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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그리고 상처받은 여성들

풀(김금숙, 창비) 리뷰

2025-12-08 김민재

전쟁, 그리고 상처받은 여성들

『풀』, 김금숙 

전쟁의 참상은 실로 끔찍하게 다가온다. 당장에 간간이 들려오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만 해도 수많은 젊은 사람들이 전쟁터로 끌려가 참혹하게 죽어간다. 민간인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계속되는 폭격과 진군을 피해 집을 떠나 대피한다. 그러나 대피한 곳에서도 난민의 대우는 박하기 그지없다. 전쟁 피해자들은 수십 년이 지나도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멀게만 느껴지는 전쟁 피해는 사실 우리의 삶 근처에도 녹아있다. 분단과 이산가족, 그리고 과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그 산증인이다.

만화 매체를 빌려 역사적 비극을 표현하려 한 시도는 이전에도 있었다. 아트 슈피겔만의 <>에서는 작가 아버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유대인이 겪은 고통과 홀로코스트, 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의 생활상을 다루었다. 조 사코의 <팔레스타인>에서는 제1차 인티파다 이후 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인들에 의해 벌어지는 고문, 테러 등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일명 르포 만화라고 불리는 이 형식은 현실을 반영하여 작가가 느낀 점을 독자에게 만화로 표현하고 고발한다. 김금숙 작가의 <> 또한 이런 르포 만화의 성격을 띠고 있다. 김금숙 작가는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 중 한 분이신 이옥선 할머니와 수차례 인터뷰하며 기록한 내용을 통해 과거 일본이 행했던 전쟁 범죄를 사회에 고발한다.

 

 

그래픽 노블 <>은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 이옥선 할머니의 생애를 기록한 르포르타주 작품으로, 전쟁과 폭력이 개인의 삶에 남긴 상처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작품은 이옥선 할머니가 열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강제로 동원되어 위안소로 끌려간 이야기를 담아낸다. 그녀는 그곳에서 끔찍한 성폭력과 학대를 견뎌야 했고, 결국 성병에 걸렸을 때는 수은의 증기를 쐬게 하여 임신을 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해방 직후에도 고향으로 돌아갈 길 없이 하루하루 구걸하며 살아갔다. 타지에서 결혼해 50년을 살았고, 2000년에 한국으로 돌아와 따스한 가족의 품으로 가고 싶었지만 너무나 긴 시간은 그녀를 가족이 아니라 타인으로 만들었다. 작품은 일본군의 성노예제가 단순한 과거의 한 사건에서 멈추지 않고, 피해자의 전 생애에 걸쳐 쓰라린 상처를 남겼음을 보여준다.

 

<>예술이 고통을 어떻게 재연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하나의 답을 제시한다. 작가는 위안소 장면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성폭력을 문 앞에 놓인 일본군의 군화로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폭력에 노출된 여성들은 거친 붓 표현으로 묘사되었다. 흑백의 화면과 침묵, 작품 곳곳의 여백은 감정을 배제하고, 독자가 당시 사건 속으로 이입하도록 만든다. 텍스트 없이 이미지만으로 전개하여, 독자의 상황 해석을 끌어내고, 공감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김금숙 작가의 과장되지 않은 인물 묘사는 독자로 하여금 이야기에 더욱 몰입하게 만들며, 사건 속으로 투영시킨다.

나아가 <>은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둘러싼 지속적인 역사 왜곡과 부정 속에서 르포만화가 보여주는 사회적 순기능을 재확인한다. 작품은 국가 간 외교 갈등이라는 거시적 차원을 넘어서, 사회구조적 폭력에 의해 소외된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가 사회적 담론의 자리로 나아가는지를 증명해 낸다. 단순한 기록을 넘어, 예술적 창작물임과 동시에 역사, 사회, 인권, 여성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다층적인 텍스트로서 기능한다.

<>은 과거의 사건을 기록함과 동시에, ‘우리는 이 목소리를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독자를 증언자로 만들어낸다. 작가가 제목을 <>로 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밟아도 다시 자라나는 풀처럼 상처 입고 서러웠던 과거를 겪었음에도 다시 한번 삶을 살아보고자 했던 위안부 할머니들의 모습을 담고자 한 것이 아닐까. 우리는 서러웠던 과거의 희생양으로 남겨진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로하고, 기억하고, <>처럼 상처를 입어도 다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이자, 우리가 이어가야 할 의무이다.

필진이미지

김민재

만화 평론가
<2022 대한민국 만화평론 공모전> 신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