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메뉴
아카이브
웹진
이용안내

칼럼

초기화
글자확대
글자축소

<타인은 지옥이다> 재난이 타인을 만날 때, 혹은 방식에 관해

지옥,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통해서 본 타인과의 관계 속 고민의 순간들에 대해

2024-03-04 수차미

사르트르는 타인을 지옥이라 말한 바 있다. 타인에게서 자신을 발견하고, 또 비교하게 되므로 타인은 나 자신을 지옥으로 이끄는 장본인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를 껴안을 수 있는 것 또한 타인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껴안을 수 없기에 항상 타인에게 다가서고, 또 의존한다. 우리는 타인에 의해서만 ‘나’를 확답받기에 지옥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다. 내가 생각하기에 지옥을 말하는 방법은 그러한 두 갈래가 있다. 첫 번째가 일반 명사로서의 지옥, 타인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한 곳이라면 두 번째는 보통 명사로서의 지옥, 오직 타인만을 믿을 수 있는 곳이다. 최규석의 <지옥>은 정확히 첫 번째 지점에서 출발하지만 두 번째 지점으로 안착한다. 작품의 시즌1이 ‘고지’를 두고 벌어지는 설전을 다룬다면 시즌2는 그런 고지의 대상자들이 돌아오는 일을 다룬다.

작품 내에서 ‘고지’란 대개 다음처럼 이루어진다. 허공에 거대한 얼굴이 나타나 “몇날, 몇시, 너는 지옥에 간다.”라는 식의 이야기가 이루어지고 나면 당사자는 공포에 빠진다. 죽음이 확정되었다는 점 이외에도 자신에게 벌어지는 ‘이런’ 일의 이유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연상호의 단편 애니메이션 <지옥: 두 개의 삶>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본래의 주제의식을 그대로 이어받는다. 우리가 공통되어 살아가는 현실이 바로 지옥이라면, 여기엔 두 종류의 삶이 있다. 고지를 받는 순간이 나머지 삶을 불투명하게 만들어 버린다고 말하는 이가 있고, 고지를 받는 순간 자체가 불투명하니 믿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 자기가 살아가야 하는 곳을 타인의 현실로 이해해보려는 사람이 있고, 타인의 현실에서 자기만 쏙 빼놓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이른바 이 작품에서 지옥은 ‘고지’를 받은 이들이 가는 곳이 아니라, 생각이 다른 우리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다. 이 말을 따라가면 우리는 삶이 하나의 지옥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은 어쨌거나 지옥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최규석의 이 작품에서 흥미로운 점은, 그동안 비교적 현실 세계의 문제에 가까웠던 점들이 세계 일반의 문제로 확장되었다는 점이다. 이 작품은 <송곳>처럼 현실 세계의 문제를 콕 찝어 설명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지옥’이라는 말을 보통명사화하며 지옥에 대해 설명하기보단 서로 부대끼는 이들의 모습에 집중한다. 지옥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우리 모두의 현실임에도 이를 마치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이해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선택을 하는 자신 또한 살아가는 세계의 일원임에도 그런 선택에서만큼은 자신이 예외일 수 있다고 믿는다. 


 

전작이었다면 군상극이었겠지만, <지옥>은 이들 간의 어울림과 껴안음에 대해 말한다. 시즌1의 정진수 의장은 수십 년 후의 미래를 고지받고서 자신이 놓친 것들에 대해 골몰하는 삶을 살게 됐다. 그는 고지의 순간에서 인생의 나머지 모두를 맞바꾸었고, 말하자면 하나를 위해 전체를 희생한 삶을 살았다. 정진수는 자신의 삶이 선행으로 가득했던 건, 전체를 희생해 불행인 하나를 이해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한다. <지옥>에서 지옥의 의미는 이처럼 하나와 전체의 관계로, 모든 것을 잃더라도 하나를 구하던가 아니면 하나를 잃고서 모두를 구할 수만 있다면 좋겠다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이 서로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는 점이다. 모두가 다른 세상을 살아간다면 구해야 할 것도, 버려야 할 것에 대한 합의가 마땅히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지옥>의 시즌1에서 새진리회는 박정자의 고지를 생중계함으로써 힘을 얻는다. 고지가 미디어를 통해 중계될 때 믿음의 약한 연결고리는 미디어의 밈적 전파에 결합한다. 고지의 본래적 의미는 사라지고 지옥에 끌려간다는 이미지만 강조된다. 이로 인해 세간은 고지에 대해 생각하기보단 고지와 얽힌 무언가, 그런 것들에 대한 부채의식만을 안고 살아가게 된다. 이처럼 <지옥>의 세계에서 고지는 삶의 모든 순간에서 개인을 억압하는 기제가 된다. 고지는 모든 것에 적용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모든 것을 놓치고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 그런데 시즌2에서 죽었던 박정자와 정진수 의장이 살아나면서 지옥은 이제 살아있는 자들의 것만이 아니게 된다. 죽었다고 여겨졌던 이들에게 직접 진술을 들을 수 있게 됨으로써 ‘죄’는 이제 당사자들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판도라의 상자처럼, 이제 죄는 세상에 풀려나고야 말았다. 

고지에서의 부활은 당사자가 생전에 겪었던 여러 고통을 영겁의 시간으로 보낸 후 다시금 현실에 추방되는 형태로 묘사된다. 즉, 이들이 지옥에 갔을 때 주변인물이 고통받았다면 이제는 반대로 지옥에서 돌아온 이가 고통받게 된다. 이른바, 이 작품에서 고지는 현실에서 지옥으로 추방하기보다 다시 현실에 돌아와 그런 고통을 안고 살아가야만 한다는 점에서 더욱 고통을 주는 것 같다. 여기서 핵심은 ‘지옥’이라는 말을 마치 우리들 현실 ‘바깥’에 있는 것처럼 여겼던 일이 더는 불가능해졌다는 점이다. <지옥>의 시즌2는 우리가 ‘지옥’이라는 말에 대해 생각하는 일에서 우리를 예외적일 수 없게 한다. 지옥은 고찰이나 사유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바로 이곳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이 주제의식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다. 


 

웹툰 <유쾌한 이웃>을 각색해 만들어진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그 소재나 형식 면에서 독립된 세계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우선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아파트를 소재로 했다는 점에서 한국형 공간을 획득함과 동시에, 작품의 무대를 아파트 단지와 그 주변에 한정 짓는다. 재난이 벌어진 자리에 홀로 남은 황궁아파트는 이들 세계의 바깥을 지워버린다. 황궁아파트는 삶의 유일한 현장이 되고 그와 동시에 세계를 지옥으로 둔 장소가 되어 버린다. 아파트 주민들은 바깥 세계가 지옥이라고 말하면서 아파트에서 쫓겨나기 싫으면 ‘활동’에 열심히 참여하라고 말한다. 아파트의 주민들은 바깥 세계 주민을 바퀴벌레 취급하며 자신들의 지위를 숭상하고, 자기들의 세계를 아파트에 국한하면서 서로를 감시한다. 이제 아파트는 서로를 가두어 둔 지옥이 되고야 만다. 

황궁 아파트의 주민들은 아파트에 전입신고를 해야만 주민이라고 말한다. 이를 통해 자원은 한정된 인원에게 적절한 방식으로 배분되는 듯 보이지만 이로 인해 구축된 상호감시체계는 오히려 이들의 삶을 감옥처럼 만들어버린다. 결국 타인과 함께 부대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 공간은 서로를 감시하고, 미워하게 되는 지옥이다. 이 영화에서 행정적인 처리는 타인을 규격화하고, 벽을 세움으로써 자신을 유지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그러나 바깥으로부터 안전하다는 말은 내부에 적이 있을 때 무색한 게 되고 말며 여기서 지옥을 구분 짓는 정의들은 와르르 무너진다. 이들은 자신의 세계를 자발적으로 헌납했고 그 대가는 세계의 붕괴로 이어졌다. 이제 세계를 구성하던 마지막 믿음이 무너져버렸고, 주민에게는 지옥에 떨어지는 형벌이 찾아온다. 

아파트의 방어선이 무너지는 후반에 주인공 부부는 바깥 세계로 쫓겨난다. 이때 그들은 그토록 경멸해 하던 타인에 대한 정의가 뒤바뀌는 경험을 한다. 벌레 취급했던 부랑인들은 오히려 안과 밖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에 같은 대우를 해주었다. 즉, 이들에게 타인이란 나 자신이었다. 이들은 세계가 알 수 없게 된 만큼이나 자신도 알 수 없게 되어버렸으니 서로를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면에서 나 자신은 타인의 또 다른 판본이기도 하기에, 타인에 다가서는 일은 자신을 끌어안는 일이기도 했다. 이처럼 <지옥>의 시즌2와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이야기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지옥이라 말한다. 이들 작품은 우리가 삶이 지옥이 되었더라도 끌어안아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을 낯설게 하는 이들에게서 지옥은 서로를 껴안는 방식으로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위의 두 작품이 살아가는 현실을 지옥에 빗댄다면, 두 개의 현실을 가정하며 지옥을 보여주는 작품도 있다. 고다의 <평행도시>는 평행세계에서 자신을 찾아온 인물로 시작된다. 좀비 아포칼립스가 도래한 평행세계는 지옥이 되어버렸고 그들은 차원이동기구를 이용해 ‘나’의 세계로 탈출한다. 이 만화는 평행우주와 좀비물, 그리고 ‘나’의 파쿠르 실력이 주가 되지만 무엇보다 흥미로운 건 이들이 살아가는 지옥과도 같은 세계이다. 먼저, 작품은 평행세계에서 넘어온 이들이 본세계의 인물을 살해하는 일을 보여준다. 한 세계에 같은 인물이 두 명이나 있어서는 안 되므로 평행세계는 본세계를 죽이려 든다. 이 과정에서 작품은 평행세계의 좀비 바이러스가 본세계로 넘어왔다는 점을 예고하며, 세계를 구하려면 백신이 개발된 바로 그곳으로 떠나야 함을 보여준다. 

이는 지옥이 현실에 침범해오는 것과도 같아서 재난의 한 속성을 연상케 한다. 어느 날 갑자기 닥쳐오는 일을 우려하는 게 인간의 속성이라면, 이에 대한 대비는 필수적일 것이다. 모든 게 같지만 좀비 아포칼립스가 먼저 닥친 평행세계는 본세계를 대비시킨다. 본세계의 인물들은 평행세계를 두고서 ‘우리의 미래였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이는 곧 현실이 되고야 만다. 다만 평행세계와는 달리 본세계에는 아직 죽지 않은 이들이 있다. 본세계는 바이러스가 퍼지기 전이라는 점에서 아직 기회가 남아있다. 그런 점에서 평행세계는 일종의 대체현실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형이 죽은 본세계과는 달리 평행세계에는 형이 살아있다. 이 현실은 그야말로 산자의 지옥이었지만, ‘나’는 그런 세상에 살아있는 형을 보며 생각을 바꾼다. 어쩌면 형이 죽은 본세계야말로 지옥인 건 아닐까, 하는 고민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하지만 평행세계의 형은 D와 ‘나’의 관계처럼 본세계와는 다르다고 보아야 한다. 평행세계는 모든 게 같아 보이지만 모두들 타인에 불과하며 ‘나’도 그 사실을 잘 안다. 평행세계의 D가 지옥에서 돌아왔다면 본세계의 ‘나’는 그런 지옥에서 타인을 발견한다. 평행세계의 인물들이 지옥에서 탈출할 때 ‘나’는 형이 없는 현실이야말로 진정으로 지옥이라는 점을 깨닫는다. 즉 ‘나’에게 지옥은 좀비가 창궐한 현실이 아니라 아무런 타인도 없이 홀로 남아버린 고독한 세계이다. 그래서 ‘나’는 타인이 되기를 선택한다. 어디에도 없는 현실을 끌어안으려면 스스로가 타인이 되어야만 한다. 다른 한편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도 비슷한 이야기를 다룬다. 평행우주의 스파이더맨이 모이는 장소가 있고, 주인공이 이에 방문한다는 설정은 ‘나’의 여러 판본을 보여준다. 여기서는 모두가 자신이면서도, 타인이기도 하다. 


 

스파이더맨들의 우주는 기본적으로 평행우주를 다루면서도, 그들 모두가 ‘캐넌 이벤트’를 겪는다는 점에서 모두가 본세계라고 말한다. 모두가 같은 슬픔을 안고 있는 상황에서는 ‘타인’의 정의가 애매해진다. 사실 타인을 위로하여 공감하는 일은 그를 자신처럼 여겨야만 가능하기도 하다. <어크로스>는 앞서 다루었던 작품들처럼 지옥의 정의를 전체에 확장하지만 타인을 규정하는 방식에서 다르다. <평행도시>가 타인을 다루는 문제라면 <어크로스>는 타인이 되는 문제를 다룬다. <평행도시>가 타인을 자신과 다르지 않게 여기는 일에서 출발한다면 <어크로스>는 타인이 되어버린 자신에서 출발한다. ‘나’는 자신을 물었던 거미가 사실은 평행세계에서 본세계로 넘어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로 인해 스파이더맨이 돼야 할 평행세계의 ‘나’는 일반인으로 전략해버렸고 이를 따라 평행세계는 스파이더맨을 잃었다. 

<어크로스>의 후반부에 ‘나’는 본세계와 같지만 왠지 모르게 달라 보이는 평행세계를 방문한다. 본세계와는 달리 아버지가 죽었고, 자신이 지키던 ‘안전한’ 뉴욕이 여러 범죄집단에 의해 지옥으로 변해있는 걸 목격한다. 이른바 <어크로스>의 지옥은 그 누구도 아닌 자신에 의해 만들어졌고, 자신이 될 수 있었던 ‘나’는 타인이 되고 말았다. 이곳은 모두가 자신을 생각하고, 타인을 믿지 못하기에 지옥이 됐지만 ‘나’는 그런 타인들 모두를 자신처럼 여겨야만 이 사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다. 무엇보다 자신이 될 수 있었을 현실에 대해 ‘나’는 지옥의 어떤 판본을 목격한다. 세계에서 정체를 숨긴 채 살아가야만 하는, 자신조차 그렇게 여기는 이 세상에서 ‘나’는 지옥도 그렇게 속일 수 있다고 믿는다. 비록, 여기가 지옥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를 ‘나’처럼 여김으로써 숨기며 살아갈 수 있다고 말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태어난 곳과 살아가는 현실을 바꿀 수 없다. 그러니 그곳이 지옥이라 느낀다면, 그런 현실을 바꿀 수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지옥을 타인처럼 대하는 게 아니라 자신처럼 여김으로써 이를 극복한다. 사르트르의 말은 타인으로 인해 세상이 망쳐졌다고 보는 게 아니다. 타인은 끌어안음에 관한 한 가지 형식이다. 이따금 자신에 대한 불확실함은 나보다 더한 타인에게 투신하곤 하지만, 바꾸어 말하면 삶이 바닥에 떨어질 때 우리를 구원하는 건 타인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나는 우리가 서로를 지옥으로 여겨야만 한다고 믿는다. 지옥은, 서로를 껴안을 때 비로소 삶이 되니까. 삶의 형태는 다양하더라도 지옥의 모습은 하나라고 말하기보단, 지옥의 모습은 다양하지만 삶은 하나라고 말해두고 싶다. 바로 그렇기에 우리가 삶을 끌어안을 수 있노라고도 덧붙이고 싶다. 



필진이미지

수차미

< 만화평론가> 
* 2019 만화영상진흥원 만화평론상 신인 부분 
* 2019 한국예총 평론상 영화 부문
* 2020 서울시립대 영화평론 공모전 대학원생 부문
* 2024 부산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
* 저서 『안녕하세요 오즈 야스지로』,『포스트 시대의 영화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