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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하게

사이다를 날리는 쿨 한 웹툰들

2024-10-24 신경진

쿨하게

1. 2인조. 은근한 사이다

  해리슨 포드 주연의 명작 도망자와 제목이 같은 신영우의 <도망자>는 영화와 달리 앞의 첫 글자가 섬 도()로 표시되어 있어, 도망자라 쓰고 섬의 망자로 읽어야 제목이 이해되는 칠성급 개그를 보유한 핵 사이다웹툰이다. 목표 달성 100%를 자랑하는 세계관 최강의 암살자 밤의 무소속 킬로틴 잭 길재익은 하태수를 죽이라는 의뢰를 받고 교도소 호송 차량에 잠입하고, 또 다른 세계관 최강자이자 경호 회사대표인 군 특수부대 전직 소령 강정오는 하태수를 지키라는 의뢰를 받고 호송 차량에 잠입한다. 죽이고 지켜야 하는 관계 속에 호송 차량은 전복돼 하태수, 길재익, 강정오는 모두 기억상실증에 걸리고 마는데. 그 후, 하태수는 보스를 자청, 스스로 패트릭이라 정하고, 강정오는 일호라는 이름을, 길재익에겐 이호라는 이름을 붙여주고는 밀항을 시도하다, 사이비 집단 신천랑이 지배하는 망자의 섬에 끌려가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대중문화를 양산하는 매체로 자리매김한 K-웹툰의 사이다 풍작품들은 복수환생등의 소재를 다뤄 소위 대중들의 손맛을 사로잡아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데, <도망자>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개그의 요소가 가미된 은근한 사이다방식으로 마치 신의 탑을 오르듯 작품을 밀고 나간다. 이러한 방식은 웹툰 <피에는 피>처럼 짧은 호흡으로 피의 복수를 완성해 가는 사이다식 전개와는 확연한 차이가 있으나, <참교육><재벌집 막내아들>이 제법 긴 호흡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독자들의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는 사이다식 전개를 부각하듯 도망자> 역시 독자들의 기대에 부응하듯 회를 거듭할수록 신영우 특유의 또한 같이 발휘되면서 사이다한 장면들과 유머가 시도 때도 없이 펼쳐진다.

  일례로 작가의 전작 <키드갱>을 보면 독자들은 양아치 집단에 불과한 피의 화요일의 두목 강대봉태산파의 두목 강거봉일 것이라 은은히 예측하는데, 그 예측은 작품 끝에 정확히 일치함으로써 형성된 공감대로 독자들에게 은근한 사이다를 선사한다. <도망자>를 보는 독자들도 2인조(일호와 이호)가 기억을 되찾는 날이 신천랑의 제삿날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물론 그들도 태산그룹이 고용한 용병들과 신천랑 최고 간부 일랑과의 싸움에선 꽤 고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기억을 되찾은 섬의 망자들은 상남 2인조귀폭을 능가하는 강력한 무력과 무한도전하와 수에 밀리지 않는 유머 콤비네이션으로 신천랑을 은밀하게 제압해 간다.

  <도망자>의 깨알 같은 재미를 자랑하는 부분은 이호 길재익과 삼랑 이매향의 사랑전선이다. 일단 이들의 사랑 궤적을 시간순으로 나열했을 때, 기억상실증에 걸린 길재익에게 이매향이 동정심으로 먼저 다가간 것은 사실이나, 길재익의 마음을 종잡을 수 없었던 그녀가 잠시 시간을 두고 거리를 두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다가 결말부에 이르러 이매향과 길재익을 처리하기 위해 쫓아온 용병 로드리게스의 이번 생의 마지막 연애 같은 건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에 이매향은 그저 덩그러니 길재익의 낯빛을 살필 뿐, 길재익은 이때다 싶었는지,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세상일은 아무도 모르는거라며 대꾸하면서 그녀에게 마음이 있음을 은근히 암시한다. 모든 예술 작품이 감수성의 문제지만, 이렇듯 <도망자>의 러브라인은 독자들이 원하는 만큼의 전개와 사이다 급의 진도를 보여주진 않는다. 그러나 길재익이 망자의 섬을 정리하고 현실 세계로 돌아와, 만두 체인점을 론칭하고 ‘2점을 이매향에게 점주로 맡긴 것을 보면, 그의 츤데레적인 행동은 그가 기억을 잃기 전부터 지니고 있던 낭만적인 면모에서 비롯된 것임이 미루어 짐작되는데.

2. 모든 무협지는 결국 다 멜로다. 낭만이 있는 사이다

   그러니깐, 결국 인스턴트 시대의 사랑에 필요한 건 낭만이다. 우리는 사랑 없이 살아갈 수 없다. 낭만 없이 삶을 낭비해서도 안 된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현실에 얽매이지 않으며 기형도 시인의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문장처럼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 되려면 도시적이든, 전원적이든 낭만을 회복해야 21세기에 걸맞은 고유한 감수성을 간직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낭만이 일대 사건처럼 21세기 웹툰에서 나타난다. 낭만의 진원지는 류기운, 문정후 콤비의 무협 <고수>.

  사파 무림의 절대자 파천신군 독고룡, 그가 세운 파천문은 무림을 공포로 몰아넣으며 천하 대부분을 지배하지만, 그의 제자인 사천왕의 배신으로 파천문은 와해하고, 독고룡은 구사일생으로 겨우 살아남아 강룡에게 천하제일의 무공 파천십이신공을 전수한 후 생을 마감하게 되면서 강룡은 사부님의 복수를 위한 무림 정벌을 나선다.

  당시 일대 파란을 일으키며 등장한 <고수>의 낭만은 두 가지 지점에서 연유한다. 20세기 최고의 만화 용비불패의 작가가 만든 무협물이라는 점과, <고수>의 세계관이 용비불패세계관의 연장선이라는 점이다. ‘아재라 불리는 사람들은 그들의 무협물을 마주한 것만으로 열광적 지지를 표명했다. 특히 아재들은 강룡의 스승 독고룡과 용비불패 외전에 등장하는 개방의 차기 방주 장운이 우정을 나누는 과거 편을 낭만적인 장면으로 지금까지 회자하는데, 개인적으로 <고수>를 보며 낭만 있게 본 장면은 하늘이 내려준 무골천잔왕 구휘가 등장한 순간이다. 구휘는 구무림 최강자 중 하나이자 용비불패의 주인공 용비와 라이벌 관계에 있는 인물로, 그때 울컥한 사람이 어디 나 하나뿐이랴. 정말이지, 천잔왕 구휘의 칠보흑풍권과 용비의 육가창식이 난무하는 둘의 명승부를 상기시켜준 것만으로 감사할 뿐이다.

  <고수>는 만화 용비불패못지않은 수준 높은 그림체와 짜임새 있는 구조로 매회 칠성 사이다급의 장면을 자아낸다. 동네 친한 형인 가우복을 데려오기 위해 백마곡을 단신으로 쳐들어가 흑갈왕 당간을 찌그러트린 강룡의 파천 명륜공과 풍진방 방주 철사자 도겸을 굴복시킨 파천 묵륜공은 사이다 그 자체로 펼쳐진다. 그의 사이다 무공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사천왕이 만든 부활 파천문과의 결전과 구무림의 잔존 세력 마교 교주와의 대결에서도 살벌하게 전개된다.

  <고수> 또한 <도망자>와 마찬가지로 액션 외에 더 신경 쓰이는 초미의 로맨스가 있었으니. 그것은 강룡의 마돈나는 누가 될 것인가이다. 세 명의 여인 중에서 당연히 앞서는 마돈나는 송예린이다. 그녀는 강룡 무림 출사 이후 지금껏 먹여주고 재워준 마돈나이기에 가장 유력하나, 요화단주 흑란이나 백마곡주 진가령이 연인이 돼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저마다의 유대를 그윽하게 그린 것이 작가는 의식됐는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것이 사랑이라지만,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읊조리듯, 각각의 사랑의 방향성을 보여주면서 모든 무협지는 다 멜로임을 증명하듯, 깔끔하게 마돈나를 결정지으며 낭만적으로 막을 내린다.

3. 세상을 향해 소리치다. 평범한 사이다

  그러나 당연한 말이지만, 이 한 세상,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나 사랑받을 권리가 없는 사람은 없다. 사랑이 부족할 순 있어도 사랑할 권리마저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도망자>의 길재익은 이매향에게 마음이 없더라도 이매향은 길재익을 사랑할 수 있다. <고수>도 마찬가지다. 요화단주 흑란의 짝사랑에 과연 누가 돌을 던지겠는가. 문제는 짝사랑도 품지 못한 채,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채 채워지지 않는 부족함 속에 자리 잡는 결핍이다. 결핍은 외로움을 낳는다. 그게 바로 고택일이 외로운 이유다.

  필름 카메라 시대의 감각적인 영상미가 진하게 느껴지는 웹툰 <시동>은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빌려 허구의 상황을 실제 상황처럼 가공한 페이크 영화같이 고택일의 시점과 그의 친구 우상필의 시점을 중점으로 진행된다. 특이한 것은 택일이는 평범한 일을 선택해 평범하지 않은 동료를 알게 되어 지하 세계의 이면을 바라보고, 상필이는 지하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평범하지 않은 동료들로부터 평범한 세계의 이면을 바라본다는 점이다. 이러한 구성은 이외수의 소설 괴물조각보 기법과 비슷한 측면이 있는데, 여러 갈래의 물이 각자 흐르다가 한데 모이는 아우라지처럼 그들의 시점이 마지막에 이르러 하나의 시점으로 모이는 기법을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이 작품의 주된 사이다는 작중 등장하는 장풍 반점의 주방장 거석이 형의 평범한 귀싸대기대사에서 나타난다. 무협지에 나오는 무공보다 강력한 그의 귀싸대기는 철없는 택일이가 맞을 때마다 기절할 정도니, 사이다답다 못해 공포감이 밀려들 정도로 그의 강철 같은 손아귀에 나뒹굴지 않는 놈들이 없다. 그런 그의 귓방망이에도 나름의 철학이 담겨 있다. 정신 못 차리는 야비한 놈들에겐 절대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는 것. 거석이 형은 보도방을 운영하는 양아치가 시비가 붙은 택일이를 때려눕히고 자신에게 덤비자, 아주 야무지게 양아치를 흠씬 두들긴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천천히 담배를 입에 물고 내던지는 한마디. “천성은 어쩔 수가 없는 거야. 그치? 고택일이.”

  사이다란, 대사만으로도 충분히 표현될 수 있음을 방증하는 이 장면은, 여자한테 손찌검이나 하는 양아치 같은 놈을 시원하게 철권으로 교육한 것도 모자라 친절하게 조언까지 해줌으로써 평범한 사이다가 탄생하는 장면이다. 우상필과 사채업자 사장이 나누는 대화에서도 이와 같은 평범한 대사가 강조되는데, 남을 해치면서까지 돈 받는 일은 못 하겠단 우상필에게 사채업자 사장은 진심을 담아 말한다. “부럽다. 난 너만 할 때 못 하겠단 소릴 못했어. 그러다 보니까 어떻게 됐는지 아니? 나한테 어울리는 일이 돼버린 거야. 생각할 시간도 없이.”

  이처럼 <시동>의 문장엔 평범한 힘이 담겨 있다. 특별한 것도 없는 일상에서 평범한 대사를 끄집어내 힘을 부여하는 순간, 그 문장은 평범한 사이다가 되어 특별한 것도 없는 일상을 지배한다. 사채업자 사장이 우상필의 순수함과 진정성을 믿고 사채업을 그만두고 하루하루 힘들게 자영업(조개구이집)을 운영하는 장면과, 외로움으로 몸부림치던 고택일이 엄마의 진심을 알고 눈물을 떨구는 장면, 고택일의 여자 친구가 될 가능성이 아주 조금은 있는 소경주가 자신을 성추행한 복싱 체육관 관장에게 복수하러 갔다가 실컷 얻어터지는 장면 등, 모두 평범하지만 홀가분하게 다가오는 것도, 어두운 과거를 정리하고 어두운 과거에 맞서고, 사람답게 평범하게 일상을 누리는 일 자체가 이미 사이다 인생임을, 작품이 내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흠씬 두들겨 맞은 양아치는 어찌나 양아치인지, 정신을 못 차리고 동네 양아치들을 죄다 끌고 쳐들어와 장풍 반점을 습격하고, 분을 이기지 못해 거석이 형에게 또다시 덤벼들지만, 양아치들은 전부 귀싸대기의 제단에 바쳐지고 만다. 이 사건을 계기로 거석이 형의 정체가 밝혀져 그는 장풍 반점을 떠나는 듯했으나, 그 역시 과거를 청산하고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그답게, 삶의 시동은 끝이 없음을 넌지시 비치며 평범하게돌아온다.

  우리는 인생을 노랫말처럼, ‘어제의 삶이 후회로 오늘을 어지럽히고 괴롭혀도 그게 우리네 삶이기에, 나 오늘도 내일도 미소 짓고 사는 게 우리네 삶이기에온 힘을 다해 가까스로 견뎌내며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산다는 게 쉽지 않지만, 사이다 웹툰을 보면서 배운 게 있다면, 지금 내가 숨 쉬는 공기도 분명 언젠가 달콤한 사이다가 되어 내 안에 자리 잡게 될 것임을 명심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생의 모든 순간이 사이다가 아니더라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좋은 사람은 끝에 가면 무조건 이기니깐.

그래서 쿨하게 추천하는바, 어쩌면 앞으로 올해가 가장 시원한지도 모를 시월의 마지막 밤을 사랑하는 이와 함께 사이다 웹툰을 감상하며 보내는 것은 어떠한가. 그것 나름대로 좋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