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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만이 결핍을 채울 수 있다, <펀 홈>

펀 홈(앨리스 벡델, 움직씨) 리뷰

2025-05-31 김선준

결핍만이 결핍을 채울 수 있다, <펀 홈>

『펀 홈, 앨리스 벡델

내가 본격적으로 상상을 하기 시작한 때는 우리 가족이 가장 좁은 집에 살 때였다. 물론 그전에도 상상이란 것을 하긴 했겠지만 어떤 목적성이나 구체성을 지닌 상상은 아니었다. 작은 방 두 개와 부엌과 화장실이 오밀조밀 붙어 있는 작은 집. 안경을 벗어도 선명하게 보일 만큼 가까운 벽들. 벽 너머로 또렷하게 들리는 엄마와 아빠의 목소리.

이른 오후 수업이 끝나고 집에 오면 등교할 때와 같은 차림으로 아빠가 나를 맞았다. 아빠 눈치를 보느라 집에서 마음대로 컴퓨터를 쓰거나 TV를 볼 수 없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교양만화를 보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 혹은 상상하는 것 정도였다. 만화를 보고 그림을 그리고 상상을 하는 세 가지 활동은 나를 좁은 집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특히 자주 하던 상상 중의 하나는, 우리 집이 사실 굉장한 부잣집이라는 상상이었다. 우리 가족의 진짜 집은 넓고 안락하고 화려한 집인데, 우리 세 남매의 교육과 성장, 겸손을 위해 부모님이 가혹한 환경을 조성해 연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프로이트가 가족 로망스개념을 통해 말하듯 현재의 가족에게 결핍을 느끼는 아이가 으레 할 법한 상상이지만, 그때는 상상의 차원을 넘어 증명된 사실인 양 믿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상상 속 고귀한 신분과 현실의 빈천한 신분이라는 두 가지 정체성 사이를 오갔다. 이 이중의 정체성은 그대로 아빠에게도 적용되었다. 우리가 좁은 집으로 이사 온 것도 아빠 때문이었고, 부잣집이라는 사실을 숨기기로 결정한 사람도 아빠일 테니까.

앨리슨 벡델의 그래픽 노블 펀 홈또한 현실과 상상, 이중의 정체성을 오가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 작품의 서술자는 앨리슨 벡델로, 저자 자신과 일치하는 존재이면서 다를 수도 있는 인물이다. 소설로 치면 오토픽션(autofiction), 자전적 소설 같은 장르로 이해할 수 있겠다. 하지만 주인공은 앨리슨 벡델이 아니라 그녀의 아버지, 브루스 벡델이다. 펀 홈은 브루스 벡델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시점에서 앨리슨 벡델이 아버지와 있었던 일들을 회상하는 장면들과 브루스 벡델의 과거를 추적하고 상상하는 장면들이 모자이크처럼 얽히고 나열되는 이야기다.

1장만 보면 이 가족은 평범한 미국 중산층 가정처럼 보인다. 앨리슨은 아버지가 밖에선 이상적인 남편이자 완벽한 아버지지만, 집안에선 쉽게 화를 내고 편집증적이며 자신에게 여성스러운 옷을 강요하는 아버지라고 서술한다. 이런 아버지는 누구나 기시감을 느낄 만한 아버지다. 하지만 아버지의 사고사에 대해 자살이라고 믿는 앨리슨의 서술에서부터 이야기의 긴장과 역설은 점차 강해진다. 2장에서는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펀 홈(Fun Home)’의 의미가 드러나는데, 장의사 일이 가업인 벡델 집안의 거주지이자 장례식장이었던 집을 Funeral Home, 줄여서 Fun Home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죽음재미정도로 받아들여지는 역설 속에서, 브루스 벡델의 죽음 또한 앨리슨에게는 울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는 상황으로 다가온다. 이는 가족희비극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이 가족에게 이중성들이 산재해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3장에 이르러 밝혀진다. ‘퀴어(queer)’라는 단어로 시작되는 3장에서, 앨리슨 벡델은 부모님에게 자신이 레즈비언이라고 커밍아웃하고, 곧이어 아버지 브루스 벡델이 결혼 전부터 계속해서 남자들과 관계를 맺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새롭게 알게 된 충격적인 사실로부터 앨리슨은 아버지에 대한 자신의 지난 모든 기억을 재정립하게 된다. 자신에게 여성스러운 옷만 입히려 했던 것이나, 아버지와 친하게 지냈던 젊은 남자들을 떠올리기도 하고, 아버지가 왜 감옥에 갈 뻔했는지를 알게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추천해준 책들과 자신을 데리고 간 연극들에 동성애적 코드가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린다.


여기서 이 책의 가장 독특하고도 흥미로운 지점이 발생한다. 펀 홈을 구성하는 일곱 개의 각 장에는 문학작품이 부제로 붙어 있다. 이 소설들은 각 장을 관통하는 서사와 주제에 연결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브루스 벡델이라는 인물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예를 들어 브루스는 피츠제럴드에게 열광했었는데, 그의 대표작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는 브루스 벡델과 여러모로 많은 공통점을 갖는다. 개츠비 또한 미국 사회에서 시골 출신백마 탄 왕자라는 두 가지 정체성을 가진 채 살아가다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 인물이다. 무엇보다 사회적 압력으로 인해 자신의 진정한 사랑을 이루지 못한 인물이다. 작중에서 자세히 언급되진 않지만, 앨리슨 벡델이 동성애자로서 자신을 드러내고 활발하게 활동했던 반면, 브루스 벡델이 자신의 성적 지향을 드러내지 못하고 정상적인가정을 꾸려야 했던 데에는 6, 70년대 미국의 사회적 분위기가 주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브루스의 삶에 있어서 현실과 문학의 모호한 경계는 이후 계속해서 언급된다. 브루스가 자신을 피츠제럴드에게 투사했을 것으로 앨리슨은 짐작하면서,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뭉개는 건 아버지의 주특기라고 서술하기도 한다. 서로에 대한 애정 표현이 적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대학 공연의 주연과 조연으로 처음 만났다는 사연을 듣고는 이런 생각도 한다. “아버지가 끌린 건 엄마가 맡은 배역이었을까, 연기였을까, 어머니 자체였을까.” 서술자가 직접 그렇게 표현한 것은 아니지만, 앨리슨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꾸만 문학 속 인물로 비유되는 모습을 보노라면 독자는 이런 상상을 하게 된다. 저들은 한평생 그저 연기를 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마치 내 상상 속에서 부유한 부모님이 가난한 가정 환경을 연기해야 했던 것처럼. 상상은, 허구를 다루는 예술은, 혹은 비극적 현실과 결핍은, 우리로 하여금 자꾸만 다른 정체성을 연기하도록 만든다.

브루스 벡델이 지닌 다층적 이중성은 앨리슨 벡델에게 그대로 흘러간다. 현재의 앨리슨에게 가장 중요한 정체성인 동성애자로서의 정체성이 실은 아버지로 인해 형성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추동한다. 단순히 아버지가 동성애적 코드가 담긴 예술이나 취향을 공유했기 때문이 아니라, “넬리(여자 같은 남자)” 같은 아버지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자신이 부치(남자 같은 여자)”가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반동 형성이 한 방향으로만 일어나진 않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앨리슨은 부녀 관계에 대해 서로가 서로의 도치였다며 육체적인 부성에서 벗어나 자신이 브루스에게 정신적인 부성”, 즉 아버지의 아버지가 된 것 같은 감정을 느꼈다고 말한다. 계속해서 허물어지는 경계는 성 정체성을 지나 성 역할의 전복으로까지 이어진다.

어쩌면 이 지점이 브루스 벡델과 앨리슨 벡델의 삶이 달라지는 지점일지도 모르겠다. 브루스는 자신의 성적 지향을 드러낼 수 없다는 결핍을 감추기 위해 허구의 문학을 끌어들이고 허위의 가족을 덮어씌워 거짓된 역할극으로 평생을 살아갔다. 반면 앨리슨은 허구의 문학을 통해 두려웠던 대상을 향해 똑바로 나아가는 법을 배운다.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을 감추기 위해서가 아닌, 확실히 증명하기 위해서 관련 서적들을 탐독한다. 아버지처럼 은밀하게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닌, 동성애 커뮤니티를 찾아 나서고 커밍아웃을 시도한다.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을 여전히 가설로 여기면서도, 그는 부모님에게 그 사실을 솔직히 털어놓는다.

하지만 이러한 나의 판단 역시 가설로 두어야 할 것이다. 결말부에서 앨리슨 벡델은 자신이 브루스 벡델에 대해 직접 보고 듣고 겪었음에도 아버지에 관한 판단을 유보한다. “아버지의 성적 진실이 무엇이었는지, 내가 함부로 아는 척해서는 안 된다라며, 아버지가 자신에게 보내온 편지에서 벽장 안에서 머뭇하는아버지의 감정을 느낀다. 펀 홈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은 브루스 벡델이 거짓되고 나쁜 아버지였다는 사실이 아니다. 앨리슨 벡델이 불우한 가정 환경 속에서도 용기를 가지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냈다는 결론도 아니다. 문학이나 예술과 달리 현실은 주인공과 조연, 선인과 악인의 이분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펀 홈입장이 묘하게 뒤바뀌고 더러는 얽히고설킨 우리의 이야기 안에서 아버지는 내가 뛰어들 때 날 잡아 주려고 거기에 있었다라는 문장으로 끝맺는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와도 같은 엘리슨과 브루스의 긴 여정에서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브루스 벡델이 있었기에 앨리슨이 현재의 앨리슨 벡델로 있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마지막 장의 차 안에서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보면, 딸의 정체성을 짐작하고 있던 브루스가 콜레트의 책이나 연극들, 영문학 등을 통해 앨리슨의 결핍을 채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결핍만이 결핍을 채울 수 있다. 허위의 예술이 우리의 결핍을 채우는 것처럼. 아버지의 죽음이 아버지를 선명히 떠올릴 수 있게 해주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