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만화가>
<지금, 만화가>는 한국 만화사의 한 페이지를 그려온 원로 만화가들의 현재를 찾아갑니다. 그들의 요즘 안부부터 지나온 시간, 여전히 그리고 싶은 만화 이야기까지.
만화가로 살아온 삶을 천천히 되짚고, 잊지 말아야 할 목소리를 담아내는 기록입니다. (편집자 주)
전투보다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 작가로서의 의무감
김형배 작가와 베트남전쟁
글 최은영(한국만화영상진흥원 학예사)

2025년 4월 17일 목요일. 김형배(1947~) 작가와 찾은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평창동 소재). 기획 전시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강에 스며든다’1)를 관람하던 중, 작가는 이무기 프로젝트2)의 작품 <트랜스-젠더-시간-지도>3) 앞에 섰다. 개인의 서사와 한국 사회사를 퀴어의 역사와 복잡한 그물망으로 연결한 작품 안에서 작가는 ‘1964~1973 한국군 베트남전쟁4) 파병’을 가리킨다. 그리고 작가 개인의 서사를 회고한다. “나도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고 싶었다.”
작가는 유독 베트남전쟁에 관한 만화를 다수 그렸다. 1987년 《만화광장》에 연재한 <투이호아 블루스>를 필두로 1990년 <스크램블>(《주간만화》 연재), 1992년 <황색탄환>(《스포츠조선》 연재), 1993년 <사이공에서 하노이까지>(《매주만화》 연재), 그리고 <비어헌터>와 <탄흔> 등이 있다. 그는 당시의 다른 작가들과 달리 베트남전쟁에 관심이 깊었다. 1987년 《만화광장》이 군부대에 납품되면서 군인 이야기를 해 달라는 청탁이 있기도 했지만, 작가의 베트남전쟁에 관한 관심은 자원을 했던 1970년부터이다.
작가는 만화가로 활동하다 1970년 군에 입대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월남에 군인들을 파병했고 많은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그중에는 작가의 친구들도 있었다. 참혹한 전쟁의 실상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작가는 파병을 자원했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자신의 심적, 도덕적 반응이 궁금했다. 살아서만 돌아온다면 창작활동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당시 작전과에서 작전지도, 괘도5), 교본 등을 그리는 특수업무를 담당하고 있었기에 작가의 파병 신청은 거부되었다.
베트남전쟁은 작가 세대에게 트라우마였다. 작가는 전쟁을 객관적으로 다루되, 전투보다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다루었다. 작가 또래의 사병들과 남겨진 가족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싶었다. 이는 작가로서의 의무감이었다. 만화라는 매체의 교육적 측면을 이용하여 전쟁의 참상을 객관적으로 고발하고 싶었다. 그렇게 창작된 작품들은 1980년대 말부터 잡지 또는 신문 연재, 단행본 등으로 출판되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실제 베트남어를 배울 생각을 할 정도로 연구에 매진한 결과였다.
‘1964~1973 한국군 베트남전쟁 파병’의 역사가 김형배 작가 개인사와 연결되어 다수의 작품들이 창작된 결과, 작가는 데뷔 50주년 기념으로 40대에 그린 단편 12점을 모아 단편집 <끝나지 않은 전장, 닫히지 않은 미래>(2025 마나문고)를 8월 출간할 예정이다. 베트남전 이후,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탄흔>, 죽음이 어리석게 난무하는 전쟁터를 묘사한 <스크램블>, 전쟁 속에서 쉽게 희생될 수밖에 없던 존재인 여성을 다룬 <춘자>, 전장의 소리, 음악 그리고 불협화음을 그린 <성(聲)>, 한국군 병사의 고백을 다룬 시대의 후유증 <사이공에서 하노이까지> 그리고 전쟁에 대한 기억을 간직한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 <그대 무향에 살고 있나니> 등이 포함되어 있다. 한 번도 끝난 적 없던 전장과 삶의 기억을 기록한 이 작품들을 통해 작가가 실천한 ‘작가로서의 의무’를 살펴볼 수 있다.
작가는 2022년 1월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이사장에 취임하였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중도에 사퇴한다. 그리고 작가가 소장하고 있던 만화원고 및 단행본 등 174건 3,461점을 진흥원에 기증하였다. 기증된 자료에는 <황색탄환> 원고와 <투이호와 블루스> 단행본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작가의 생애사를 기록한 구술채록집이 제작되어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만화규장각에서 확인할 수 있다.


<황색탄환> 원고, 1992, 269×391×23㎜,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소장




<투이호아 블루스> (1), 1998, 고려가
각주
1) 서울시립미술관 기획 전시, 전시 기간: 2025.3.6.~7.27. / 전시 장소: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 모음동 전시실 1, 2 / 참여 작가: 권은비, 김아영, 나 현, 문상훈, 윤지원, 이무기 프로젝트, 임흥순, 타카하시 켄타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주4․3평화재단, 한국퀴어아카이브 퀴어락
2) 이무기 프로젝트(이태원은 무엇일까 기록하기 프로젝트)는 약 70년의 역사를 지닌 이태원 트랜스젠더-성 노동자 커뮤니티의 역사를 기록하는 프로젝트다. 2023년 8월부터 조사 연구를 시작하여 2024년에 본격적으로 아웃리치와 아카이빙 작업을 진행하였으며, 커뮤니티 공동의 역사 쓰기 실천으로 지속해 오고 있다. 미술가인 솔과 상훈, 사진가 재윤, 연구자 수엉, 활동가 여름과 영화감독 일란이 팀으로 활동하고 있다.
3) 트랜스젠더의 삶과 한국 퀴어 역사를 지도 형식으로 시각화한 설치 작업이다. 이무기 프로젝트는 한남뉴타운 재개발이 다시 본격화하기 시작한 2023년부터 트랜스젠더 커뮤니티의 삶을 조사, 연구하고 시의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구술과 사진을 통해 수집한 개인 서사를 한국의 사회사와 연결하여 퀴어의 역사가 한국 사회의 다른 영역과 상호작용하며 존재해 왔음을 증명한다. 이 작업은 연표와 지도에 내재된 근대주의적, 식민주의적 관점을 전복하며 트랜스젠더 역사의 단절과 지리적 고립을 비평적으로 조명한다.
4) 1960~1975 베트남의 통일 과정에서 미국과 벌인 전쟁
5) 벽에 걸어 놓고 보는 학습용 그림이나 지도
6) 한국만화사 구술채록-25, 연구자 김종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