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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웠지? 미안해. 아무것도 못 해줬구나, <블랙홀과 3만원>

블랙홀과 3만원(글 김규삼, 그림 혜원, 네이버 웹툰) 리뷰

2025-06-21 김득원

괴로웠지? 미안해. 아무것도 못 해줬구나.

『블랙홀과 3만원』 글 김규삼, 그림 혜원

하늘에 검은 원이 떠올랐다. 밤낮으로 사라지지 않던 그때, 미국 백악관은 한 달 뒤 블랙홀로 지구가 멸망한다고 발표한다. <블랙홀과 3만원>의 시작이다. 인생은 당장 한 치 앞도 알 수 없지만, 마지막을 명확하게 알게 된다면 할 일은 또렷해진다. 더 이상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며칠이야 살던 대로 산다지만, 그 마음이 이전과 같을 리 없다. 누구나 이름을 대면 아는 노스트라 보험 회사의 지급 방어 이사 권웅은 모든 직원이 떠난 회사를 기어코 출근하던 중 퇴근 후 아내마저 떠난 사실을 알게 된다.

다들 인생을 제대로 살지 않아서 그렇다. 그러니 평소와는 달라야 한다고 이 난리를 치는 거다.”

제대로 산다는 게 무엇인지 누가 단언할 수 있겠느냐만, 권웅은 전력을 다해 살아왔다. 권웅의 최선은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고 회사의 자금을 사수하는 것이었다. 언제나 이성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믿는 권웅이 회사에서 홀로 일하고 있을 때, 수원에서 보험왕을 꿈꾸던 채대금블랙홀 안심 보장 보험(이하 블랙홀 보험)’이란 상품을 들고 나타난다.

©김규삼, 혜원, <블랙홀과 3만원>, 네이버웹툰

말도 안 되는 설계이므로 권웅은 철저히 이를 무시하고, 본인이 그동안 진행했던 업무의 정당성을 확인하기 위해 보험금 지급을 방어했던 고객들을 찾아가기로 한다. 채대금은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만나는 사람마다 블랙홀 보험을 권한다. 이후 여러 사람을 만나며 보험을 들던 심정과 희망의 가치 등을 고민하고 본인을 돌아본다. 그러던 중 사라진 아내가 자신을 찾고 있음을 전해 들으면서, 권웅과 채대금의 동행은 아내를 찾기 위한 여정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멀리서 봐도 비극, 가까이서 봐도 비극인데

관측 즉시 자각할 새도 없이 빨려 들어간다는 블랙홀의 위험성, 더욱이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게 확인된 상황이라면 이토록 평화로울 수 없다는 현실적인 시선 같은 건 만화적 허용과 블랙코미디 장르의 특수성으로 용인된다. 흔히 멸망을 다루는 작품에서 심각함과 진중함, 즉 지독한 현실감을 강조했다면, <블랙홀과 3만원>은 진실보다 진심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블랙홀은 끝을 정해줄 뿐 아니라, 스스로 진심을 돌아보게 하는 제약이자 장치이기도 하다.

여기엔 또 한 가지 가설이 덧붙는데, 사건의 지평선이라고 해서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하는 경계면의 영역이 존재한다. 블랙홀에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이 경계면에선 시간선이 과거와 현재, 미래를 오가면서 무수히 많은 나를 관측하고 경험할 수 있다는 개념이다. 모든 인물은 최후에 이르는 과정에도 의미를 부여하지만, 최후에 이르렀을 때의 행위까지 염두에 두며 움직인다. 권웅과 채대금을 제외한 인물들 사이에서도 마지막에는 모든 걸 내려놓고 즐기자며 지구 멸망 콘서트가 기획된다. 순간을 반복하며 어린 시절의 놀이처럼 마냥 즐기고 싶다는 의지의 반영일 것이다.

©김규삼혜원, <블랙홀과 3만원>, 네이버웹툰

<블랙홀과 3만원>은 비극을 웃음으로 포장한다. 가령 권웅이 아내의 메시지를 받게 되는 상황이 그렇다. 아내가 남편인 권웅에게 자신의 거처를 알려주었을 때, 찾아와 달라는 쪽지를 받아들였을 때 이들의 반응에 상투성과 격식이 없다. 메시지를 전해준 이들은 분명 권웅의 보험 지급 방어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는데, 아내를 찾으라고 말미를 준다. 각자의 진심이 제일 중요한 가치가 된 것이다. 지금껏 추구했던 가치, 자산이며 경력, 신념 따위가 진심 하나에 압도된다. 진심이 현실을 밟고 올라서는 양상은 대체로 사랑을 다루는 이야기에서 중심 주제로 다루어진다. <블랙홀과 3만원>은 진심이 진실로 통하면서 마음을 주고받는 사랑의 세상을 그린 로맨스 드라마라고 볼 수 있겠다. 멀리서 보면 한숨 나올 비극이지만, 이들은 희극의 정서로 그 비극을 삼킨 것이다.


진심이 진실로 통하기 위한 조건

작품 외 현실에서도 진심을 담는다면 진실이 될 수 있을까. 글쎄, 이건 별개다. 결국 본인 인생의 의미와 가치는 각자 정하는 것이다. 비웃을 것도 없고, 경탄할 것도 없다. 3만원을 내고 블랙홀 보험에 드는 게 우습다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바쳤던 무수한 현재에 대한 모독이 아닐까 싶다. 사기 아니냐 싶지만 더 이상 의미가 없는 재화만으로 희망을 산다는 게 용인되는 진실인 세상에서 무엇이 문제인가 싶다.

블랙홀이 현실적 제약이라면 3만원은 비현실적 희망이다. 작가의 후기에 따르면 서머싯 몸의 소설 <달과 6펜스>에서 모티프를 얻은 제목이라고 한다. 가지고 싶은 것과 가지고 있는 것 사이의 고뇌, 가지게 된 것과 가져야 하는 것 사이의 방황이라는 거다. 고뇌와 방황이 만들어낸 여백은 독자들이 각자의 의미와 가치를 투영할 수 있도록 열려 있다.

혼란한 시국, 이 나라의 인구가 줄어들고 있으며 암울하다고 말하는 온갖 비관론 속, 딱히 유의미한 역할을 해내지 못하는 나는 이런 세상을 기대하는 마음도 분명 있다. 그리고 만약 이런 세상이라면 3만원에 파는 블랙홀 보험을 무기명으로 사 와서 마지막을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우린 나름의 준비가 됐잖아 늘 미안하고 고마웠어와 같은 말을 할 것 같다. <블랙홀과 3만원>은 진심이 진실로 통하는 세상을 담았다. 종말을 상상하면서 하루를 견디는 이들과 처음엔 가볍게 시작하더라도, 끝날 즈음엔 묵직하게 진심과 진실을 돌아보고 싶은 이들에게 이 작품을 추천하고 싶다.


©김규삼혜원, <블랙홀과 3만원>, 네이버웹툰

 

<블랙홀과 3만원>은 종말이 예정되어 있다는 가정 하, 남은 시간을 보내는 형태를 그린 작품이다. 종말이란 곧 개념의 실종이자 존재의 증발을 의미한다. 나 또한 종종 인생의 마지막을 상상하는데, 아래와 같은 일기를 적었던 적이 있다. 애정 총량의 대부분을 만화에 쏟아 붓던 때였다.

 

제 인생의 마지막에 붙들고 싶어지는 작품, 저는 그 작품을 찾고 싶어서 창작을 해요. 저를 위한 행위죠. 부분을 확대한 작품이어도, 그러니까 아무리 소박한 주제를 담고 있는 작품이어도 말풍선의 대사 하나, 그림 한 칸만 봐도 그때 했던 저의 고민들이 겹쳐 보여요. 메모라 해도 할 말 없을 짧은 글, 이게 뭐야 싶은 그림 한 장도 마찬가지. 당시의 지루함이 다시 몸을 통과해요. 과정은 지루하잖아요. 근데 그 뒤로 찾아오는 마감의 뿌듯함이 있죠, 한참 전 일이더라도. 나의 체험만큼 부피가 큰 예술이 어디 있겠어요. 앞뒤 안 보이던 사랑 속에서도 저를 잊거나 잃을 수 없었는걸요. 어쩌면 진짜 사랑을 해본 적이 없어서 그랬던 걸까요. 그건 좀 슬픈데. 결국 인생 자체가 예술이어야 해요. 작품은 일종의 잔여물 같은 거죠. 저는 제가 만든 잔여물을 끌어안고 눈 감고 싶어요. 그 사이에서 오랫동안 자다가 제일 먼저 사라지고 싶어요일기든 뭐든 다 그런 거 아니에요? 나의 족적을 직접 기록하는 행위 자체가 그래요. 다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드디어 고통 없는 곳으로 가게 됐어. 괴로웠지? 미안해. 아무것도 못 해줬구나."
<2020.03.18.
일기 중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