인식에서 기인한 것이다. 실제로 부모의 경제 수준과 자녀의 학업 성취도가 대체로 비례한다는 연구가 증명하듯, 이는 단지 청년들의 불만에 그치지 않는다. 자신을 흙수저라 칭하는 작가의 어린 시절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가 설득력을 얻고 독자의 공감을 얻는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한편, 만화 곳곳에서 관찰되는 작가의 뼈 있는 유머는 흙수저가 품고 있는 체념적·비관적 정서를 강화하는 동시에 만화 전반의 암울한 분위기를 순화하며 재미를 자아낸다. 입사 후 만난 동기들의 가정환경을 묘사하는 장면(1)에서는, 서울의 야경이 두드러지는 가운데 다리 아래로 떨어지는 사람의 형상이 작게 표현되기도 하고, 지하철 출퇴근을 그리는 장면(1)에서는 한 놈만 걸려라라는 문구가 적힌 아파트 광고가 그려져 있다. 이러한 묘사는 교묘하게 전복적인 시선을 드러낸다. 아내의 풍족했던 학창 시절에 대하여 말하는 가운데 그와 대비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낸 장면(1) 또한 인상적인데, 여기서 그는 학사모에 문자 그대로 발목 잡혀있다. 이는 한 번도 등록금이나 용돈을 벌기 위해 고군분투한 적이 없다라는 아내의 경험과 시각적으로 대비되며, 하나의 컷 안에서 함께 제시된다.

이러한 태도는 부모님의 빚으로 등록금을 메꾸는 장면(2)과 언어유희(‘뜨거운 냉면’,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용해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들을 표현한 장면(2)에서도 관찰된다. 언어유희는 다른 장면에서도 발견되는데, 살진 모습을 ‘d-look, d-look’으로 표현하고(2) 군인들이 모인 장면에서 ‘Ugle Ugle’이라는 표현과 ‘Bagle Bagle’이라는 단어를 교묘히 섞어 쓰는 것이 그것이다. 이처럼 곳곳에서 발견되는 충돌과 긴장이 내포된 언어적인 표현과 시각적 장치는 만화적 재미를 담보하며, 독자의 몰입을 유도하는 요소가 된다.


‘2. 흙수저 엑소더스의 시작에서는 제목에서 암시하듯 본격적인 탈출의 징조가 포착된다. 여전히 운명론적인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군대에서 만난 귀인의 존재를 암시하며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두는데, 귀인의 정체는 3화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밝혀진다. ‘3. The Promotion’의 전반부는 가세가 극도로 기울던 시기, 누나의 기적적인 공기업 입사기를 그려내고 있다. 단호한 선택의 결과인 누나의 성공기를 그려내면서도, 삶에는 선택의 여지란 거의 없다고 말하는 작가의 태도는 언뜻 모순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장기보다는 체스를 선호한다는 대목에 이르면, 그가 긍정하고자 하는 삶의 태도가 무엇인지 곧 알아차리게 된다. 그것은 그가 매일 새벽 동틀 무렵 도서관으로 고독한 한 걸음을 옮겼을누나에게서 목격한 것이자 그저 자기 몫의 군 생활을 덤덤하게 했을 뿐인 귀인에게서 발견한 것일 테다. 누나의 이야기에서 귀인의 이야기로 다소 급하게 전환되는 3화의 구성은 이러한 지점에서 조금은 해명될 법하다.

이어지는 4화와 5화에서는 귀인의 정체가 본격적으로 밝혀진다. 귀인과의 꿈 같은 시절을 뒤로 하고 작가는 전역이라는 현실을 맞이한다. 비록 그는 단번에 흙수저를 벗어나진 못하지만, 귀인을 통해서 지식과 지혜를 탐내고 또 배웠던 시간을 발판으로 삼아 원하는 회사에 취업한다. 3화에서 언급했듯, 적어도 그에겐 그것이 성공이었을 테다. 분명히 성공했음에도 작가의 태도에서 여전히 비판적인 어조가 감지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흙수저를 위한 나라는 없다>는 흙수저를 탈출한 (듯 보이는) 작가가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회고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따라서 독자는 작가가 그리는 현실의 퀴퀴함으로부터 얼마간 거리를 둘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를 마련한다. 그럼에도 때때로 날 것의 냄새가 갑작스럽게 돌출하며 독자의 감각을 자극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 만화가 독자를 몰입하게 만드는 지점이기도 할 테다. 전개가 다소 매끄럽지 않거나 지나치게 단순화된 부분도 있지만,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멈추기 어려운 만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