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향한 발걸음
『눈에 밟힌 발걸음』, 사이사
약하고 어린 존재는 너무나도 쉽게 바스러진다. 재앙의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살아남는 것이 전부인 세계에서는 약한 존재가 배려 받기 어렵다. 포용하기보다 외면이 쉽기에. ‘눈이 팍팍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한다’와 같은 낭만적인 상황은 없다. 파란 눈이 내리는 이곳에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존재들이 있다. <눈에 밟힌 발걸음>은 모든 것을 얼리는 파란 눈 ‘파랑’이 떨어지며 재난 상황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눈과 눈
여기, 의족을 한 고등학교 남학생 선우가 있다. 초등학생이지만 입학해 보지 못한 여덟 살 소녀 이서도 있다. 그들은 모두 부모를 찾고 있다. 보호자 없이, 그들은 재난 속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다. 선우는 이서가 보기에 모든 것을 잘하는 멋진 오빠다. 하지만 선우는 모든 것이 무섭다. 그저 살기에 급급할 뿐이다. 선우는 직관적으로 완벽히 약자다. 고아이면서 장애가 있는, 도움이 안 되는 불운이다. 소외될 수밖에 없는 조건이 가득한 그를 받아주는 곳은 없다. 약자를 사랑하라는 신의 섭리는 잊힌 지 오래다. 누구보다 성경의 말씀을 따라야 하는 교회는 선우에게 보호를 당연히 요구하면 안 된다고 일갈한다. 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 곁에, 신이 우연이라고 믿는 우찬이 있다. 선우는 한 번 눈에 담은 이서를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우찬은 그런 선우를 눈에 담는다. 눈과 눈이 마주했기에 지나치지 않고 어린 존재를 보호하기로 마음먹는다. 선우는 이서를, 우찬은 선우를.
떼야만 하는 발걸음
‘눈에 밟힌다’는, 차마 눈을 떼지 못하고 지나치지 못하는 모습을 의미한다. 엄밀히 말하면 선우는 누구도 눈에 담아서는 안 되는 처지다. 본인을 건사하기도 어렵다. 선우는 우연히 만난 아이인 이서를 못 본 척하지 못한다. 아이를 위해 해열제를 구하러 가는 길에 부모님의 죽음을 마주하지만, 선우는 멈추지 않는다. 살아남을 아이를 위해 그저 움직일 뿐이다. 포기하지 못하고 얼어붙지 않고 이서에게 돌아가지만 작고 여린 존재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선우는 그제야 이서를 집으로 데려다주기로 마음먹는다. 아이를 집으로 보내는 것만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를 세상의 유일한 목적이 된 셈이다. 불편한 다리로 무거운 아이의 시신을 업고 가는 불편함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린아이를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윤리적으로 마땅하다고 믿기에, 선우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누구도 시키지 않은 발걸음을 뗀다.
파란색 계명
쌓이지 않는 눈은 모두에게 다른 이름으로 호명된다. 누군가에게는 재앙, 재난, 혹은 파랑, 파란. 미지의 눈은 모든 것을 얼린다. 눈을 맞는 것만으로도 생명을 빼앗기기에, 재앙은 신이 없는 세상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 우찬은 자신이 신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고 말한다.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신의 안배는 공평하지도 않고, 자애롭지도 않다. 모두를 죽게 만드는 재난의 상황이 지속되는 것, 특히나 어린 생명까지 앗아가는 상황에서 신을 찾기란 어렵다. 오히려 신을 믿지 않는 선우야 말로 신의 계명을 지켜나간다. 자신을 위협하는 상황이 펼쳐질 것을 알면서도 누구도 죽게 둘 수 없다는 마음 하나로 위험한 상황을 자처한다. 신이 없는 세계에서 선우는 초인처럼 뚜벅뚜벅 불편한 걸음을 이어 나갈 뿐이다. 파란 눈이 내리는 세상은 신도, 법도, 도덕도, 상식도 사라졌지만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남아있다.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파란색 재난에서의 파란(波瀾)이다.
다정도 병인가 하여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으려는 선우는, 오히려 모두를 구하려 애쓴다. 살아야 할 이유는 모르지만 죽지 않은 사람은 죽지 않았다는 이유로 죽음에 이르지 않도록 노력한다. 신의 부재는 선우는 다정하게 채워나간다. 안위를 묻고 이유 없이 상대를 돕는 아주 기본적인 행위에서. 자신이 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불안은 선우를 좀먹는다. 그것이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이유였다. 우연히 얻은 삶의 목표를 이룬 후 선우는 끝은 선택한다.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했던 경험이 없어서다. 일기장이 끝없이 질문을 지고 사는 것은 결국 삶의 이유를 찾기 위해서이며, 다정함에서 비롯된다. 선우는 죽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그를 붙들 수 있는 존재들을 다정히 지켜냈기에. 우찬은 마지막에 이르러 선우를 구해낸다. 그리고 선우를 구한 사람들도 함께다. 그제야 알게 된다. 함께했기에 지킬 수 있었고, 성장할 수 있었다고.
미지의 삶
사이사 작가는 전작 <도롱이>와 <눈에 밟힌 발걸음>까지 삶의 이유와 방향성에 대한 고민을 작품에 녹여낸다. 왜 고통의 세상에서 누군가는 고난을 지고 걸어가느냐는 일련의 물음을 던진다. 왜 고통스럽지만 삶을 지속해야 하는지 질문한다. 성장하기 위해 이다지도 잔혹한 성장통이 있을까. 효율을 추구하는 세계에서 비인간적인 방식을 요구받는데도 왜 여전히 우직하게 윤리적으로 살아야만 하는지 묻는다. 차마 지나치지 못하고 굳이 되돌아서는 발걸음을 그린다. 대답은 다시 이서의 일기로 돌아가야만 한다. 이서는 재앙의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하지만, 선우와 같이 있어서 좋다고 말한다. ‘같이’라는 가치를 이서는 이미 선우를 통해 인지한 것이다. 눈에 밟히는 모든 것들을 다정하게 되돌아보고 손을 내미는 것. 고통스럽되 ‘같이’의 가치를 묵묵히 지고 가는 것. 그것만이 정답과 가장 근접한 답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