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시간 속에서 발견하는 삶의 의미, <은하의 죽지 않는 아이들에게>
『은하의 죽지 않는 아이들에게』, 시카와 유키

“우리 집도 강아지 키우면 안 돼요?” 초등학생 자녀를 둔 부모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말이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친구 집에서 귀여운 강아지를 보고 돌아와 우리도 강아지를 키우자고 요청하는 자녀에게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고 항상 거절한다. “엄마, 아빠는 너희를 키우는 것도 벅찬데 강아지를 어떻게 키우겠니. 지난번에 사슴벌레 키운다고 했을 때 기억 안 나? 너희들이 잘 키운다고 해서 사 왔는데 너희들이 돌보지 않아서 결국 사슴벌레 먹이 주고 청소하는 거는 아빠가 다 했잖아.” 자녀들의 간절한 요청을 거절하는 이유는 반려동물을 키우기에 현실적으로 번거로운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정을 나눈 소중한 존재를 떠나보냈을 때 상실감을 자녀들이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강아지를 키우는 경우 반려동물과 울고 웃으며 삶의 즐거운 시간을 함께 나눈다. 강아지의 수명은 대체로 15년 내외라고 한다. 인간은 강아지에 비해 오래 살기 때문에 강아지가 수명을 다해 죽으면 강아지를 떠나보내며 상실의 감정을 경험한다. 물론 인간 역시 무한한 존재는 아니다.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동경하는 이유는 수명의 유한함에 있다. 불로초를 찾아 헤맸던 진시황이나 <드래곤볼>의 단골 소원인 영원한 생명을 구하는 것은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추구하는 불가능한 소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인간이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라면 우리는 정말 행복할 수 있을까?
시카와 유키의 만화 <은하의 죽지 않는 아이들에게>는 이러한 근본적 질문에서 출발한다. <은하의 죽지 않는 아이들에게>는 인류가 멸망한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배경으로 죽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신비한 존재인 파이와 마키, 그리고 마리를 통해 삶과 죽음, 존재의 의미를 드러낸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전형적인 클리셰에도 불구하고 고요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살아간다. 죽음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파이와 마키의 삶에는 위기나 절망 역시 무의미하다. 어제와 오늘, 내일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며 구분이 무의미하다. 시간의 흐름이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 세계에서 이들의 일상은 무한히 반복된다. 작가는 이러한 정체성을 단조로운 풍경과 반복되는 일상, 변화 없는 캐릭터들의 모습으로 표현해 독자로 하여금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파이와 마키는 어느 날 불시착한 우주선에서 나온 여자가 가까스로 아기(마리)를 낳고 죽는 것을 보고, 남매는 그 아기를 키우기로 결정한다. 어린이의 모습으로 성장이 멈춘 채 살아가는 불사의 남매와 달리 점점 성장하는 마리의 존재는 정체된 시공간에 균열을 일으키는 단초다. 작은 균열은 시간이 지나면서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마리의 성장은 파이와 마키가 이전에 겪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이다. 처음 보는 웃음, 처음 듣는 울음소리, 처음 겪는 성장의 과정. 이 모든 것이 불사의 존재들에게는 경이로운 발견이자 삶의 의미가 새롭게 발견되고 해석되는 시간의 연속이다.
사실 무한한 존재로서는 성장도 없고 죽음도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 파이가 죽어가는 여자에게 ‘죽는다는 건 어떤 기분이냐’고 다급히 묻는 것은, 이들이 죽음을 모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삶의 의미는 더욱 모호하다. 파이와 마키는 영원히 살 수 있지만, 동시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시간은 단순한 연속일 뿐, 성장이나 발전의 의미는 아니다. 반면 마리는 매일매일 새로운 모습을 보인다. 어제 할 수 없었던 것을 오늘은 할 수 있게 되고, 오늘 몰랐던 것을 내일은 알게 된다. 처음에는 파이와 마키가 아기였던 마리를 돌봤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마리는 파이와 마키보다 키도 커지고 성숙해진다. 독자는 책장을 넘기면서 이들의 변화를 체감한다.
이 작품에서는 존재론적 고독의 문제도 주목할 만하다. 파이와 마키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들과 진정한 관계를 맺기 어려운 상황이다. 둘만이 공유하는 영원한 시간은 다른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경험이다. 고독은 단순한 외로움을 넘어, 존재론적 고독, 다시 말해 소외감으로 이어진다. 마리의 등장으로 관계의 영역은 확장되면서, 영원히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은 관계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라기보다 유한함 때문에 더욱 소중해질 수 있다는 것도 깨닫는다. 물론 유한함과 무한함이라는 전제는 여전히 존재론적 고독이라는 과제를 남긴다.
<장송의 프리렌>과 이를 비슷한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두 작품 모두 유한한 존재를 관찰하고 무한한 존재의 감정을 그린다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접근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장송의 프리렌>의 프리렌이 이미 수십 년 전 함께했었던 용사 힘멜과 동료에 관한, 즉 이미 끝난 관계에 대한 회고와 그리움에 초점을 맞춘다면, <은하의 죽지 않는 아이들에게>는 현재 진행형인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변화와 성장, 관계의 확장성에 주목한다.
처음 던졌던 질문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우리는 정말 행복할 수 있을까? 쉽게 답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니다. 이 작품 역시 단순하게 답을 제시하지 않는 대신 무한함과 유한함, 성장과 정체 등의 대립 구조를 설정하여 독자 스스로 답을 찾아가도록 계속해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은하의 죽지 않는 아이들에게>는 단순한 그림체와는 달리 깊이 있는 서사로 인간 존재의 본질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죽지 않는 존재들이 유한한 생명을 동경하고, 결국 그들의 삶에 변화를 가져오는 과정은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설령 영원한 삶이 주어진다 해도, 변화와 성장이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삶이라 할 수 없다. 유한한 삶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서 누군가와 진정한 관계를 맺고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면 삶의 의미로 남는다는 사실이다.
이 글의 맨 앞에 나왔던 강아지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언젠가 떠나보내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관계를 아예 시작하지 않는다면, 관계가 주는 기쁨도 경험할 수 없다. 한편, 유한함이야말로 삶을 더욱 소중하게 만드는 조건일 수 있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의미를 갖고, 이별이 있기에 만남은 더욱 소중해진다. 영원한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만화 속 주인공을 통해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과 곁에 있는 사람들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