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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억압에 대항하는 만화적 이미지의 용기, <빗창>

빗창 (김홍모, 창비) 리뷰

2025-06-09 박동성

역사적 억압에 대항하는 만화적 이미지의 용기

『빗창, 김홍모

지금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가 이 땅의 주인 됨을 선언1)할 수 있는가? 2024123, 이 질문이 대한민국 전역을 뒤덮었다. 비록 12·3 계엄은 선언된 지 3시간 정도 만에 해제되었으나, 계엄령이 발동된 당시에 그 계엄령이 언제 해제될지, 심지어 해제될지조차 미지수였던 불안한 겨울밤에 국회로 모여 민주적 헌정 질서의 파괴를 저지한 시민과 국회의원들의 용기는 매우 고귀한 것이라고 평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 겨울밤이 끝난 지 수 개월이 지난 현재에도, 또 어쩌면 미래에도 지금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가 이 땅의 주인 됨을 선언할 수 있는가?’라는 이 질문은 거듭 메아리치면서 뭇 시민들의 심중을 동요시키고 있(을지도 모른).

이 질문은 왜 이토록 강하게 메아리치는 것일까? 계엄 선포의 폐해를 여러 번 겪었던 한국 근현대사의 암산(巖山)이 이 피맺힌 메아리를 증폭시키기 때문 아니겠는가. 그렇게 핏물 든 역사적 사례로 제주 4·3 항쟁2)을 거론할 수 있다. 미국의 암묵적 비호 아래 남한의 단선 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세력과 그 세력과는 무관한 도민들이 참살당한 제주 4·3 학살은 한국 문학과 영화 내에서 무게감 있게 다루어져 왔다. 제주 4·3이 한국사에 남긴 상처가 워낙에 깊고 그 깊이에 따른 충격적 여파도 워낙에 크다 보니, 그 검붉은 그림자에 가려져서 제주해녀항일운동은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한 감이 짙었다.

이상에서 약술한 다양한 맥락들을 고려할 때, 제주 4·3과 제주해녀항일운동이 김홍모의 빗창을 통해 만화의 영역에서 조명된 의미를 살펴보는 작업은 충분히 수행될 만한 가치를 획득할 수 있다. 문학과 영화에서 주로 형상화된 제주도의 모진 역사가 만화를 만나서 어떻게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지 숙고하는 작업은 그 의미가 지금 여기의 역사적 질곡에 어떠한 영향력을 가할 수 있는지 헤아리는 작업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이 작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제주 해녀들이 처했던 역사적·사회적·문화적 상황이 빗창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빗창이 만화로서 문학과 영화의 화술과는 달리 어떻게 제주도의 고통스러운 과거사를 보여주는지, 빗창의 만화적 화술이 지닌 변별점이 현재 한국 사회의 혼란상과 어떠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를 차례대로 짚으면서도 그 지점들을 유기적으로 엮는 방법을 취하고자 한다. 이 방법은 빗창의 의의와 한계를 지적하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이다.


빗창은 제주해녀항일운동과 제주 4·3 항쟁에 관련된 제주도 해녀들의 활약상과 수난상을 함께 보여주는 만화다. 그녀들의 항일 투쟁은 그녀들이 겪은 부조리한 손해로부터 발원한 바가 크다. 그 손해는 삼중고에 의한 속박의 양상을 띤다. 그 세 겹의 고통은 일정3)미군정4)이 한반도의 정치를 장악하였던 역사적 상황, 일본의 해조상들과 제주의 객주들이 해녀 조합을 교묘하게 지배하여 제주 해녀들의 해산물 판매를 통제하였던 사회적 구조, 여성이 교육의 기회를 얻기 힘들도록 조장하였던 성차별적 문화가 긴밀하게 짜인 망 속에서 직조된 것이다. 빗창은 이 복잡한 맥락들을 해설 성격의 자막, 제주 해녀 및 도민들과 그()들에 대한 억압 세력 사이의 갈등, 작중 인물의 대사로 촘촘하게 드러낸다. 이런 구성은 제주도민들이 어떠한 사회사적 흐름 속에서 공분을 느끼고 피해를 보았는지에 관해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돕는 장점을 발휘한다.

동시에 만화의 다양한 구성 요소들에 할당되는 각각의 비중이 분산된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은 거대한 폭력에 휩쓸리게 된 그()들의 고통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가령, ‘련화가 해녀로서 바닷물 속으로 잠수하여 그 속을 능숙하게 헤엄치는 장면과 그녀가 제주해녀항일운동에 가담하여 체포된 후에 당하는 물고문 장면은 서로 연관되면서도 극명하게 대비되는 양면성을 보여준다. 전자의 물이 선하고 부드럽다면, 후자의 물은 악하고 난폭하다. 사악한 물고문이 련화에게 가하는 모진 고통은 그녀가 물속 깊이 잠기는 무거운 이미지와 정말 죽을 것 같았다.”5)라는 그녀의 명료한 대사를 통해 표현된다. 이런 표현 방식은 그 간명함으로 인해 련화가 느끼는 고통의 강도를 너무 과하지 않게 독자들에게 전달한다는 점에서 적절하다. 그 고통의 정도가 물의 이중성이 더욱 살아나는 이미지와 더욱 많은 분량의 컷을 통해 조금 더 심화하는 방향으로 표현되는 것도 괜찮았겠다는 생각은 든다.

련화가 폐쇄된 고문실에서 사악한 물 아래로 짓눌려졌던 반면, ‘미량은 제주해녀항일운동의 야외 시위 현장에서 교활한 착취 세력을 그 위에서 짓누른다. 미량은 제주 해녀 억압 세력의 원흉인 다구치 도사가 탄 차의 앞 유리창에 빗창을 투척한 후에 그 차 위로 올라가 자신을 총으로 쏠 것이라면 쏘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이 힘 있는 장면은 페이지 전체를 가득 채운 크기에 힘입어 그 결연함이 극대화되었다. 이처럼 강력한 이미지를 박아 세우는 용기가 빗창이 지닌 큰 강점이라 평가할 수 있다.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의 상하 관계를 상징적으로 역전시킨 듯한 이 장면도 물론 다음과 같은 비판을 피하기는 힘들다. 총으로 안전과 목숨이 위협을 받는 위험한 상황 속에서 과연 정말로 저런 과감한 행동을 취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할 것인가? 인간 심리의 보편성을 따지는 차원에서 이런 의문이 충분히 던져질 수 있다. 이 의문점을 완벽히 피하는 것이 힘든 것도 사실이다.


그런 현실성이 다소 부족해지는 한계가 있음에도 굵직한 장점은 남는다. 차 위에 올라선 미량의 포즈가 내뿜는 단호한 카리스마는 만화만이 발할 수 있는 어떤 변별적 힘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빗창이전의 문학과 영화는 제주 4·3 항쟁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제주 4·3 문학을 논하는 자리에서 현기영과 현길언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제주 4·3 항쟁을 직접 경험했던 이들은 그 당시 정황을 생생하게 재현하면서도 뭇 제주도민들의 심신에 각인되어 지워지지 않는 제주 4·3의 깊은 상처를 세밀하게 묘사하는 데에 일정한 소설적 성취를 거두었다. 영화 쪽은 어떨까? 오멸 감독의 극 영화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 2(2013)는 그 자체로 원통하게 목숨을 잃은 제주 4·3 학살의 희생자들에게 바치는 위령제라 일컬을 만하다. 김경만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돌들이 말할 때까지(2024)는 제주 4·3 학살을 직접 경험했던 생존자들의 끔찍한 증언이 구술되는 쇼트와 제주도의 다양한 자연 풍광들이 담긴 쇼트를 교차시키면서 결합함으로써 제주도 곳곳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한 서린 통곡을 절묘하게 들려주는 듯하다. 이렇게 문학이 자세히 말하려 하고 영화가 흘러가는 운동적 이미지들을 통해 기억하려고 한다면, 만화는 멈춰있는 순간적 이미지를 통해 보여주려고 한다. 만화적 이미지의 이런 힘이 빗창속에서 뚜렷하게 발휘되고 있다. 그 적실한 사례를 바로 미량의 묵중한 포즈에서 볼 수 있다. 김홍모는 만화의 이 고유한 화술을 정공으로 구사함으로써 한 해녀의 용기를 힘 있게 보여준다.

미량의 이 용기도 물론 훌륭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가슴에 더 오래도록 사무치는 것은 련화가 만화 후반부에서 보여주는 용기이다. 남한의 단선 정부를 수립하는 일에 반대하는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제주도로 투입된 국군과 서북청년회는 련화에게 한 가지 잔인한 제안을 건넨다. 바로 그녀가 옷 다 벗고 저기 바위까지 뛰어갔다 오면 마을 사람들은 살려주6)겠다는 제안이 그것이다. 련화는 자기 딸과 다른 이웃들을 살리기 위해 그 잔혹한 제안을 수락한다. 그리고 그녀는 완전한 알몸이 된다. 비록 이 장면도 앞서 언급했던 현실적 가능성의 문제를 빗겨나가기 어려우나, 수위 조절 문제 때문에 보통 생략되기 마련인 음모까지 드러난 이 장면을 직면하는 앞에서 마음속으로 더욱 육박해 오는 것은 끝내 련화의 처절한 용기이다. 그 모든 것을 무릅쓴 한 여인의 나신(裸身)…….

빗창에서 제주 해녀들이 온몸으로 발산하는 이 절대적 용기는 애초부터 그녀들을 속박한 삼중고를 향한 항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이 점을 고려해 볼 때, 그런 용기를 체화한 만화적 이미지는 그 자체로 현실 사회에 내재하는 온갖 억압적 구조들에 어떤 균열을 일으키는 힘을 내장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도 다층적 통제 장치가 현실적 필요에 따라 이 사회에 엄존하고 있다. 게다가 이러한 통치는 자칫 획일적 독단으로 치우칠 위험성을 항상 내포하고 있지 않은가. 이처럼 언제든지 침습할 수 있는 부당한 위협에 섣불리 순응하거나 타협하지 않는 적극적 항거의 주인이 될 가능성을 절대문으로서의 이미지에 첨부하는 만화의 화법. 김홍모의 빗창은 이 화법을 통해 해방된 세상, 새로운 세상을 꿈꾸7)는 만화다.



1) 김홍모, 빗창, 창비, 2020, 191. 이 글에서 단행본을 인용할 때는 겹낫표(『 』), 80분 이상의 장편 영화를 인용할 때는 겹화살괄호(《 》)를 사용하였다.

2)  194843,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어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 세력 및 그 남한 단선 반대 세력과 무관한 제주도 도민들이 무분별하게 학살된 이 역사적 참극을 어떻게 명명할 것인지에 관한 많은 견해들이 경합하고 있다. 한 역사적 사건에 어떤 명칭을 부여하는 것이 온당한지의 문제는 중요하다. 그러나 이 문제는 김홍모 만화 빗창 의미·가치·한계에 집중하는 이 글의 관심 범위로부터 상당히 벗어난 문제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양정심의 견해에 따라 제주 4·3 항쟁이라는 명칭을 주로 사용하되, 글의 맥락과 표현에 따라 제주 4·3 학살’, ‘제주 4·3’ 등의 명칭도 함께 사용하였음을 밝힌다. (양정심, 제주 4·3 항쟁저항과 아픔의 역사, 선인, 2008, 18~21쪽 참고.)

3) 김홍모, 앞의 책, 19.

4) 위의 책, 93.

5) 위의 책, 68.

6) 위의 책, 228.

7) 위의 책,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