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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만화 지침서로 기록될 수 있을까, 고행석의 ‘불청객 백서’

대량생산 만화 시대의 고행석이 만화의 재미와 기준을 지키기 위해 만든 한국 최초의 체계적 만화 제작 지침서가 ‘불청객 백서’다.

2025-10-29 백종성

한국 최초의 만화 지침서로 기록될 수 있을까, 고행석의 '불청객 백서'


1. 공장식 만화와 대본소 시스템

소위 한국 대본소 만화의 3대 만화가라 불리는 작가들이 있다.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많은 이들이 이현세, 박봉성, 고행석을 꼽는다. 이들은 1980년대 전후 만화방이라 불리던 대본소를 중심으로 유통되던 만화를 대량으로 제작하여 흥행에 성공한 대표적인 작가들로 언급된다. 대본소 만화는 질보다는 양으로 승부하는, 어떤 이는 한국 만화를 도태시킨 시스템이라고 비판하기도 하는 공장식 제작 형태로 만들어진 만화를 의미한다. 당시 대본소 만화는 흥행에 성공한 작품의 대표 캐릭터와 장르를 앞세워 제목만 조금씩 달리한, 사실상 거의 같은 내용이라고 봐도 무방한 작품들을 마구잡이로 뽑아내고 있었다. 1980년대를 전후로 오혜성, 구영탄, 독고탁, 최강타 등 스타 캐릭터들이 탄생하고 끊임없이 소비되었다. 대본소 만화를 대표하는 많은 작가조차도 이러한 출판 시스템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대부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출판사의 권유에 의한 제작이었다라고 회고하고 있다. 다만, 당시 만화를 유통, 소비하는 곳은 대본소밖에 없었기 때문에 모든 대본소 만화를 공장식이라 부르긴 어렵다. ‘공포의 외인구단’, ‘북해의 별등 많은 작품은 시리즈를 염두에 두고 제작했다기보다는 순수한 작품의 재미와 흥행을 위해 제작된 경우가 많았다. 수많은 작품 중 반응이 좋은 일부 작품이 나오면 출판사에서 해당 주인공을 내 새운 차기작을 종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찌 됐든, 공장식 대본소 만화는 한국 만화의 변천사에서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기억이면서도, 대량생산에 대한 시도, 스튜디오형 제작 시스템의 구축을 시도한 생산 유통 형태라 평가받는 독특한 위치에 있다. 최근 노블 코믹스 등으로 웹툰 제작 스튜디오가 대량으로 생기며 양산형 작품들을 쏟아내는 모습과 오버랩되기도 한다. 당시 약 1만여 개의 대본소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인기작의 경우 대부분의 대본소에서 납품했기 때문에 만화책 한 권을 내면 1만 부를 팔 수 있었다. 작가마다 달랐지만, 한 달에 10여 권 내외를 내기도 하고, 박봉석 같은 작가들은 한 달에 4~50여 권을 제작하기도 했다. 한 달에 50만 부를 팔 수도 있는 어마어마한 규모로 운영된 셈이다. 많은 수익을 내기 위해서는 하루라도 빨리 작품을 만들어야 했고, 이는 작가 혼자서는 절대 감당할 수 없는 작업량이었다. 인기 작가들은 문하생들을 뽑아 화실이라 불리는 스튜디오 형태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고행석 작가도 그중 한 명이었다. ‘요절복통 불청객으로 불청객 시리즈를 히트시킨 고행석은 출판사의 권유로 화실 규모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물밀듯이 밀려오는 인기에 출판사에서는 더욱더 많은 작품 제작을 권고하게 되면서 소위 B , C 팀으로 불리는 하위 팀들까지 운영하게 되었다. 넘쳐나는 작품들에 대한 제작 공급을 감당하기 어려운 지점이 되자 미흡한 결과물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고행석은 작품의 질을 유지하기 위해 아이디어를 낸다. 화실의 작가들이 일정한 완성도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참고할 수 있는 만화 제작 지침서를 만든 것이다. 이름하여 불청객 백서’. 한국 최초의 만화 지침서가 될 수도 있는 불청객 백서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그림. 고행석 작가와 <불청객 백서>

 

2. 최초의 스튜디오형 만화 지침서 '불청객 백서'의 탄생

고행석 작가에 따르면 불청객 백서1980년대 중후반 10여 명의 스토리 작가들과 함께 작업하던 시기에 제작되었다. 제작하는 작품이 많다 보니 타이틀마다 스토리 작가들이 붙어 협업했는데, 작가마다 성향이 달라 작품 제작 속도가 일정하지 않고 질적 저하가 심해지고 있던 시기였다. 비단 스토리뿐만이 아니라 작화 역시 많은 인원과 분업하였는데, 얼굴을 그리는 마스크맨’, 몸을 그리는 터치맨’, 배경을 그리는 배경’, 먹칠 및 지우개질을 하는 인력은 뒤처리등으로 불리며 각각의 영역에 대한 작업을 진행했다. 작화 작가들은 여러 개의 타이틀을 동시에 진행했고 스토리 작가들은 한 개의 타이틀을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작화 인력들이 아무리 일을 빨리 끝내더라도 스토리가 나오지 않으면 작업을 진행할 수 없는 형태가 되었다. 일부 스토리 작가들은 마감이 임박하면 스토리를 진행시키기가 어려워 대사를 늘어뜨리는 방식으로 마감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행석 작가에 따르면 소위 말꼬리 잡고 늘어지는스토리를 자주 썼다. 예를 들어 A나도 젊었을 때 고생을 많이 했수다.”라고 말하면 다음에 B무슨 고생?”, A가 다시 학교도 못 다니고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까지 했소.” “근데 왜 학교를 못 다녀요?” “부모가 일찍 돌아가셨어.” “그럼 머슴살이도 하면서 독학하시지.” “머슴살이가 얼마나 고달픈지 모르는군요.”, “머슴살이 때려치우고 서울로 도망가지”. 이러한 방식으로 컷을 하나씩 늘려가는 방식이다. 한 개의 컷에 두 대사가 같이 들어가도 되지만 컷 수를 늘려 스토리 진행을 지연시키고 페이지 수를 늘려가는 식으로 꼼수를 쓰는 것이다. 고행석 작가는 이러한 방식을 매우 싫어했는데 저급한 결과물이 나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제작 지침서인 <불청객 백서>를 만들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 지침서를 만들기 전에 박희준 작가의 <만화 작법> 지필을 보조한 경험이 있었는데, 회고에 의하면 많은 부분을 고행석 작가가 작성했다고 밝혔다. 그때의 경험이 화실 문하생들을 위한 지침서인 <불청객 백서>를 만드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조금 더 자세하게 이 지침서의 구성을 살펴보도록 하자.


3. <불청객 백서>의 구성

<불청객 백서>는 스토리 지침, 등장인물 성격 분석, 캐릭터 시트 및 작화에 관한 내용으로 구분되어 있다. 가장 중요하게 여긴 첫 번째 챕터는. 스토리 작가들에게 당부하는 말들이다.

모든 작품은 대작이어야 합니다.’, ‘모든 작품은 특선 기획 작품이어야 합니다.’ ‘모든 작품은 15편 이상 30편 이하로 해주세요.’, ‘새 작품을 시작하기 전에 전체 내용을 16절지 1장 이상으로 요약해서 제출해 주세요.’, ‘늘여 먹기를 금지합니다.’, ‘쓸데없는 말장난을 금지합니다.’,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대사는 금지합니다.’ 등 구체적인 예시와 함께 작가 및 작품이 갖는 방향성을 기재하였다. 특히 예술적인 작품은 사양합니다.’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작품의 핵심을 황당무계함으로 설정했던 고행석 작가는 독자들이 불청객 시리즈를 황당무계하게 받아들이길 원했다. 야구 만화를 그리더라도 구영탄이라는 캐릭터에 시속 200km를 던질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거나, 공을 던지면 무조건 스트라이크를 잡아낼 수 있지만 온 힘과 집중력을 다해 던지기 때문에 하나만 던지면 지쳐 쓰러져 버린다든가 하는 설정이다. 불청객 시리즈를 보는 독자들은 통속적이고 삼류 신파적인 것을 기대하고 본다고 분석하였고 이를 <불청객 백서>를 통해 문하생들에게 공유하였다. 수많은 소설과 영화, 작법서 등을 탐구한 고행석 작가는 대다수의 로맨스는 로미오와 줄리엣에 근간을 두고 있고 복수극은 몽테크리스토 백작에 근간을 두고 있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작가는 해당 장르의 통속에 기대고 있으며 그 통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당신은 대문호가 될 수 있는 역량을 갖고 있는 것이라 이야기했다.

주인공의 초인적인 힘도 강조했다. ‘주인공은 액션에서는 물론이고 기타의 사건에서도 초인적이어야 한다’, ‘평범한 주인공 이야기는 구상하지 말아라, 휴머니즘이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현장 같은 문학 작품은 사절합니다라고 기술했다. 독자들은 주인공에게 동일시해야 하며 주인공을 통해 우쭐거리는 감정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독자들의 심정과 반응을 잘 알 수 있었던 것은 고행석 작가가 대본소를 운영하면서 경험적으로 체득한 것 때문이었다. 대본소(만화방)를 직접 운영하며 만화책을 읽는 독자들을 살펴보니 들어올 때는 기가 죽어서 들어오던 아이가 이현세의 오혜성이 등장하는 작품들을 읽고 나서는 기세가 등등해져서 대본소를 이리저리 둘러보고 나가는 등의 반응을 목격하기도 하고, 만화를 납품하는 배달업자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는 등 직, 간접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고행석은 <불청객 백서>를 통해 스토리 작가들에게 작품의 핵심을 놓치지 말 것을 당부했다.

다음 챕터는 등장인물들의 캐릭터성에 관한 기술이 있다. 고행석은 이야기를 시작할 때 전체 등장인물들의 성격을 결정하고 인간의 여러 가지 성격에 대한 분석을 중요시했는데, 이에 관한 내용들이 기술되어 있다. 질투가 심한 성격, 욕심쟁이, 소심한 사람, 쾌활한 사람, 신경질적인 사람, 의심 많은 사람, 변덕쟁이, 감동파 등등. 일부 등장인물에 대한 설정은 주변 인물을 참고하기도 했다. 불청객 시리즈에 핵심 조연으로 등장하는 마구만이라는 구영탄의 친구는 화실의 제자를 참고하여 설정하었다. 고행석은 항상 주변을 관찰하면서 독특하거나 만화적 설정에 어울리는 인물의 성격을 파악하면 작품에 적용했고, 이러한 내용들을 <불청객 백서>에 녹여 넣었다.

마지막으로 캐릭터 시트 및 작화에 대한 부분에는 주요 인물들의 전신 묘사, 확대된 표정 묘사 등이 담겨 있다. 특히 독자들이 얼굴 및 표정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인물들의 개성이 담길 수 있도록 확실하게 인상을 구분해서 그릴 것을 강조했다. 얼굴만 따로 그리는 마스크맨’, 몸만 그리는 터치맨등 인물 피사체 부위에 따라 그리는 작가들이 달랐기 때문에 이 <불청객 백서>의 존재는 스튜디오형 화실 제작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지침서가 되었다.

 

4. 나가며

마감을 앞두고 급하게 제작하는 작품들이 늘어나며 작품의 질이 떨어지자 이걸 지키지 않으면 더 이상 작품을 받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만들어 낸 최초의 스튜디오형 지침서 <불청객 백서>. 그간 경험했던 다양한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며칠간 고생해서 만든 <불청객 백서>가 제자들에게 공개되자 열띤 반응이 일었다. 처음에는 스토리 작가들만을 대상으로 제공하려 했지만 그림 작가들도 갖고 싶어 해서 많은 문하생에게 배포했다고 한다. 문하생들은 이 문서를 내부에서만 써야지 다른 화실로 이 노하우가 넘어가면 안 된다며 노심초사하며, 이건 우리들만의 비급이니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고행석의 <불청객 백서>1980년대 대본소 만화의 치열한 현장에서 탄생한, 한국형 대중 만화 제작의 실천 기록이다. 이 지침서는 예술적 이상이나 작가주의보다는, 무엇보다 독자 반응과 만화적 재미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불청객시리즈를 비롯한 그의 작품들이 보여준 과장된 설정, 통속적 감정, 초인적 캐릭터는 당시 독자들이 원하는 즉각적 쾌감과 몰입감을 정확히 짚어냈다. <불청객 백서>는 이러한 대중적 감수성을 체계화한 매뉴얼이었다. 작화와 스토리 모두 독자가 웃고, 놀라고, 속 시원해해야 한다라는 목표 아래 설계되었다. 말꼬리를 늘여 스토리를 끄는 작법을 금지하고, 주인공은 언제나 평범하지 않아야 했고, 독자는 그를 통해 대리만족과 해방감을 느껴야 했다. 이는 대본소 만화 특유의 즉흥성과 속도감, 통속적 쾌감의 미학을 가장 정확히 표현한 지침이기도 했다.

결국 <불청객 백서>는 대량생산 체제 속에서 잃기 쉬운 만화의 재미를 지키기 위한 고행석식 해법이었다. 복잡한 철학보다, 독자가 한 장 넘길 때마다 느끼는 흥분과 웃음을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그의 만화가 오랫동안 회자하는 이유는 바로 이 대중의 감정과 눈높이에 맞춘 표현 방식, 만화다움을 가장 잘 이해한 작가였기 때문이다. 고행석의 지침서는 단순한 작업 노트가 아니라, 시대를 앞서간 한국형 대중 만화 표현의 선구적인 시도였다.

필진이미지

백종성

현) 국립목포대학교 뉴아트영상애니메이션전공 교수
전) 배재대학교 아트앤웹툰학부 교수
전) 호남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