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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교육> 차별을 못 견뎌하는 우리에게

혐오 표현으로 연재가 중단된 '참교육' 사례를 '차별'의 관점으로 살펴보았습니다.

2023-11-01 은천화

[ 그림 1, 채용택, 한가람 작가의 '참교육' ]


1. 차별하지 않을수록 더 차별한다. 평등할수록 더 평등하지 않다.

차별이란 단어는 평등의 시대에서 매우 민감한 단어이다. 차별 철폐가 현대 사회의 중요 안건으로 다루어지면서 수많은 차별이 문화적으로, 제도적으로 축출되고 있다. 전근대 사회에서 가장 기본적인 차별은 바로 신분제와 성별이었다. 대부분 국가가 최소 노예, 평민, 귀족, 왕족이라는 4가지 신분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조선 시대의 경우 노비, 양인, 양반, 왕족으로 나눌 수 있겠는데, 이러한 신분제도는 갑오개혁 이후로 폐지되었다. 

제도적 차별의 폐지가 곧 평등은 아니다. 역사에 깊게 내재된 차별은 억누르면 다른 곳이 튀어나오는 터진 솜뭉치와 같다. 신분제의 폐지는 자본주의를 발달시키면서 자본에 의한 차별을 강화했다. 차별은 사회의 역사다. 제도적 차별이 사라짐으로써 오히려 은폐된 차별이 늘어나는 역설은 명시적이고 체계적인 차별의 계단을 묵시적이고 흐릿한 스펙트럼으로 만들었다. 이 스펙트럼은 사회적 판단에 있어 하나의 트랜드로 작용하고 있다. 자폐 스펙트럼, 학업 스펙트럼처럼 체계적 단계가 아닌 어떤 지점을 따로 지정할 수 없게 되면서 차별에 대한 논의는 이전보다 더 묽어지고 논의하기 어려워졌다.

차별을 논의하기 어려워진 것의 가장 큰 문제는 차별 자체를 언급하기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언급하기 힘든 것은 일종의 권력이다. 조선 시대에 왕의 이름은 입에 담을 수도, 글에 쓸 수도 없었으며, 서양에서 평민이 귀족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죄였다. 얼굴을 함부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야 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이것은 현대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여서 갑질 사건은 언제나 고개 숙이라고 하며 본인의 지위를 내세우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차별에 대해 이제는 약자가 평등이라는 무기로 역차별이라는 공격을 한다는 것이다.

역차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차별의 관계가 현대 사회에서 언제든 역전될 수 있는 여지가 생긴 것은 사실이다. 여론이라는 것에 힘입어 다수는 소수를 이길 권리를 얻게 되었다. 혁명이 일어날 때마다,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사회는 발전했다. 발전하는 것이 평등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언제든지(엄밀히 말해 시대가 요구하는 합리적인 장치 아래) 강자가 약자로 전락할 수 있는 상황이 가능해졌다는 것은 평등이 가능해진 것이라는 점에서 롤스의 자유주의가 실제 사건 아래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평등하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차별적 사건이 선제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실제 차별을 이를 위해 발생시키는 것은 모순이기에 우리는 항상 비유를 빌려 세계를 설명한다. 그것이 바로 이야기다.

웹툰 <참교육>은 실제 사건들을 모티프로 사건들을 재구성하고 집약해 나간다. 논란이 될 만한 차별에 대해 과감하게 스토리를 전개해 나가는데 정치권력, 성별 권력, 스포츠 권력부터 촉법소년, 정치적 올바름, 가정폭력, 가스라이팅, 사이비, 불법도박 등 청소년과 관련된 모든 주제를 건들고 있다. 이러한 위태로운 줄타기는 그 곡예사가 떨어지기 전까지 환호받았다. 플랫폼의 인기 순위 1위를 다투며 자극적인 것에 목마른 대중들에게 도덕적 자극이란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주었다. 폭력으로 복잡한 문제를 단순하게 해결하는 것은 분명히 제대로 된 해결이라고 볼 수 없지만, 교권보호국의 목표가 그러했듯 웹툰의 목표 또한 묻힌 문제들의 공론화였기에 그러한 시도들은 분명히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주제를 언급한 순간 곡예사의 외줄은 끊어지고 말았다. 바로 인종차별이다. <참교육> 2부에서 새로 들어온 교권보호국 직원인 다니엘 현이 그 언어를 꺼내는 순간 ‘참교육’은 중단되었다. 논란의 125화는 즉시 삭제되었으며, 연재는 무기한 휴재 상태이다.

인종차별은 성차별만큼이나 전 세계적으로 논란이 되는 차별 주제이다. 관습으로 남아있는 차별 중에서는 앞의 두 차별이 인간 사회에서 가장 오래된 차별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외견으로 드러나는 차별은 가장 강력한 차별 요소로 작용해 왔다. 인간은 결국 동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서 복잡한 사고 논리보다는 직관적인 감각으로 느껴지는 낯선 것에 가장 간단하게 거부감을 느낀다. 사고 논리와 관련된 종교나 정치는 그 논리가 개인의 머릿속에 확립되기 전까지 차별의 인식을 심어주기가 쉽지 않다. 낯섦은 곧 거부다. 그중에서도 눈에 보이는 낯섦은 가장 쉬운 거부감이어서 밟아도 죽지 않으며 오히려 밟을수록 피학적 특성을 지녀 심연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2. 어떤 차별은 더욱더 차별적이다.

민주 사회가 도래하고 평등이라는 인간만의 일념이 전 세계의 모토가 되면서 차별이란 단어는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서양에서는 이에 따라 차별적 단어들을 중립적 단어로 바꾸는 운동 또한 일어나고 있으며 명시적 제도를 개정해 나가며 관습적 차별에 대해 대응하고 있다.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미국의 가장 큰 대기업조차 평등의 흐름에 편승하고 있으며 제도적 개선이 문화적 개선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은 차별에 대한 혐오가 기능하게 되는 기제가 되었다. 다만, 어떤 평등은 결국 어떤 차별이라는 이중적 특성을 사회가 고려하지 못한 것이 문제가 되었을 뿐이다.

이는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과 《1984》 같은 대표적 작품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주제이기도 하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더욱 평등하다.’, ‘자유는 예속, 전쟁은 평화, 무지는 힘.’ 이러한 문장은 언어의 이중성을 전면으로 내세우며 사고의 이중성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논리 구조이다. 완벽한 평등이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에서 평등은 일종의 차별이다. 평등에 속할 수 있는 사람만 평등하며 평등 사회에 속하지 못한 사람은 차별받게 된다. 간편하게 종교적 믿음을 예로 들자면 믿는 자는 구원받고 믿지 못한 자는 지옥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다르다면 평등할 수 없다.

평등할 수 없는 사회에서 평등을 외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차별을 인정하는 것은 정답이 아니다. 차별은 없애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합의를 통해 주어졌을 때 평등해진다. 뒤집을 수 있는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 그 권리의 구조는 절대적이지 않다. 다양성의 시대에서 차별의 기준은 그 다양성만큼이나 무한하기 때문이다. 평등해지는 지점이 무한해진 만큼 차별의 지점도 무한해지는 것이다. 지점이 무한해지는 것은 <참교육>의 시점에서는 무한한 소재나 마찬가지이기에 작가로서는 자극의 역치가 올라가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 점점 더 크고 자극적인 주제를 건들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된다.

이 무한성을 띠게 된 사회 구조를 해결하려면 무언가 복잡한 해결 방식이 필요한 것처럼 보이지만 <참교육>은 웹툰의 특징을 살려 최대한 시각적인 자극을 통해 해결하고자 한다. 바로 절대적 무력이다. 나화진을 필두로 한 교권보호국은 한 명 한 명이 일당백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 주요 캐릭터들이 작가의 가치관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작품의 논리 구조는 상당히 일차원적이다. 학생 가해자들에게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하고 폭력으로 해결하려고 들며, 학부모와 교원 가해자 또한 그다지 정교하지 않은 논리로 해결하고자 하는 것은 놀랍게도 대중성을 완전히 저격했다. 폭력과 부조리를 해결하기 위한 복잡한 논리와 가해자에 대한 과한 옹호가 있었다면 <참교육>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과감함은 작품의 가장 큰 무기였지만 그 거대한 무기에 자신이 깔릴 줄은 몰랐을 것이다. 어떤 차별은 어떤 차별보다 더 차별적이기 때문이다. 백인 황인 혼혈계인 한국계 미국인이 당한 차별은 흑인 황인 혼혈계인 아프리카계 한국인보다 덜 중요한 것이 되었다.


[ 그림 2, 참교육 125화 혐오 표현들 - 이미지 출처 TWIG ]


대중들은 작품에 등장한 Y워드보다 N워드에 더 관심을 가졌다(1). 엄밀하게 따지자면 차별을 비교하는 것은 형용모순이다. A차별과 B차별 중 A차별이 더 차별적이라고 판단하는 순간 B차별이 더 쓸모없는 차별이라고 차별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평등주의자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이 차별주의자인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단지 위선과 기만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실존주의식 악당이 되기 때문이다. 사르트르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기만이야말로 세계의 적이라고 언급한 이유는 삶이 이중성을 띨 수밖에 없으며 그 선택에 오로지 자신이 책임을 통감하며 행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서양에서 인종차별을 가장 혐오하지만, 인종차별이 가장 심각하게 자행되고 있는 지역 또한 서양이다. 민족주의라는 개념이 발생한 지역에서 인종차별을 해결했다고 하기에는 그것 또한 형용모순이다(2).

작품은 무례를 범한 것과는 다르다. 차별 언어를 차별 대상에게 쓰는 것은 분명히 무례이다. 그것은 실제로도 있는 일이다. 실제로 사용되었을 때 대부분의 경우 그 차별의 의도를 오로지 담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작품은 아니다. 허구로 그러한 무례를 저질렀을 때 그것은 어떤 작가의 의도가 내포된 것이며 추후에 그러한 차별이 발생하는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 일반적인 방식이다. 기존 무례한 언급들에 대해 반발을 이겨내다가 인종에서는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은 것을 생각하면 무례와 권력은 어떤 관계에 있나 파악해야 한다.

Y워드보다 N워드에 서양권에서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는 점에서 서양 독자들은 스스로 동양인을 차별하는 차별주의자라는 모순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3). 이러한 사건이 벌어진 이유는 어떤 사태를 고려할 때 맥락을 배제하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참교육>에서 페미니즘 익명 커뮤니티와 같이 확정되지 않은 사건조차 함부로 다루었으며 작가 본인이 위험할 수도 있는 사이비를 건드렸다는 점에서 스토리 작가의 대담함은 엿볼 수 있다. 심리까지는 짐작하지 못하겠지만 차별을 차별 없이 대한다는 점에서 그 맥락이 인상적일 수밖에 없다. 모든 차별을 건든다는 점에서 <참교육>은 역설적으로 평등하다. 


3. 차별을 뛰어넘기 위해서

어디까지가 차별이고 어디까지가 평등인지는 절대적으로 정의될 수 없다. 그것을 절대적으로 정의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역설이기 때문이다. 역설을 통한 사회 정의의 재구성은 샌델이 가장 좋아하는 논의 방식이기도 한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제논의 역설이나 더미의 역설과 같이 구분 짓기 어려운 지점을 꺼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종을 구분 짓는 것은 백, 흑, 황으로 짓는데 아시아 황인종 사이에서도 극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간의 차별이 존재하며 극동아시아 안에서도 중국과 한국 사이에 인종차별이 존재하는 것처럼 차별의 지점을 스펙트럼으로 따지면 끝이 없다. 이 끝없는 차별에는 결국엔 어떤 차별은 정당하다는 기저가 깔려있다. 차별에 민감할수록 더욱 차별하는 것이다.

정당한 차별은 존재하는가에 대한 《왜 도덕인가》의 샌델의 대답은 ‘그렇다’이다(4). 이것은 샌델이 차별주의자라서가 아니라 결국엔 차별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에 우리가 놓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을 인정하는 방법은 바로 대상을 응시하고, 호명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부르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하나의 지표다. 대상을 언급하지 못하는 것을 금기어라고 부른다. 이 금기어는 권력과 공포의 대상이다. 대표적으로 알려진 것은 앞서 조선 시대의 왕 이름뿐만 아니라 <해리포터>의 볼드모트, <반지의 제왕>의 사우론 등이 있다. 현실에서든 문학에서든 언급하지 못하는 것은 곧 권력이다.


[ 그림 3, 마이클 샌델의 '왜 도덕인가?' ]


<참교육>의 행보가 멈춘 것은 어떤 차별은 어떤 맥락에서든지 금지되었다는 증거가 되었다. 실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 언급하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어디선가 보았을 것이다. 입막음 되는 사회는 건강하지 못한 사회인 것은 분명하다. 폐쇄된 사회가 보통 그러하다. 우리는 언급할 수 있는 사회가 곧 평등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어쩌면 <참교욱>은 세계에서 가장 예민한 차별에 대해 언급한 것일 수도 있다. 어떤 차별은 다른 차별보다 더욱더 차별적이니 말이다. 차별 언어들을 대상에게 언급하는 것은 무례한 것이 맞다. 무례함이 우리 삶에서 다양한 차별 언어로 등장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차별을 해결하는 것은 차별을 우리가 직시하여 해체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라캉은 응시가 대상에 대한 권력을 넘어 응시하는 주체의 욕망을 드러낸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차별의 너머에도 차별하는 대상의 심연이 깔려있을 것이다. 그것을 바깥으로 드러낼 때 차별은 플라톤이 말하는 진실의 빛을 받고 쓰러지게 될 것이다. 앞으로의 모든 차별들 또한 그런 식으로 말함으로써, 말해짐으로써 암묵적인 차별에서 벗어나고 해체되어 힘을 잃기를 희망한다.


(1) 인종차별과 관련된 단어는 각 단어의 초성만을 사용하여 X워드라고 표현한다.

(2) 최근 통계에서 대한민국이 인종차별 통계에서 9위를 차지했다는 기사가 있는데 이는 민족주의보다는 국가주의에 가깝다. 중복 응답임에도 불구하고 9가지 사유 중 1~5위까지는 모두 언어와 국가에 대한 사유였다. 그 뒤로 6~9위까지가 민족주의와 관련된 사유라는 점에서 민족과 관련된 차별이 주된 사유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http://www.welfare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73235 

(3)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14197111?sid=103, https://twitter.com/rinstarrr/status/1701018581608095751?t=4HW1CAUEEBIe3Faf9gEvcA&s=19 참조

(4) 마이클 샌델 『왜 도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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