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플레이리스트, 이랑에게
『음악의 사생활99: 2010년 이랑』, 글 이랑·그림 실키

바쁘단 핑계로 1년 넘게 책장에 꽂아 두기만 했던 <음악의 사생활 99 - 이랑 2010>을 한 해가 끝나기 전에야 가까스로 읽었다. 삐약삐약북스 출판사의 새 프로젝트인 <음악의 사생활>은 만화를 통해 한 음악인의 시작을 그린다. 십수 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이라는, 객관적으로도 짧지 않은 음악인으로서의 삶이 과연 어떻게 시작된 것인지 회고 조로 그려낸다. 뭉뚱그리기보다 정확히 한 해를 콕 집어 그린다는 점에서 ‘역사’라는 말이 어울리고, 그런 단어를 떠올리게 함으로써 한 음악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독자의 자세를 고쳐 앉힌다. 만화 뒤편에 실린 인터뷰와 평론들을 함께 읽으니 한 사람과 그의 음악을 보다 가까이, 그러면서도 넓은 시야에서 읽을 수 있었다.
만화는 음악인과 만화가의 협업을 통해 그려졌고, 이랑은 흑백만화로 유명한 실키 작가와의 협업을 보여주었다. 실키 작가의 그림과 칸 엮는 솜씨로 만들어진 이랑의 2010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조화로운 모습이었다. 이를테면 실키 작가의 그림체로 그려진 이랑의 몸과 얼굴. 프랑스 아동 소설인 <꼬마 니콜라>를 연상시키는, 무심한 듯 귀여우면서도 생각이 많아 보이는 그림체가 이랑을 드러내기에 너무나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사람들이 마치 지문처럼 각자의 고유한 그림체로 존재하는 세상이 있다면, 실키 작가의 그림체는 이랑의 것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엉뚱한 상상을 할 만큼 잘 어울렸다. 이랑의 강박적일 정도로 꼼꼼한 기록 덕에 그의 지난 시간을 지척에 선 것처럼 엿볼 수 있던 것도 리스너로서 반갑게 다가왔다.
그러고 보면 내게 올해는 이랑의 해였다. 그 어느 때보다도 이랑의 노래를 많이 들었다는 단순한 이유에서다. 유독 맴도는 노래를 연달아 열댓 번씩 듣기도 하고, 몇십 곡의 노래를 반복 재생하며 한참을 걷던 날들이 하반기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렇게 된 건 올 여름 갔던 그의 콘서트가 너무나 좋았던 탓이지만, 생각해 보니 지난해 연말쯤부터 이미 그의 음악을 많이 들었다. 정확하게 확인하기 위해 유튜브 뮤직을 확인해 보았다. 올해 분기마다 가장 많이 들은 노래에 <환란의 세대>와 <잘 듣고 있어요>, <의식적으로 잠을 자야겠다>가 빠지지 않고 기록돼 있다. 가을엔 공연에서 유독 와닿았던 <평범한 사람>이 추가로 기록되어 있다. (기록엔 없지만) 그늘 아래가 서늘해 볕을 찾아다니던 즈음부터는 <곰곰곰 나가자, 문문문 열고>를 매일 같이 듣기도 했다.
책에는 실키 작가와 이랑의 2010년과 2024년 플레이리스트가 5곡씩 적혀 있다. 대부분은 내가 잘 모르는 음악이어서 와닿지 않았지만, 아는 노래들이었다면 이들의 2010년과 2024년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걸 알게 되었겠다고 생각했다. 취향이 누군가를 설명할 수 있다는 믿음은 자주 배신당하고 마는 미신과도 같지만, 그럼에도 어떤 시절에 하필 특정 노래를 많이 듣는다는 건 나름의 단서를 남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선율에, 목소리에, 가사에, 노래 사이사이 침묵과 호흡 속에, 부르는 이의 것만큼이나 빼곡하게 듣는 이의 사생활이 새겨질 수 있다고 믿는 편이다.
어쩌면 내게는 이랑의 노래가 그 믿음의 근거가 되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랑의 노래를 즐겨 듣기 시작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일인데, 전에는 이랑의 가사를 좀처럼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목소리나 창법도 취향이 아니었던 것 같다. 3년 전쯤부터 그의 노래가 제대로 들리기 시작했다. 3집 <늑대가 나타났다>의 가사 한 줄 한 줄이 참 와 닿았고, 전보다 부르짖는 듯한 창법이 마음 어딘가를 건드린 탓도 있었다.
그런 식으로 전혀 듣지 않다가 어느 순간 매료된 음악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이랑을 들을 때마다 나라는 사람의 어딘가가 완전히 변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그의 난해한 가사를 전부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된 것이 나는 신기하고 또 슬픈데, 어쩌면 내 인생이 전보다 난해하고 슬퍼졌기 때문인가 싶어서다. 인생이 난해하고 슬퍼진 대신 하염없이 듣고 싶은 노래 몇 곡을 얻는다면 그건 좋은 일일까. 이런 생각들을 하다 보면 아무튼 음악은, 한 사람의 시절과 그 시절의 사생활에 대해 무시할 수 없는 단서를 남기는 게 분명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랑의 2010년을 읽으며, 만약 누군가 내게 인생에서 아주 결정적인 단 하나의 해를 고르라 하면 뭐라고 대답할지 시키지도 않은 고민을 했다. 그러면 나는 죄송하지만, 도저히 못 고르겠다고 애원한 뒤, 그렇다면 한 손으로라도 꼽아보라는 허락을 받아낼 테고, 기회가 다섯 번으로 늘었으니 하나는 고민도 하지 않고 2024년을 고를 것 같다. 지난해 나는 <환란의 세대>를 아주 많이, 아주 많이 들었다.
<환란의 세대>를 아는 이라면 예상했을 수도 있겠는데, 내게 2024년은 많이 좋아했던 친구를 떠나보낸 해로 자리 잡는 중이다. 장례는 그전에도 자주 갔었다. (곱씹을수록 애석하지만) 횟수를 세는 일이 무색할 만큼 앞으로도 많이 갈 것이다. 그러나 그 친구와의 이별은 내게 너무 많은 층위의 처음을 겪게 했다. 이 경험이 앞으로 살며 겪을 무수한 이별의 아픔 중에서 어쩔 수 없이 유난한 최초가 될 수밖에 없겠다고 예감했다. “인천 공항에서도 나리타 공항에서도 사람 죽는 것처럼 울었”다던 <환란의 세대>의 구절구절이 조금도 은유가 아니게 될 줄 몰랐다는 의미 없는 감탄을 하며, 그 슬픈 예감을 수긍으로 치환해 나갔다.
어떤 강렬한 경험은 순식간에 아주 많은 것, 어쩌면 모든 것들을 바꿔 놓는다는 생각을 요즘도 이랑의 노래를 들으며 한다. 나는 이랑의 <환란의 세대>가 선명히 새겨진 2024년을 평생토록 잊지 못할 것이다. 이게 책의 마지막에 적혀 있던 “여러분의 시간에 환란의 세대가 어떻게 자리 잡았는지” 묻던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이 대답을 통해 이야기를 들려줘 고맙다고, 이랑의 이야기 덕에 지난가을도 올 한 해도 가까스로 잘 지나왔다고 전하고 싶었다. “잘 듣고 있어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