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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각형 안의 사후판단적 실존: 인스타툰과 현대 매체 존재론의 새로운 지평

인스타툰은 정사각형의 제약 속에서 탄생한 혼종적 매체로, 진정성과 상업성, 현실과 상상을 잇는 새로운 존재론적 예술 형식이다.

2025-11-07 수차미

정사각형 안의 사후판단적 실존: 인스타툰과 현대 매체 존재론의 새로운 지평

인스타툰을 둘러싼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과연 이것이 무엇인가 하는 존재론적 물음이다. 단순히 '인스타그램(Instagram)'과 '웹툰(Webtoon)'의 합성어라는 어원적 설명을 넘어서, 인스타툰은 기존의 매체적 경계를 흐리는 혼종적 형식으로서 새로운 미학적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러한 혼종성은 매체 고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인쇄 매체에서 디지털 매체로의 전환 과정에서 나타나는 중간적 형태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매체적 실천의 출현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혼종성이야말로 인스타툰을 인스타툰답게 만드는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스타툰은 만화의 형식을 빌려오면서도 동시에 SNS의 소통 방식을 체화하고, 정사방형이라는 물리적 제약 안에서 새로운 시간성과 공간성을 창조해내기 때문이다. 만화가 영화를 닮으려 했던 것처럼, 인스타툰은 웹툰과 SNS 사이에서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 그런데 이런 정체성 탐색 과정에서 인스타툰이 발견한 것은 단순히 기존 매체들의 장점을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매체적 경험을 창조해내는 것이었다.

인스타툰의 매체적 특성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정사각형 프레임의 제약이다. 인스타그램의 1:1 비율 제약은 단순한 기술적 한계가 아니라, 압축된 완전성을 추구하는 미학적 조건이다. 정사각형은 기하학적으로 완전한 형태이면서 동시에 가장 제약적인 형태이기도 하다. 세로 스크롤의 무한성을 추구하는 웹툰과는 달리, 인스타툰은 이 정사각형 안에서 모든 것을 완결지어야 한다는 숙명을 안고 있다. 그렇다면 이는 어떤 의미에서 카메라 옵스큐라와도 같은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빛이 너무 많은 세계에 가림막을 두어 적절한 정도로 광량을 축소 및 제한함으로써, 도리어 한 세계를 손안에 '획득'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여러 정보로 넘쳐나는 세상에서는 도리어 어둠 속으로 들어가야만 비로소 한 세계를 손안에 '획득'할 수 있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의 말처럼 어둠 속에서만 반딧불의 명멸을 관측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인스타툰의 시간성은 매우 독특한 양상을 띤다. 최대 20컷이라는 제약 안에서 인스타툰은 선형적 서사와 순환적 독해를 동시에 요구한다. 독자는 첫 번째 컷에서 마지막 컷까지 순차적으로 읽어 나가지만, 동시에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기 위해 이미 본 컷들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특히 반전이나 펀치라인이 있는 인스타툰의 경우, 마지막 컷을 본 후에야 앞의 컷들이 갖는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된다. 이는 결말이라는 것이 무언가 '끝'을 조우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뒤돌아보는 쪽에 더 가깝다는 사실을 확증한다. 결말은 그것이 실제로 발생한 지점보다 이후의 지점에서만 관측되는 사후판단적 개념이다. 모든 이야기는 곧바로 절정부에 진입하지 않는다. 절정부를 더 재밌게 보여주기 위해 풀이되는 숱한 이야기가 전면에 있다. 작가들은 이후의 이야기를 위해 여러 떡밥을 곳곳에 숨겨놓고, 독자는 나중에 가서야 그것이 떡밥이었음을 알아채면서 절정부에 다다른 이야기가 이전까지의 전개 모두를 품는 일을 목격한다.

그렇다면 인스타툰에서 이러한 사후판단적 인식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아무쪼록 인스타툰의 독특한 점은 이런 사후판단적 구조가 단순히 서사적 차원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매체적 존재 방식 자체에 내재되어 있다는 점이다. 인스타툰의 시간성은 순환적이면서 동시에 응축적이다. 짧은 분량 안에서 모든 것을 담아내야 하므로, 각 컷은 최대한의 정보와 감정을 압축해서 전달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생략과 암시의 기법이 중요해진다. 인스타툰은 모든 것을 다 보여주지 않고, 독자의 상상력과 추론에 의존하는 부분이 크다. 이는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이 말한 '반딧불의 명멸'과 닮아있다. 어둠 속에서만 반딧불의 명멸을 관측할 수 있듯이, 정보가 제약되는 일이 도리어 한 개인의 세계를 확장할 수 있다.

그런데 인스타툰의 압축된 시간성은 현대인의 주의력 경제(attention economy)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무수한 콘텐츠가 쏟아지는 디지털 환경에서 사람들의 집중력은 점점 더 짧아지고 있다. 인스타툰은 이런 현실에 대한 매체적 적응이면서 동시에 저항이기도 하다. 짧은 형식을 통해 현대인의 주의력 패턴에 맞추면서도, 그 안에서 깊이 있는 감정적 몰입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찰나에 유도되는 집중력은 인스타툰에 깊은 내용을 담을 수 없게 하는 듯 보이지만, 반대로 짧은 순간에 스쳐 지나갔던 감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분명 이 세계는 볼 것도 많고 들을 것도 많아서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잘 모를 때가 있다. 인스타툰은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고 또 돌아보게 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자신을 성찰하게끔 해준다.

말하자면 인스타툰은 양적 확장보다는 질적 심화를 추구하는 대안적 시간성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20컷이라는 제약 안에서도 독자들은 깊은 감정적 몰입을 경험할 수 있고, 작가와 진정한 소통을 나눌 수 있다. 이는 가속화된 현대 사회에서 지속가능한 창작과 향유의 방식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인스타툰 작가들은 자신의 일상을 소재로 삼지만, 그것이 만화로 재현되는 과정에서 일정한 허구화와 각색을 거친다. 실제 인물은 귀여운 캐릭터로 변환되고, 실제 상황은 과장되거나 단순화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정이 '거짓'이 아니라 '진정한 자기표현'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이다.

이때 진정성(authenticity)이라는 개념이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띤다. 인스타툰의 진정성은 개인에게 국한되지 않고, 인스타툰 영역을 구성하는 모든 이들과 관련된 집합적 정동으로 작동한다. 진정성은 인스타툰 게시물과 댓글 사이를 순환하며 축적되고, 다방향적이고 역동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더 나아가 진정성의 정동은 개별 인스타툰에 앞서 존재하며, 인스타툰이라는 장르 자체를 진정성이 펼쳐지는 공간으로 만든다. 말하자면 진정성은 인스타툰의 존재론적 조건이면서 동시에 그 산물이기도 한 것이다. 이는 마치 『원피스』의 루피가 '기어5'로 만화적인 형태로 등장한 것과 같다. ‘기어 5’는 서아프리카의 ‘조이보이’ 설화를 토대로 사람을 웃게 하고 고뇌에서 해방하는 전사 '니카'를 모티브로 삼는다. ‘기어 5’는 만화적인 묘사를 통해 자칫 심각할 수 있을 감정이나 분위기를 환기한다. 이를 통해 만화는 다른 무언가를 말하기보다 여기 이곳에 있는 자신에 관해 말하게 된다. 즉 만화는 현실에 관한 자신이 아니라 그 무엇도 상대할 수 있는 자신을 만든다.

그런데 이런 진정성의 정동이 단순히 개인적 차원에서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이는 일상의 정치학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인스타툰 작가들이 자신의 사적 경험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그러한 경험이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집합적 경험임을 드러내는 일이다. 가령 여성의 임신, 출산, 육아 경험을 다루는 인스타툰들은 이것이 개별 여성만의 문제가 아님을 전달하고, 섭식장애나 기분장애 경험을 다루는 인스타툰들은 이것이 전문적인 의료 치료가 필요한 문제임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인스타툰의 일상성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기존의 공적 담론이 포착하지 못하는 영역을 가시화하는 정치적 실천이다. 인스타툰에서 일상성은 단순한 소재가 아니라 존재론적 조건이다. 일상툰은 개인의 자전적 에세이에서 더 나아가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실질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실천적 장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는 페미니즘의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명제를 디지털 시대에 맞게 재해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인스타툰의 판형은 매화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도 한발자국씩 앞으로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모두가 나란한 형태로 배치되는 형태를 이룬다. 이는 공적 담론의 민주화로서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은 없다는 가시화를 실천한다. 더 나아가 인스타툰의 일상성은 감정 노동의 가시화라는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전통적으로 사적 영역에 묻혀있던 돌봄, 감정 관리, 관계 유지 등의 노동이 인스타툰을 통해 공적 영역으로 드러나면서, 이러한 노동의 가치와 의미가 재평가되고 있다. 이런 진정성의 정동은 인스타툰에서 일상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가능하게 하고,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개인적 경험들을 가시화하여 문제적으로 만드는 효과를 낳는다. 독자는 우편에서 좌편으로 손가락을 넘기며 직접 이야기에 참여하는 인상을 받는다.

무엇보다 이렇게 자신에 의해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는 일은 마음을 잃지 않는 인물상의 대두를 떠올리게 한다. 가령 우리 시대에 각광받는 주인공상은 '자신을 잃지 않는 인간상'이다. 성선설이든 성악설이든, 중요한 건 그 사람의 본성이 어떤지가 아니라 '어떤 존재로서 남는가'이다. 날 때부터 악한 이가 선을 배우고, 본성을 배반해서 끝내 선을 '연기'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그가 선을 행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맥락에서 인스타툰과 오타쿠 문화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스타툰 작가와 독자들은 특정한 일상적 감성과 취향을 공유하는 오타쿠적 공동체를 형성한다. 여기서 말하는 오타쿠적 주체성이란 무엇인가? 인스타툰 오타쿠들은 무엇이든 엮고 연성하지만, 그것들을 다루는 자기만큼은 확고하고 싶어한다. 소위 덕질을 하면서 땅을 파고들려면 드릴이 있어야 하고, 드릴 비트가 뭉개지지 않으려면 그만큼 심지가 굳어질 수밖에 없다. 바라보는 시점을 고정하는 것이 자기 존재의 불변성을 확보하는 방법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런 오타쿠적 주체성은 단순한 개인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도리어 이는 기존의 정치적 주체성에 대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타자와의 소통이나 합의 형성보다는 자기만의 세계에 대한 충실성을 통해 주체성을 확보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오타쿠 집단에서 발견되는 정치적 행동이나 강령들 -팝업스토어, 굿즈 구매, 팬아트 제작 등- 이 인스타툰 문화에서도 나타난다. 굿즈를 구매함으로써 현실에서도 존재론적인 기반을 확보해두고 싶어 한다. 이처럼 인스타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사회적 평가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몰입한다. 팔로우 문화와 깊이 연결된다는 점에서 팬덤 문화와도 연결되기 때문에 인스타툰은 어떠한 형태로의 지지 행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기존 만화에 비해 매우 정치적이다. 왜냐하면 본래 웹툰 등이 위에서 아래로 스크롤을 내리며 고개를 내리는 등, 기존 사회 질서에 순응하고 받아들이면서 체념하는 쪽에 가깝다면 인스타툰은 기존의 사회적 규범이나 기대에 맞서서 자신만의 가치 체계를 구축하고 유지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인스타툰의 독자가 갖는 오타쿠적 주체성을 단순히 사회적 부적응자나 현실 도피자로 치부할 수는 없다. 도리어 이들은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주체성을 실험하는 존재로 봐야 한다. 이를테면 인스타툰은 기존의 정치학이 상정하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경계를 흐리면서, 개인적 취향과 정치적 실천을 결합시키는 새로운 방식을 모색한다. 인스타툰이 업로드되는 인스타그램은 바로 이런 새로운 정치적 주체성이 발현되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인스타툰의 또 다른 특징은 작가와 독자 간의 직접적인 소통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인스타툰 작가는 인스타그램 스토리의 질문 기능을 이용해 독자와 소통하며, 이른바 '무물'(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코너를 통해 독자에게 짧은 질문을 받고 편하게 답하는 방식을 취한다. 작가가 독자의 댓글마다 대댓글을 달 수 있고, 꼭 작품 내용이 아니더라도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이런 소통 방식은 기존 웹툰 플랫폼에서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웹툰 플랫폼에서 작가와 독자의 관계는 주로 일방적이었다면, 인스타툰에서는 쌍방향적이고 일상적인 관계가 형성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러한 소통이 ‘준사회적 상호작용(para-social interaction)’의 성격을 띤다는 점이다. 인스타툰 캐릭터는 인플루언서로서의 특성을 가지며, 독자들과의 친밀도를 높이며 상호작용한다. 독자들은 인스타툰 캐릭터를 실제 지인처럼 여기고, 그들의 일상에 관심을 갖고 응원하며, 때로는 조언을 구하기도 한다. 이런 준사회적 상호작용은 공감과 위로의 창구가 되기도 한다.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독자들끼리의 소통도 가능해져서, 작가를 매개로 한 독자 간의 관계 형성도 일어난다. 이런 소통 구조는 인스타툰이 단순한 텍스트 소비를 넘어서서 관계적 실천의 장이 됨을 의미한다. 인스타툰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이야기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감성적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공동체는 지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분산되어 있지만, 인스타툰이라는 매개를 통해 느슨하지만 지속적인 연결을 유지한다. 말하자면 인스타툰은 감성적 인프라의 역할을 한다. 이런 감성적 인프라는 개인의 정서적 안정뿐만 아니라 사회적 연대의 기반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인스타툰의 현실과 상상의 변증법적 관계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인스타툰을 논할 때 흥미로운 점은 이것이 현실과 상상 사이의 경계를 흐린다는 것이다. 인스타툰의 내용은 주로 작가의 실제 일상에서 나오지만, 그것이 만화로 재현되는 과정에서 일정한 허구화가 이루어진다. 실제 인물은 귀여운 캐릭터로 변환되고, 실제 상황은 과장되거나 단순화된다. 영화가 항상 무언가에 대한 반-현실로 존재한다면, 인스타툰은 현실과 상상이 뒤섞인 혼재의 공간으로 존재한다. 인스타툰의 캐릭터는 실제 작가를 대변하지만 동시에 독립적인 허구적 존재이기도 하다. 독자들은 이것이 '실제 이야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동시에 '만화적 재현'이라는 것도 안다.

이런 이중성은 인스타툰만의 독특한 매력을 만들어낸다. 독자들은 작가의 실제 일상에 공감하면서도 동시에 만화적 재미를 즐길 수 있다. 현실의 무거움은 만화적 표현을 통해 가벼워지고, 만화의 허구성은 실제 경험이라는 진정성을 통해 무게를 갖는다. 오늘날 인스타툰에 대한 인식은 상상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이미 우리 현실이 끝에 다다랐다고 여기면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두렵거나 힘들 테다. 하지만 상상의 영역을 남겨둠으로써 도리어 이 세상이 아직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지 않았다고 여길 수 있다. 인스타툰은 우리에게 현실을 완충하는 역할을 해준다. 말랑말랑한 꿈이 내린 현실은 두려움이나 아픔을 어느 정도 소화하는 역할을 한다. 이런 완충 기능은 단순한 현실 도피가 아니다. 도리어 인스타툰은 현실을 다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힘을 제공한다. 인스타툰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객관화하고,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며,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는 현실을 더 잘 이해하고 대처할 수 있게 해주는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

아무쪼록 인스타툰의 상상적 현실과 현실적 완충 기능은 서로를 강화하는 변증법적 관계에 있다. 현실이 상상을 통해 재구성되고, 상상이 현실을 통해 구체화되는 순환적 과정이 일어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인스타툰은 단순한 오락거리를 넘어서서 삶의 지혜를 전수하는 매체로 기능하게 된다. 이런 완충 기능은 특히 현대 사회의 스트레스와 불안에 대한 대응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 경쟁 사회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에게 인스타툰은 잠시나마 숨을 고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하지만 이것이 단순한 위안이나 도피가 아니라, 현실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비판적 거리두기의 기능을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인스타툰의 유머와 위로는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더 잘 견딜 수 있는 힘을 기르게 해준다.

말하자면 인스타툰은 작은 저항의 공간을 제공한다. 거대한 사회적 변혁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상 속에서 개인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타인과 연대할 수 있는 미시적 정치의 장을 열어놓는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개인이 무력감과 고립감을 극복할 수 있는 중요한 자원이 된다. 하지만 인스타툰이 직면하는 근본적인 딜레마가 있다. 바로 진정성과 상업성 사이의 갈등이다. 인스타툰의 핵심 가치인 진정성은 작가의 순수한 일상 공유에서 나오는데, 인스타툰이 작가의 주요 수입원이 되면서 광고툰을 연재해야 하는 현실은 이러한 진정성을 훼손할 위험이 있다. 인스타툰 작가들의 주요 수입원은 광고와 브랜디드 콘텐츠다. 꾸준한 연재로 팔로워가 많아지면 기업 마케팅이나 광고 의뢰가 들어오고, 공동구매를 통한 수익도 가능하다. 팔로워 3만 명 이상을 거느린 인스타툰 작가라면 다른 직업을 병행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안정적인 수익을 낼 수 있다고 한다. 최근에는 인스타툰을 활용한 브랜디드 콘텐츠 마케팅 시장도 급성장 중이다.

재미와 친근함을 주는 일상툰의 주인공들을 부캐로 성장시키면서 브랜드의 세계관을 공유하고, 자연스럽게 구매로 연결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방식이다. 펀슈머(funsumer)라고 불리는 MZ세대가 가치와 소비를 동시에 실현할 수 있는 적극적인 콘텐츠 마케팅 전략으로 인스타툰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인스타툰 작가들은 이런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취한다. 광고툰임을 명시하되 자연스럽게 일상에 녹여내거나, 자신이 실제로 사용하는 제품만 소개하거나, 광고툰과 일상툰의 비율을 조절하는 등의 방법을 사용한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익화가 진정성을 훼손한다는 비판은 계속해서 제기된다. 그리고 이런 딜레마야말로 인스타툰이라는 매체가 갖는 존재론적 모순을 보여준다. 인스타툰은 일상의 진정성을 기반으로 하지만, 동시에 자본주의적 플랫폼인 인스타그램에서 작동한다. 진정성이라는 가치 자체가 상품화되는 역설적 상황에 놓인 셈이다.

이런 모순은 인스타툰만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 사회 전반의 문제이기도 하다. 진정성이 하나의 브랜드 가치가 되고, 일상성이 마케팅의 소재가 되는 시대에서 인스타툰은 이러한 현실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매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인스타툰 작가들은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단순하지 않다. 중요한 건 진정성과 상업성이 반드시 대립적인 관계에 있지는 않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다. 진정성 있는 작품이 상업적으로도 성공할 수 있고, 상업적 제약 안에서도 진정성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다. 자신만의 기준과 원칙을 분명히 한다면, 인스타툰은 서로 독자에게 진정성으로 호소할 수 있다. 어떤 광고는 받고 어떤 광고는 거절할 것인지, 어떤 방식으로 상업적 요소를 작품에 통합할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세워야 한다. 이런 기준은 작가마다 다를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 기준을 일관성 있게 적용하는 일이다. 말하자면 진정성과 상업성의 변증법적 종합을 추구해야만 한다.

이제 인스타툰의 형식적 특질을 더 자세히 살펴보자. 인스타툰의 가장 독특한 점은 정사각형 프레임 안의 무한성이라는 역설이다. 이들은 제한된 공간과 컷 수 안에서 무한한 이야기 가능성을 추구한다. 이는 단순히 기술적 제약의 결과가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미학적 실험이다. 정사각형이라는 완전한 기하학적 형태 안에서 불완전하고 단편적인 일상의 조각들을 배치하는 것이다. 이런 배치 방식은 몽타주적 사고와 연결된다. 인스타툰의 각 컷은 독립적인 의미를 갖지만, 동시에 다른 컷들과의 관계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생성한다. 이는 에이젠슈테인이 말한 영화적 몽타주와 유사한 원리다. 하지만 인스타툰의 몽타주는 시간적 연속성보다는 공간적 동시성에 더 의존한다. 독자는 여러 컷을 동시에 조망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전체적인 의미를 구성한다. 나아가 이런 공간적 동시성은 인스타툰만의 독특한 시간성을 만들어낸다.

인스타툰은 순차적으로 읽히지만, 동시에 전체가 한눈에 파악될 수 있는 형태다. 이는 압축된 시간과 확장된 순간이라는 독특한 시간 경험을 제공한다. 20컷이라는 짧은 분량 안에 하루, 일주일, 때로는 인생 전체가 압축되어 들어간다. 이런 압축은 단순한 요약이 아니라, 농축된 의미를 만들어낸다. 이 시간성은 현대적 삶의 조건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점점 더 짧은 시간 안에 더 많은 정보를 처리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인스타툰의 압축된 서사 구조는 이러한 현실에 대한 매체적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인스타툰은 이런 가속화된 현실에 완전히 순응하지는 않는다. 20컷이라는 제약 안에서도 독자들은 깊은 감정적 몰입을 경험할 수 있고, 작가와 진정한 소통을 나눌 수 있다. 이는 양적 확장보다는 질적 심화를 추구하는 대안적 시간성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인스타툰의 정사각형 프레임은 균형과 조화라는 미학적 이상을 구현한다. 정사각형은 모든 변이 동일하고, 모든 각이 직각인 완전한 형태다. 이런 완전성 안에서 불완전한 일상의 조각들을 배치할 때, 역설적으로 일상의 아름다움이 더욱 부각된다. 인스타툰의 정사각형 프레임은 또한 집중과 응축의 미학을 구현한다. 제한된 공간 안에서 모든 요소가 의미를 가져야 하므로, 불필요한 장식이나 부차적인 요소는 제거되고 핵심적인 내용만이 남는다. 이는 인스타툰을 보는 경험을 매우 강렬하고 임팩트 있게 만든다. 인스타툰의 서브컬처적 성격도 간과할 수 없다. 현실이 싹 틀 숨구멍을 만들어두지 않는다면 그곳엔 아무것도 피어날 수 없다. 이 점에서 매체는 결국 서브컬처가 되어야 한다. '자기'는 어디까지나 현실의 존재이고, 매체는 자기를 상대화할 용도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현실주의자가 되는 건 그런 주변부의 것들이 부질없거나 몹쓸 것이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은 자기에 의해서만 결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서브컬처는 문화에 소속된 이들이 자신을 돌아봄에 있어 바깥이 되기에 유용한 지대를 갖는다. 서브컬처의 서브는 주류문화가 말하는 프리오리티가 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 갖는 프리오리티를 확보할 수 있게 해준다. 이른바 리오타르가 말한 반영화의 개념처럼, "아이가 보기 위해 쓸데없이 성냥을 켤 때는 아이는 단지 움직임을 좋아하는 것이다. 차례차례 바뀌는 색채를, 켤 때 정점에 오르는 빛을, 작은 성냥개비의 소멸을, 쉬익 하는 소리를 좋아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이는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않는 비생산적 차이를 좋아하는 것이다.". 인스타툰이라는 매체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소규모의 완결성이 가질 수 있는 힘이다. 거대한 스케일의 서사나 장대한 세계관이 아니더라도, 작은 이야기 하나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 이는 현대적 삶의 조건에 맞는 새로운 형태의 예술적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아무도 가본 적 없는 길을 걷고 있다. 그 길은 혼자만의 힘으로 건너야 한다. 앞을 내다보는 일도, 발아래를 들여다보는 것도 모두 길을 걷는 일에 필요한 과정이다. 인스타툰을 본다는 것은 정사각형이라는 작은 프레임 안에서도 무한한 가능성이 펼쳐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제약이 있다는 건 우리의 상상력이 아직 세상과 이어져 있음을 말할 뿐이다. 김해인 만화편집자의 에세이집 『펀치』에서 언급되는 편집자의 역할을 통해 생각해 볼 점이 있다. 우리는 흔히 '함께'라는 것을 같이 나누는 일로 여기지만, 사실은 서로에 흔적을 남기는 상호소통적인 행위다. 세상살이란 게 정말로 그렇다. 살아가는 만큼 죽어감을 생각하는 일은 우리가 앞장을 넘기며 뒷장의 복선들을 떠올리는 일과도 같다.

인스타툰의 소규모 완결성은 또한 지속가능한 창작이라는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장편 웹툰이 요구하는 방대한 기획과 지속적인 에너지와 달리, 인스타툰은 작가가 자신의 페이스에 맞춰 꾸준히 창작할 수 있는 형식이다. 이는 특히 일상과 창작을 병행해야 하는 많은 작가들에게 현실적인 대안이 된다. 더 나아가 인스타툰의 소규모 완결성은 민주적 창작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거대한 자본이나 전문적인 기술 없이도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만화로 만들어 공유할 수 있다. 이는 창작의 문턱을 낮추고, 다양한 목소리들이 공론장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렇다면 인스타툰의 미래는 어떨까? 기술의 발전에 따라 인스타그램의 제약이 완화되거나 새로운 플랫폼이 등장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인스타툰이 보여준 새로운 가능성들이다. 짧은 형식 안에서의 완결성, 일상성을 기반으로 한 진정성, 작가와 독자 간의 직접적 소통, 개인적 경험의 정치적 의미화 등은 인스타툰을 넘어서서 다른 매체들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인스타툰은 매체적 진화의 한 단계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문화적 실천의 시작이기도 하다. 정사각형 안의 무한성이라는 역설을 통해, 인스타툰은 제약과 자유, 개인과 집단, 현실과 상상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제시한다. 이는 단순히 만화의 새로운 형식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삶의 방식을 예고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영화나 만화나 한 사람이 현실을 가꾸어 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이 둘을 같은 맥락에 두고 보는 건 합당하다. 보다 급진적으로 말한다면, 영화나 만화나 관점만 다를 뿐인 서로 같은 매체일 수 있다. 우리는 영화에서는 만화적인 것을 찾고 만화에서는 영화적인 것을 찾을 수 있다. 인스타툰은 바로 이런 매체 간 경계 흐리기의 최전선에 있는 실험적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정사각형이라는 작은 프레임이지만, 그 안에는 우리 시대의 욕망과 불안, 희망과 절망이 모두 압축되어 들어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읽는 우리 또한 그 정사각형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사후판단적으로 발견하게 된다.

인스타툰의 매체적 특성은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의 미학적 감수성을 반영한다. 이들은 텍스트와 이미지, 정적인 것과 동적인 것,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새로운 형태의 표현 방식을 창조해낸다. 인스타툰은 이런 새로운 감수성이 구현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인스타툰은 포스트모던적 파편화와 디지털적 집합성을 동시에 구현한다. 각각의 인스타툰은 작은 파편들이지만, 해시태그와 알고리즘을 통해 연결되어 거대한 집합체를 형성한다. 이는 개별성과 집합성, 파편화와 통합이 공존하는 새로운 형태의 문화적 실천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인스타툰이 보여주는 일상의 정치학이다. 인스타툰은 거대한 서사나 화려한 스펙터클이 아닌, 소소한 일상의 순간들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공감대를 형성한다. 이는 기존의 정치적 담론이 포괄하지 못하는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실천이다.

만화를 읽는다는 것은 쏟아지는 별빛 아래에서도 세상이 밝게 빛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지루하다는 건 우리의 의식이 아직 세상과 이어져 있음을 말할 뿐이다. 인스타툰이라는 새로운 매체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은, 제약된 공간 안에서도 무한한 상상력이 펼쳐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며, 사후판단적 실존을 통해 우리 자신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는 희망이다. 그런 점에서 인스타툰의 존재론적 의미는 단순히 새로운 매체의 등장을 넘어서서, 우리가 현실을 인식하고 타자와 소통하며 자신을 성찰하는 방식의 근본적 변화를 예고한다고 할 수 있다. 정사각형 안의 사후판단적 실존이야말로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형태의 매체적 존재론이며, 인스타툰은 그 가능성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매체적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인스타툰이 제시하는 새로운 매체적 존재론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진화할 것이다. 기술의 발전, 사회적 변화, 세대교체 등에 따라 인스타툰의 형식과 내용도 변화할 것이지만, 그 핵심에 있는 압축성과 완결성, 일상성과 진정성, 개인성과 사회성의 변증법적 결합은 지속될 것이다. 이는 우리가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새로운 형태의 지혜와 감수성을 제공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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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차미

< 만화평론가> 
* 2019 만화영상진흥원 만화평론상 신인 부분 
* 2019 한국예총 평론상 영화 부문
* 2020 서울시립대 영화평론 공모전 대학원생 부문
* 2024 부산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
* 저서 『안녕하세요 오즈 야스지로』,『포스트 시대의 영화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