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만화 110년, “대표 시사만화가 다섯 명을 꼽는다면!”
시사풍자 만화는 세계 만화의 근원이다. 서양에서 만화의 기원으로 여겨지는 석판화 캐리커처도, 한국 최초의 만화인 대한민보의 시사만평 역시 모두 시사풍자 만화였다. 한 칸, 네 칸, 혹은 캐리커처로 대표되는 시사만화는 한국의 파란만장한 근현대사와 더불어 탄압을 받기도 하고 성장하기도 했다. 독재정권 시절에는 시민들의 울분을 해소하는 소화제 역할도 담당했다. 시사만화 110년 역사를 돌이켜 보며 역대 시사만화가 중에서 대표 작가 다섯 명을 선정해 그들의 활동을 간단하게나마 일별해 보고자 한다.
1. 최초의 만화가, 이도영
관재 이도영(李道榮1994~1933)은 한국 최초의 만화가로 오랫동안 인정받아왔다. 대개의 근대 지식인답게 계몽가, 선각자의 길을 걸었다. 궁정화가로 이미 그림의 실력은 출중했다. 미증유의 신문만화에서 그의 그림은 유려하게 구현되었고 내용은 충실했다.
망국(亡國)의 전야(前夜). 일제의 한일병탄을 위한 단계가 막바지로 치닫던 1909년, 그는 《대한민보(大韓民報)》에서 한국 최초로 신문 연재 시사만화를 시작했다. 1년 남짓 발행된 총 357호의 신문에서 ‘삽화’라는 이름으로 연재된 만화는 신랄한 풍자를 통해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신문은 발행 부수가 6,200여 부를 넘어 《황성신문》과 《제국신문》의 배 이상을 점할 정도로 시중에 성가가 높았다. 이도영의 그림은 해학과 풍자성이 돋보였다.
선배 작가나 참고할 만한 작품 선례가 없었음에도, 그의 만평은 수작들이 쏟아졌다. 더구나 풍전등화 같은 시국은 갈수록 혼란에 빠지고 있었다. 대한민보가 창간되던 그해 6월도 날마다 전국에서 의병들이 일본 헌병들과 교전하고 있었고 간도협약(9월), 이토 히로부미 암살(10월) 같은 사변들이 넘쳤다. 게다가 일제의 언론 탄압이 갈수록 심해지면서, 1909년 8월 12일 자 만평이 삭제된 것을 시작으로 1910년 5월까지 네 번이나 그의 만화가 검열로 삭제되었다.
그의 《대한민보》 연재만화는 크게 세 가지로 내용 분류가 가능하다. 먼저 민중계몽 성격이 많았다. 개화기의 당연한 지식인의 책무였을 것이다. 시간에 늦지 말고 깨어있으라고 일갈하는 등, 개화기 시민으로 해야 할 역할을 당부하는 내용이 많았다. 미래를 책임질 창창한 학생들을 응원하자는 그림도 있었다. 두 번째는 은유적인 세상 풍자이다. 적절한 비유로 고난의 구한말을 그림에 담았다. 마지막은 친일파에 대한 준열한 비판이다. 이도영의 만화에 친일 거두들은 난도질당했다. 적어도 신문 만평에서는 조롱의 대상이 되었고, 그들의 행적이 낱낱이 폭로되었다. 당시 자료가 많지 않았음에도, 인물들의 캐리커처가 매우 돋보였다.

이도영 인물사진/孤客最先聞(351호,1910.8.16.)

‘외로운 사람이 제일 먼저 듣는다’는 뜻으로 고즈넉한 외딴 집에서 앉아있는 사람과 한적한 풍경이 바깥세상의 혼돈과 대비되고 있다. 멋과 풍류가 혼탁한 시사와 만나 멋진 그림으로 탄생했다. 마보기자야 여역 매언자로 언감히 흉론패설을 제창하난다(154호, 1909.12.17.)
'글을 돈 주고 사고 파는(賣言) 악마기자(惡魔記者:국민신보 기자)야, 감히 어디서 흉하고 막글을 하느냐’ 라는 대사와 함께 준엄하게 벌하는 내용으로 펜으로 곤장을 치는 장면이다.
그러나 독자들에게 사랑받았던 최초의 만화는 1910년 한일병탄과 함께 채 1년 만에 사라졌다. 작가 이도영은 《대한민보》가 한일병탄과 함께 폐간된 이후 주로 서화에 집중하다 1933년 병사했다. 어쩌면 이도영의 일생은 파란만장 한국 근현대사의 서막일지도 모른다.
2. 지상최대의 만화가, 김용환
코주부 김용환(金龍煥, 1912~1998)은 현대 한국 만화의 기초를 닦고 체계를 정립하며 만화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는 만화뿐 아니라 펜화, 삽화, 풍경화, 시사만화, 이야기 만화까지 넘나드는 다재다능한 작가였다. 또한 후배 작가를 양성하고 만화가의 위상을 높이는 데도 기여했다. 글로벌 마인드를 가진 몇 안 되는 작가로 일반 대중에게 익히 알려진 대중스타이기도 했다. 오늘날로 치면 기안84나 침착맨을 능가할 정도라고 보면 될 것이다.
경남 김해에서 태어나 그림에 대한 소질이 있던 소년은 부산 동래고보를 거쳐 일본의 가와바타 미술학교(川端画学校)와 테이코쿠미술학교(帝国美術学校, 무사시노대학)에서 연이어 수학했다. 이후 그는 운명적으로, 당대 최고의 펜화가인 카바시마 가츠이치를 비롯해 유명 잡지에서 활약하던 삽화가들의 그림을 접했다. 그들의 세밀화를 모사하고 공부해 삽화가로 데뷔하게 된다. 필명은 키타 코우지(北宏二)로 당대 최고 인기잡지 중 하나였던 《니혼쇼넨(日本少年)》 등에서 활동했다.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여타의 만화가들처럼 전쟁 찬양 삽화를 많이 그렸다. 일제 강점기 친일 만화가들의 행적이 논란이 되곤 하지만, 김용환은 일본 현지에서 일본식 이름으로 활동했기에 친일이라는 이름도 무색할 정도이다.
해방 이후 귀국한 김용환은 본격적인 만화가 활동을 시작한다. 시사만화, 아동만화를 창작하고 만화 전문매체도 만들었다. 만화 선진국 일본에서 돌아온 실력자였으니 앞선 리더 역할은 당연했다. 특히, 국제적 감각을 지니고 있었던 김용환은 시사만화에서 발군의 능력을 보여 주었다. 당대 한반도를 둘러싼 정치지형을 날카롭게 분석한 그림들이 시중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5년부터 1949년까지의 정치풍자는 국제정세에 대한 혜안과 통렬한 풍자가 돋보였다.

三八線블루-스, 동아일보 (1949.1.1.)
왼쪽 1945년의 만평 <삼팔선 불루-스>는 이 시기 그의 능력을 대표하는 그림이다. 뒤에는 ‘얄타樂團(악단)’가 연주를 하고 있고 조선 여인의 상반신이 소련군에, 하반신은 미군에 양분되어 있다. 강대국들의 신탁통치의 길을 연 얄타회(1945) 이후 1946년 미, 소공동위원회 휴회, 좌, 우 합작 실패에 따른 한반도의 분단상황을 적확하게 풍자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 시기 인민군에 복무했다가 이후 국군 홍보에 동원되며 이념의 희생자가 되었다. 이 경험은 결국, 일본 극동 미 사령부 전속 화가라는 반공의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계기가 된다. 그는 이곳에서 풍속화를 그려 아름다운 한국의 문화를 곳곳에 알렸다. 도하 국내 신문과 잡지에서 그의 이름이 빠지는 일이 없었지만, 서서히 일본 현지 생활에 집중하게 되었다. 마지막을 보낸 곳은 미국이었다. 디아스포라(Diaspora) 김용환은 수많은 그림을 남기고 영면했다.
3. 시사만화의 대명사 고바우, 김성환
1950년대부터 김성환은 한국 시사만화의 국가대표였다. 외국에서도 김성환과 고바우는 유명인사였다. 특히 머리카락 한 가닥이 솟은 고바우 캐릭터는 서민들의 우상이자 그의 페르소나였다. 그는 스타 만화가로서 미디어 전반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김성환(金星煥, 1932~2019)은 만주에서 자란 이후 경복중학교를 거쳐 1949년 《연합신문》에 <멍텅구리>로 데뷔했다. 잡지사 《화랑》과 《만화뉴스》의 기자와 만화가로도 일했다. 한국전쟁에서 반공 만화를 그리는 정훈국 만화가로 활약했다. 1955년, 드디어 《동아일보》에 고바우로 본격적인 네 칸 시사만화 연재를 시작했다. 연재 처를 바꾸어 가며 2000년까지 오랫동안 연재해 인기를 끌었다.

동아일보 1966.08.01
그는 인기를 얻은 만큼, 정부의 탄압과 독자들의 열렬한 사랑을 동시에 받은 작가였다. 탄압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경무대 똥통 사건’으로 이승만 정부의 부패를 풍자해 곤욕을 치렀다. 고바우는 시대의 상징이었다. 시인 이영도는 고바우에 헌사를 바치기도 했다.
‘석간을 펼쳐 들면
손주놈 고바우를 묻는다.
혀끝에 진득이는 이 풍자 감칠 맛을
전할 길 없는 내 어휘
모국어도 가난하네’
박석환은 김성환에 대해 “시사 만화가였지만 문필가였다. 만화에 관해 공부하고 논하는 사람이 없던 시절의 만화연구자이자 역사가, 평론가”였다고 평가했다. 그는 유머에 대한 지론도 확실했는데, “고단한 한국 사회 속성상 한국의 유머는 너무 괴로워 웃어넘겨야 하는 쓴웃음이 많다”고 한국적 페이소스를 진단했다.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도 격조 있는 유머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김성환과 고바우 캐릭터 우표
방희영과 김아영의 논문 <네 컷 시사만화의 미학적 특성 연구>(2019)는 김성환의 만화를 보다 입체적으로 해석했다. 글은 먼저 ‘45년간 연재되면서 정치적 상황과 검열 수위에 따라 부침을 겪었으나 권위주의적 정치 권력을 비판하고 서민들의 고충과 애환을 위로하는 근본정신은 잊지 않았다’고 전제했다. 그러면서도 대개의 시사 만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분단 모순이나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한계도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미학적으로는 ‘검열을 피하면서 메타언어로서 독자로 하여금 보다 강렬한 방식으로 현실을 인식하도록 하는 특징’을 지니고, 이어 ‘이야기 흐름을 미메시스적(모방) 서술 방식으로 경쾌하고 재치 있는 스타일의 은유와 환유 등을 활용하는 형식적 미학적 특성이 돋보인다’고 서술했다.
독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어쩌면 국민들의 웃음일 것이며, 그는 우리에게 쓴 웃음을 주고 억압의 공간에서 카타르시스를 제공했던 친구이자 오랜 벗이었다. 그렇게 긴 세월 동안 ‘고바우’ 영감은 한국 시사만화와 네 칸 만화의 기록을 새로 쓰며 역사에 이정표로 남았다.
4. 시사만화의 변곡점, 박재동

기존만평과 박재동 그림판의 차이. <조선만평>과 같은 기존 일반 만평은 선이 간결하고 아래 하단에 제목 글이 들어가지만, 박재동 만화는 외국의 시사만화처럼 말풍선이 들어가며 표현이 디테일하다.
박재동(朴在東, 1952~)은 1988년 한겨레 창간과 함께 혜성같이 등장해 한국 시사만화의 문법을 일거에 바꾸어 놓은 작가이다. 미술 비전공자들이 간략한 선과 단순 명쾌한 풍자로 표현했던 기존 만평 문법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한국화 전공자답게 스토리만화 형식과 말풍선을 많이 활용해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박재동 사진, 대선 이후 공허한 마음을 표현한 만평으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자아냈다.(한겨레 1992.12.22.).
그는 최근 지역 일간지에 연재 중이기도 하다.(경기신문 2020.11.26)
이러한 파격적 시도는 소속 매체가 진보 미디어라는 장점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탄압은 있었으나 직접적 인신구속이 없던 시대 분위기 덕분에 가능했을 수도 있다. 그는 한마디로 지면에서 종횡무진했다. 동양화풍의 부드러운 선과 배경을 가득 채운 이야기 만화 스타일의 그림은 독자에게 더욱 선명한 의미를 전달했다.
<드래곤 볼>이 유머 액션 영화의 장르를 열었고 <슬램덩크>가 사실적인 스포츠만화의 전범을 만들었다면, 한국 시사만화는 박재동의 <한겨레 만평>이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그는 연재만화를 그만두고 2001년 이후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교수로 만화를 가르쳤으며, 많은 단체와 협회에서 주역을 맡았다. 이후 《경기신문》에 <박재동의 손바닥 아트>를 2023년까지 연재했다.
5. 또 다른 대안, 박순찬

2021년 경향신문 장도리
“시사만화라는 말 자체가 어폐입니다. 신문만화라 하던가 아니면 그냥 만화일 뿐입니다.” 필자와 직접 만난 자리에서 박순찬 화백은 거침없이 말했다. 2025년 가장 핫한 시사만화가 박순찬(朴淳贊, 1969~)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대학 시절 만화 동아리를 거쳐 《경향신문》에서 네 칸 만화 <장도리>(1995~2021)을 오랫동안 연재하며 활약했다.
박순찬의 시사 만화사에서의 위치는 대개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박재동이 기존의 단순한 카툰 형식 만평을 바꿨듯, 박순찬은 네 칸 만화에 극화 형태의 묘사를 도입한 최초의 작가다. 네 칸 만화에서 세밀하고 풍부한 정치인 캐리커처를 구현한 사례는 세계 최초가 아닐까 싶다. 실제 그는 박정희를 주제로 스토리만화 단행본을 내기도 했다.
둘째, 미디어를 떠나 새로운 실험에 도전 중이다. 안온한 ‘회사원’의 자리를 버리고 독립작가로 세상과 소통 중이다. 그는 수많은 팬덤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동안 그리고 싶지만 다루지 못했던 만평과 본업인 네 칸 만화를 SNS에서 활발히 선보이며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러나 최근 인터뷰에서 그는 완전독립은 아니라고 했다. “유튜브나 후원금도 실제 힘들고 작은 매체에 연재료를 받고 사이트를 운영해서 살죠.” 그는 레거시 미디어의 간섭과 광고주의 압박을 벗어난 것이 가장 크다고 했다. 그리고 진보와 보수를 떠나, 편집부 내의 보수성 역시 그에겐 스트레스로 작용했을 것이다.
셋째, 시사만화의 영역 확대이다. 그가 대체재로 꼽는 굽시니스트의 시사 이야기만화처럼 다양한 형식을 추구한다. 예를 들어 이준석 전 당 대표나 안철수 의원의 풍자 시리즈를 연재하고, 윤석열, 김건희 등 정치인 캐릭터의 세계관도 독자들에게 선보이고 있다.
네 칸 만화의 전설, 김성환의 <고바우>, 안의섭의 <두꺼비>, 이홍우의 <나대로>를 거쳐 박순찬의 <장도리>는 21세기에서 정점을 찍는 느낌이다. 네 칸 만화계의 ‘앙팡테리블(무서운 신인)’이라 불리는 박순찬 덕분에, 새로운 신성(新星)과 자유로운 형식이 더욱 많이 등장하길 기대한다.


장도리 사이트(https://jangdori.tistory.com)에 연재되는 만평과 만화
“지금도 신문에 연재되는 만화를 사람들이 신문을 통해서 안 보고 다른 방식을 통해서 보니 그게 좀 웃긴 거예요. 그럴 거면 굳이 왜 신문에 연재하느냐 이거죠. 어차피 신문으로 보는 게 아닌데. 괜히 중간에 뭘 거쳐야 하고 이런 게 좀 불편해 보이기도 하고. 종이신문에 게재되는 날은 그다음 날인데 그 전날에 독자들이 돌려보는 그런 것도 좀 이상하잖아요. 뭔가 맞지 않아요.”
정준희와의 대담 중, 《신문과 방송》, 2021.
<참고자료>
-동아일보
-기자협회보
-손상익 (1996). 한국만화통사,프레스빌
-최석채(1996). 애국 계몽운동과 한국 근대미술 - 이도영론, 창작과 비평 93호 (가을)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 베이스
<인물사진 출처>
- 동아일보, 기자협회보, 직접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