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메뉴
아카이브
웹진
이용안내

칼럼

초기화
글자확대
글자축소

양판소(양산형 판타지 소설) 시대의 웹툰화로 보는 한국형 [판타지]의 과거와 오늘

노블코믹스 시대 속에서 한국형 판타지 장르의 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2024-03-21 은천화

소설의 웹툰화는 2023년의 기준으로 봤을 때 낯선 일이 아니다. <재벌집 막내아들>, <전지적 독자 시점>, <판사 이한영>,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사표 내고 이계에서 힐링합니다>, <화산귀환> 등 대부분(혹은 100%) 회귀물이나 혹은 이세계물이지만 이 모티프가 최근 몇 년 동안 인기 있는 모티프이고, 소설에서 인기를 끌어 웹툰화된 것은 명확하다. 웹소설이 등장하기 전 국내에서 판타지 소설은 보통 만화방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물론 최근 만화카페에서는 잘 찾아볼 수 없지만 이전 만화방에서는 만화책뿐만 아니라 비디오나 DVD, 무협, 퓨전, 게임 등의 판타지 장르의 소설책을 함께 대여했었다. 대여점에서 소설과 관련해서는 해외 작품보다 국내 작품이 더 많았기에 만화책을 빌려보던 사람들은 만화와 함께 한국의 판타지 소설 정도는 꿰고 있었다. 국내 장르 소설을 많이 읽어본 독자들이라면 현재 한국과 일본에서 대유행하고 있는 회귀나 이세계물에 식상함을 느낄 수도 있다. 그 정도로 2000년대 초는 수많은 장르의 소설들이 등장했던 시기였다.

그중에서 인기를 끌던 대표적인 작품들이 있다. 무협에서는 <남궁세가 소공자>, <비뢰도>와 <묵향>, <하오대문> 등이 있고 판타지에서는 두말하면 입 아플 이영도나 전민희의 작품부터 <SKT>, <더 로그>, <정령왕 엘퀴네스>, <영웅&마왕&악당>, 한국식 판타지에도 <퇴마록>과 같은 유명 작품이 있으나 한국형 판타지의 꽃은 의외로(?) 게임 판타지이다. <달빛조각사>부터 <싸울아비 룬>, <아크>, <대장장이 지그>, <더 로드>, <다크 프리스트> 등 현재 나오는 게임 판타지들의 원류는 1999년에 출간된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이다.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 이후 우후죽순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이후 2000년대 초중반부터 수없이 많은 게임 판타지 작품이 쏟아져 나왔다. 이는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일인데 게임에 대한 문화가 지대한 것 때문인지, 이러한 양산형 플롯이 책 대여점의 유행과 맞물려 시너지를 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런 유행은 웹툰이 대유행하며 책 대여점이 쇠퇴함과 함께 웹소설로 옮겨갔다. 웹소설로 이사하며 살아남은 20년 전의 판타지 소설들은 웹툰의 성장에 편승하여 2010년대 중반부터 웹툰화를 시작했다.


[ 그림 1, 좌) 묵향, 우) 달빛조각사 ]


오래된 작품들을 웹툰화한다는 것은 쉬운 도전은 아니다. 현재 15년 이상 된 장르 소설 중 웹툰화가 된 대표적인 작품을 꼽자면 <비뢰도>, <묵향 : 다크레이디>, <달빛조각사>, <SKT> 등을 들 수 있다. 카카오 플랫폼에서 연재하는 작품들을 살펴보면 <비뢰도>의 경우 실시간 랭킹 7~8위에 머물고 있으며 현재 사실상 연재 중단인 <달빛조각사>도 연재 당시에 최고의 인기를 끌었다. <묵향 : 다크레이디>도 준수한 성적을 거두며 연재 중이니, 예전 판타지 소설이라고 해서 현재 웹툰계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네이버에서 연재 중인 <영웅&마왕&악당>은 요일 순위 중하위권에 머물고 있으며, 2023년도 9월에 새로 연재를 시작한 <SKT>는 요일 순위 하위권에 머물고 있어 카카오 플랫폼에서 연재하는 작품들에 비해 순위가 많이 떨어진다.

이러한 차이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플랫폼의 차이이다. 웹툰 플랫폼마다 독자의 연령층이 다른데 2022 만화산업백서에 따르면 연령별 플랫폼 사용 비율을 중복 조사했을 때 네이버는 10~20대가 92% 정도로 연령대 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카카오 페이지에서는 30~40대의 사용 비율이 38% 정도로 연령대 중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 이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추론하면 15~20년 전 연재하던 소설을 많이 아는 것은 30~40대일 것이며 자연스럽게 카카오 페이지에서 연재하는 소설 원작 웹툰의 원작에 대해 더 잘 알 것이다. 그에 비해 네이버는 30~40대에 비해 웹툰의 원작 소설을 잘 모르는 10~20대가 더 많으므로 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그림체 또한 인기에 영향을 주는데 최신 웹소설 원작 <화산귀환>, <광마회귀>, <전지적 독자 시점>과 같은 작품들은 그림체가 화려한 액션에 어울리고 세련되었지만, 네이버에서 연재하는 <SKT>, <영웅&마왕&악당>은 로맨스 만화 그림체에 가까워 액션신이 나올 때마다 아쉬울 수 밖에 없다. 그에 비해 카카오 페이지의 <묵향 : 다크 레이디>의 경우 무게감 있는 그림체와 이에 걸맞은 액션신이 인상적이다. <비뢰도>는 그 무협에 개그가 가미된 것을 살려 그 가벼운 분위기에 맞는 그림체로 액션신을 소화한다. 판타지나 무협 소설을 웹툰화하면서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 주인공에 대한 원작에 가까운 묘사 다음으로 액션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액션을 소화하는 그림체는 중요하다. 네이버와 카카오가 추구하는 방향이 다른 이상 소설의 웹툰화에서도 이러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또한 오래된 소설들을 웹툰화할 때 기존에 소설을 읽은 독자층과 읽지 않은 독자층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최신 웹소설이 웹툰화되었을 때에 비해 예전 소설이 웹툰화되는 것은 댓글 창에 스포일러가 훨씬 적은데 읽었던 독자들이 15년 전에 읽은 소설의 내용을 기억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반쯤 새로운 자세로 웹툰을 보게 되고 장면을 보며 이전에 읽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회상과 함께 작품을 즐기게 된다. 원작 소설에 대한 흐릿한 정보가 웹툰을 통해 다시 채워지는 것은 기존 독자라면 환영할 일이다. 기존 소설 독자들은 원작의 반영도를 꼼꼼하게 보는 웹소설 기반 웹툰과 다르게 소설 반영 여부에 대해서도 꽤 관대하다. 중심인물에 대한 캐릭터성만 잘 살려준다면 어느 정도의 각색도 충분히 넘겨준다. 이때 캐릭터성에는 인물의 성격뿐만 아니라 외적 이미지 등의 종합적 이미지가 포함된다. <비뢰도>에서 비류연의 이미지가 그렇다고 할 수 있는데, 작품 세계관 상 예쁘장하지만, 머리로 그 외모를 가리며 이기적인 것처럼 보이면서도 계산적으로 상대방과의 관계를 이어나가는 것은 그 가벼운 그림체에도 불구하고 원작 소설의 캐릭터가 살아난 듯하다.

그런 면에서 <SKT>의 웹툰화는 조금 아쉬울 수밖에 없다. 주인공 엔디미온의 여리고 얇은 느낌은 두꺼운 눈썹에 가려졌고, 보호해 줘야 할 것 같은 얼굴은 둥글둥글한 귀염상으로 바뀌어 다른 의미로 보호해 줘야 할 얼굴이 되어버렸다. 멀대처럼 크고 나른한 느낌의 세자르는 곰 같은 몸과 강아지 같은 얼굴이 합쳐져 애교 넘치는 ‘베이글남’이 되어버렸다. <마법사, 무림에 가다>와 같은 전통적인 느낌의 퓨전 판타지는 그 전통적인 그림체가 좋은 것에 비해 각색이 영 힘을 쓰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하나씩 살펴본다면 카카오 페이지(이전 다음 웹툰)가 30~40대로 10~20년 전부터 다음 웹툰을 보던 연령을 주 독자층으로 잡는 만큼 예전 소설에 대한 각색은 네이버에 웹툰에 비해 뛰어나다고 말할 수 있다.


[ 그림 2, 좌)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SKT), 우) 비뢰도 ]


새로 유입된 독자들을 고려한다면 장르 자체의 진입 장벽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원작 소설을 모른 채 본다면 <묵향 : 다크레이디>와 같은 설정이 많은 작품에는 장벽이 있겠지만 <달빛조각사>나 <대장장이 지그>와 같이 익숙한 게임 판타지는 원작 소설과 별개로 누가 봐도 재밌게 볼 수 있다. 이러한 게임 판타지의 형식은 시간이 지날수록 세분화되고 변모해 왔다. 한국식 게임 판타지의 흐름은 캡슐이나 헤드셋을 사용하여 RPG 게임 세계로 뇌가 온라인으로 접속하는 방식에서 게임의 시스템이 현실에 적용되며 던전이나 탑이 등장하는, 이세계가 현실세계로 접속하는 방식으로 바뀌어 갔다. <디펜스 게임의 폭군이 되었다>와 같이 RPG가 아닌 디펜스 게임으로 주인공이 들어가는 예도 있다.

일상 세계에 ‘상태창’과 같은 게임 시스템이 적용된다는 점에서 게임 판타지의 장르적 벽이 허물어졌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게임 판타지 웹툰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거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그 이유는 그림 작가가 글까지 맡기엔 게임 판타지의 설정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게임 판타지 웹툰은 원작가, 각색 작가, 그림 작가가 따로 있는 경우가 많다. <나 혼자 만렙 뉴비>, <전지적 독자 시점> 등 이세계와 게임 시스템이 현실 세계에 덮어씌워지는 한국형 이세계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현재의 판타지 및 무협 웹툰들은 시스템과 회귀에 100% 의존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전의 소설들은 이러한 간편한 설정인 시스템과 회귀에 의존하지 않는다. 캐릭터의 객관적 지표가 목표가 아닌 사람들과의 관계라는 인간적인 스토리라인이 목표라는 점에서 하나의 작품으로 바라볼 때 이전의 양판소(양산형 판타지 소설)로 불리던 작품들은 현재의 양판웹(양산형 판타지 웹툰)과 비교했을 때 생각보다 더 작품성이 좋다.

조금씩 예전 소설들이 웹툰화가 되어가는 과정은 그래서 걱정 반 기쁨 반이다. 판타지계의 거장으로 꼽히는 이영도나 전민희 작가의 작품은 게임에 차용될 만큼 거대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만 함부로 웹툰으로 다루지 못하고 있다. 소설 한 권을 연재하는데 속도 별로 차이가 있겠지만 <달빛조각사>의 경우 거의 휴재 포함 3년 동안 겨우 5권에 그쳤다. 이영도의 <~마시는 새> 시리즈나 <드래곤 라자>, 전민희의 <룬의 아이들>을 웹툰으로 연재하려면 하나의 스튜디오가 달라붙어도 모자랄 것이다. 앞으로 어떤 소설들이 웹툰화될지 모르지만 양산형 웹툰이 늘어난다는 것은 나쁜 일만은 아니다. 웹툰 하나하나가 텍스트가 되어 어떤 문화적 세계를 완성하는 시스템적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 그림 3, 좌) 드래곤라자, 우) 룬의 아이들 ]



작품들이 쌓일수록 한국형 판타지의 세계관이나 설정이 더 탄탄해지고 하나의 시스템으로 작용할 것은 기대되는 부분 중 하나다. 무협 세계관의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가 단단한 시스템으로 작용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의 위대한 작품이 있어서가 아니라 수많은 작품이 세계관을 이루는 하나의 텍스트가 되어 상호텍스트성이 강화되기 때문이다. 판타지·무협과 관련된 탄탄한 시스템이 구축된다는 것은 작가들의 장벽을 낮춰줄뿐더러 설정 놀음에 신경 쓸 것 없이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이야기는 세계를 빌려 쓰는 것이다. 세계를 빌려 쓰는 과정은 세계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분석, 재구성을 통해 가능하다. 옛날 무협 소설들의 경지나 판타지 소설들의 서클 개념을 보다 보면 어떤 하나의 정립된 이론처럼 느껴지는 이유도 그러한 연유에서다.

수많은 이세계 만화가 핍진성이나 현실성 등의 설정 측면에서 무너지는 이유는 이세계라는 시스템에 대해 안일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본 만화 <맛 없는 밥 엘프와 유목생활>로 인해 일본 이세계물에 대한 엄청난 비판이 일었는데, 의식주 중 의주만 발달하고 식문화가 전혀 없는 세계를 상정했기 때문이다. 이 만화를 시작으로 일본 이세계물은 발달이 늦은 문명에 주인공이 현대 문물을 전수하는 식민지배와 같은 설정이 되어버렸다. 현실에서 이세계로 이동하는 한국의 몇몇 웹툰도 이러한 비판에서 벗어나기는 힘들 것이다. 이세계 웹툰은 일반적으로 원작 웹소설이 있으니 웹툰화하는 과정에서 이런 부분에 대해 특히 조심해야 한다.

어릴 때 읽던 소설이 하나씩 웹툰화가 되는 것을 보면 기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원작 소설을 알고 있어 읽는 독자가 상당수를 차지할 것이지만 그 기존 독자들의 홍보를 통해 계속 읽게 되는 독자도 많을 것이다. 원작 소설의 인기가 많았을수록 웹툰의 인기도 높아지겠지만, 마냥 원작 소설의 인기에 기대어서도 안 된다. <달빛조각사>가 처음 연재될 때 여러 면에서 비판받았다는 점은 작품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독자층을 고려하고 원작의 개작 정도를 고려하는 등 생각해야 할 지점이 많다는 것을 시사한다. 옛날의 그 독자들은 웹툰으로 나와준 것만으로 감사하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추억을 되살릴 정도의 원작 특성만 반영해 주면 된다. 옛날 소설을 원작으로 한 웹툰이 자주 나오지는 않지만 그래서 더 적당히 추억을 회상하게 한다. 원작을 재미있게 본 독자로서 조금은 아쉬운 부분들이 보이지만 이런 아쉬운 작품들을 바탕으로 더 나아가 판타지·무협뿐만 아니라 로맨스나 대체역사와 같은 여러 장르가 웹툰화가 되어 장르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기회가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관련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