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청소년의 ‘자기 이름’ 찾기
-데브 JJ 리의『In Limbo(외꺼풀)』론

<경계의 아이, 청회색의 언어>
글로벌화가 정착된 오늘, 해외여행뿐 아니라 이주와 이동이 한층 쉬워졌지만 디아스포라 서사는 여전히 다인종 국가에서 활발하다. 이민의 역사 위에 세워진 미국에서도 그 땅에서 태어난 이들 중 일부는 여전히 ‘내부의 이방인’으로 호명된다. 특히 아시아계는 타 인종과 같은 공간에서 자라면서도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혀, 완전히 스며들지 못한다는 감각을 반복해서 겪는다. 인종이라는 일차적 조건과 가족·핏줄로 이어지는 민족적 문화 정체성은 흔히 ‘부유(浮游)하는 감각’으로 응결되고, 편견·미시적 차별·언어 전환의 문제로 되돌아온다. 한편, 동아시아를 하나의 이미지로 평평하게 만들어 온 오리엔탈리즘은 서로 다른 문화성과 역사적 맥락을 지워 왔으나, 최근에는 당사자들이 직접 각기 다른 구체성을 전면에 내세우며 그 시선을 비틀고 해체하려 한다.
이 흐름 속에서 한국계 텍스트는 뚜렷한 고유성을 드러낸다. K-컬처·한류의 가시적 성과 이전 한국계 이민자는 주류 사회에서 ‘부분적 외부자’로 규정되어 왔고, 그 잔향은 오늘의 작품들에서도 쉽게 감지된다. 하지만 피터 손의 〈엘리멘탈〉, 정이삭의 〈미나리〉에서 보듯 1.5세·2세대는 주류 서사 안으로 들어와 자신의 경험을 장르적으로 변주해왔고, 그래픽 노블 역시 예외가 아니다.
동시대의 ‘디아스포라’를 다룬 여러 그래픽 회고록과 나란히 보면 『In Limbo』의 방식은 더욱 선명해진다. 진 루엔 양의 『American Born Chinese』가 과장된 스테레오타입을 풍자하고 뒤집는 전략으로 고정관념을 파열시킨다면, 『In Limbo』는 감정의 볼륨을 낮추는 방식으로 침묵을 푼다. 티 부이의 『The Best We Could Do』가 가족사–전쟁–이주를 관통하는 장기 서사로 과거의 거대한 파도를 헤집는다면, 『In Limbo』는 교실·복도·욕실 같은 소규모 공간의 반복으로 미세한 균열과 봉합을 기록한다. 로빈 하의 『Almost American Girl』이 이주 초기의 언어 장벽을 유머와 자전적 스케치로 풀어낸다면, Deb JJ Lee는 채도 낮은 청회색과 거터의 시간으로 언어 장벽으로 인한 우울이란 감정의 여진을 오래 붙든다. 볼륨·스케일·팔레트의 차이가 『In Limbo』의 미학을 더욱 또렷하게 부각시키는 지점이다.
무엇보다 『In Limbo』는 경계에 선 주체를 단순한 개인 경험담으로 축소하지 않는다. 칸과 칸 사이의 빈칸(거터),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우는 인디고 빛의 내면 이미지는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시간’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말로 붙잡기 어려운 감정은 그림으로 가시화된다. 예컨대 자살 충동을 암시하는 대목에서 욕조에 반쯤 잠긴 얼굴 위로 약이 떠다니고, 주인공 데브가 심리 상담가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화면을 가득 메운 나무와 잎사귀가 압도감을 전한다. 이렇게 한국어·영어·이미지가 어울리다 때로는 어긋나는 순간에 서로 다른 문화가 부딪히며 ‘중간 지대’가 생성된다. 작품은 이 공간을 피해–가해의 단순한 도식으로 환원하지 않고, 주인공이 자신을 무엇이라 부를지, 어떤 언어로 설명할지 천천히 배우는 자리로 바꿔놓는다.
이런 맥락에서 Deb JJ Lee의 그래픽 노블 회고록 『In Limbo』(국내 번역: 『외꺼풀』)는,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 뉴저지의 백인 다수 교외에서 성장한 1.5세 청소년의 시선을 통해 이름·응시·언어의 균열과 우울의 심연을 섬세하게 기록한다. 가정·학교·우정의 장면마다 미세한 금이 켜켜이 쌓이듯 화자는 결국 자살을 시도할 만큼 어두운 10대를 지나지만, 고등학교 졸업과 더불어 한국 방문(귀환 여행)을 전환 축으로 삼아 관계와 정체성을 다시 맥락화하며 ‘자기 서사’를 회복한다. 전반을 지배하는 청회색 모노톤은 서늘한 정조를 담담히 붙잡고, 프레이밍과 타이포그래피는 시선–이름–언어가 충돌하는 순간들을 효과적으로 형식화한다.
<'정진'과 Deb, 두 가지 이름 사이에서>
원제『In Limbo』가 가리키는 것은 단순한 ‘중간’, ‘어중간함’이 아니라, 삶의 다음 단계로 건너가기 전 머무르는 과도기의 시간이다. 반면 한국어 번역 제목 ‘limbo’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외꺼풀’은 아예 몸의 표식으로 시선을 끌어온다. 하나는 시간을, 하나는 신체를 전면에 세우는 셈이다. 이 영어와 한국어로 달리 표현되는 두 제목이 만드는 시선의 각도 차는 작품의 핵심을 정확히 가리킨다. 데브의 서사는 ‘외꺼풀’이라는 표준 미학의 잣대에 맞춰지지 않는 몸에서 출발하지만, 결국 림보의 시간을 통과하며 언어·관계·이미지의 속도를 재조정한다. 표식(외꺼풀)에서 호흡(림보)으로, 즉 어떻게 보이느냐의 문제에서 어떤 속도로 살아가느냐의 문제로 질문이 이동한다는 점에서, 두 제목은 상보적이다. 번역 제목이 던지는 ‘눈’의 상징성은 작품 전반의 클로즈업 전략과도 긴밀히 호응하며, 원제가 지시하는 머무름의 시간성은 거터와 여백, 낮은 채도라는 형식적 선택 속에 조용히 침투해 있다.
작품의 첫 화, 가족과 함께 찾은 바닷가 장면에서 데브는 자신의 또래들이 즐겁게 비치발리볼하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며 ‘유색인이 아닌 나’를 상상한다. 전형적인 백인 얼굴(큰 눈, 깊은 눈확, 파란 눈동자)과 대비되는 ‘티피컬한 아시안’. 자신의 작은 눈, 외꺼풀, 검은 눈동자, 작은 키와 주근깨 같은 표식들은 그녀로 하여금 끊임없는 자기검열을 불러일으킨다. 이 위축은 곧 행동으로 드러난다. 동생 브래드와 바다에 들어가지만, 금세 춥다는 핑계를 대고 나와 버린다. 바다는 풍경이 아니라, 접근할 수는 있으나 결코 소속될 수 없는 세계의 은유로 기능한다.
친구가 단 한 명뿐이라는 사실이 동생의 놀림으로 드러나면서, 데브의 외로운 모습은 한층 더 작아 보인다. 데브가 잠시 물속에 얼굴을 담근 장면에서는, 옆에 배치된 서양인과 히스패닉들의 짙은 쌍꺼풀 있는 눈들과 대비되며 그녀가 외모적으로 얼마나 큰 강박에 시달리는지 드러난다. 새 학기를 앞두고 거울 앞에서 이어지는 9컷의 눈화장 연속 장면은 작은 눈두덩이가 아이라인을 삼켜버리는 모습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며, 호명의 문제를 넘어 ‘얼굴’ 자체가 정체성을 흔드는 과정을 가시화한다. 작가는 거의 모든 화에서 눈을 극단적 클로즈업으로 배치해, “Hate myself”라는 직설 없이도 그 정동을 전달한다.
『In Limbo』는 전형적인 영 어덜트 그래픽 노블처럼 10대 후반의 불안과 흔들림을 전면에 놓는다. 그러나 이 작품이 그리는 사춘기는 단순한 보편적 격정이 아니라, 여러 경계 위에서 정체성을 만들어가야 하는 특별한 혼란에 가깝다. 정체성은 혼자 형성되지 않는다. 타인의 호명—이름을 어떻게 부르는지, 어떤 외모 규범에 맞추는지—에 의해 규정되기도 하고, 스스로 붙이는 이름을 통해 구성되기도 한다. 이름이 틀리게 불리거나 외모에 대한 기대와 실제가 어긋날 때, 그 간극은 자아를 흔든다.
작품은 이 긴장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교실에서 화자가 이름을 바로잡으려 하지만, 교사는 한국식 본명을 길게 늘여 계속 틀린다. 그 순간 말풍선은 불필요하게 커지거나 과장되게 떨리고, 잘못 적힌 철자가 도드라진다. ‘정진(Jung-Jin)’이 ‘중진’, ‘융진’으로 굳어버리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교실의 웃음은 발음 교정의 실패를 곧 존재 교정의 실패로 전이시키며, 화자는 체념하듯 익숙하게 미국식 이름 ‘데브(Deb)’를 택한다.
이 선택은 ‘하나의 이름을 버림’이 아니라 상황별로 권한을 나누는 방식이다. 집에서는 여전히 ‘이정진’으로 불리고, 바깥에서는 ‘데브’가 자리 잡는다. 두 이름은 충돌하지 않고 공존하며, 각기 다른 관계 속에서 다른 자기 진술의 문법을 호출한다. 발음·철자·호명이 교차하는 장면들은 디아스포라의 언어가 단순한 번역 문제가 아니라 권력과 접근성의 문제임을 드러낸다.
이름과 외모의 긴장은 그림에서도 겹쳐진다. 잘못 불린 이름에 아이들이 웃는 장면 옆에 화자의 작은 눈(외꺼풀)이 클로즈업된다. 얼굴이라는 신체적 표식과 이름이라는 언어적 표식이 동시에 어긋나며, 독자는 정체성이 흔들리는 균열을 체감한다.
데브가 콤플렉스로 여기는 눈은 동아시아 여성성, 미용·성형 담론, 그리고 ‘또렷한 눈=자신감’이라는 서양권의 규범과 빠르게 연결된다. 속눈썹이 눈을 찌르는 문제로 병원을 찾았을 때 백인 의사가 “너 같은 눈에는 익숙하지 않아서”라고 무심히 말하는 장면은, 응시의 규범이 의료의 언어로 번역되어 몸에 각인되는 순간이다. 이어 어머니가 먼저 쌍꺼풀 수술을 권하는 장면에서는 돌봄의 언어와 표준화 요구가 겹치는 아이러니가 드러난다.
<모델 마이너리티와 모국어의 무게>
이 미묘한 어머니–딸 관계는 작품의 중심축을 이룬다. 어머니는 흔히 말하는 ‘아시안맘, 타이거맘’의 면모로 그려진다. 자식을 위해 미국까지 건너왔고, 그만큼의 투자가 성과로 돌아와야 한다는 믿음은 보이지 않는 압박이 된다. 기대가 충족되지 않을 때 어머니가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는 불안은 데브의 사춘기를 지속적인 갈등 속에 가둔다. 어머니는 한인 치과의사 집 아이들과 데브를 비교하고, 데브 역시 다른 집(비아시아계) 어머니와 자신의 어머니를 견주며 상처 주는 말을 내뱉는다. 비교의 언어는 결국 관계를 더 깊게 파고드는 균열을 남긴다.
피부처럼 바꿀 수 없는 신체 표식이나 가정의 문화적 배경은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사회적 의미를 덧입는다. 개인이 선택할 수 없었던 출발점이 규범의 잣대가 되는 사회에서, “그렇게 태어났으니까”라는 체념은 더 쉽게 굳어진다. ‘LOVE MYSELF’를 표어로 내세우는 미국에서도 아시아계는 역설적으로 ‘모델 마이너리티(모범 소수자)’ 신화의 틀마저 덧씌워진다. 이 신화는 아시아인을 근면·순응·비정치성으로 표상하고, 성취를 곧 도덕성으로 연결 짓는다. 1960년대 일본계 미국인의 ‘성공 서사’를 계기로 강화된 담론은 이후 아시아계 전반을 규정하는 정치적 기호로 확장되었으며, 다른 소수 집단과의 구분과 경쟁을 정당화하는 장치로 작동했다. 그 결과 실패와 고통은 구조적 문제가 아닌 개인의 결함으로 환원되었고, 차별은 ‘자기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에게 떠넘겨졌다.1)
『In Limbo』의 화자 데브 역시 이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첫 화에서 동생 브래드가 “엄마는 누나를 게으르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는 장면은, 데브의 회피의 원인 곧 우울과 부적응이 어떤 맥락 속에서 비롯되었는지 묻기보다 곧바로 ‘게으름’이라는 낙인으로 환원되는 방식을 보여준다. 보이지 않는 부담은 그렇게 끝없이 이어진다.
작품은 미국 고등학교 4년(9–12학년)의 시간을 압축해 이 장치가 어떻게 누적 효과를 내는지 묘사한다. 중학교 시절 오케스트라반과 우등반에 속했던 화자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성적이 평균에도 못 미치고, 바이올린 실력 역시 동년배 사이에서 빛을 잃는다. 끝내 오케스트라반에서 물러나지만, 주변은 이를 ‘의지 부족’과 ‘게으름’으로 해석한다. 가정 안에서도 동일한 구조가 반복된다. 어머니는 성적 하락을 꾸짖으면서도 ‘유일한 재능’이라 여긴 바이올린 수업만큼은 끊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화자는 그 ‘재능’이 자신의 기쁨이 아니라 타인의 기대가 덧씌워진 외피였음을 감지한다. 회피가 시작되고, 그 회피는 곧 게으름이라는 낙인으로 되돌아오며 악순환의 고리가 잠긴다.
이러한 부담은 언어에서 더욱 또렷해진다. 부모의 언어이자 모국어인 한국어는 영어보다 훨씬 큰 정서적 무게로 등장한다. 작품은 가족 대화는 보통 한국어로 나눠진다. 꺾쇠 〈〉로 한국어를 표기해 그 무게를 시각화한다. 그 안에서는 폭언과 지지가 한 작품에 공존하게 되는데, 〈정말이지 네가 내 자식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와 〈넌 그림을 그릴 때 행복하잖아. 그리고 나는 언제든 네 열정을 돕고 싶어. 그게 어머니의 의무야〉가 충돌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그와 동시에 갈등은 주로 한국어로 폭발하고, 그 말들은 트라우마로 각인된다. 특히 데브가 8학년 때 정신과 상담을 받고 돌아온 날, 어머니가 딸의 손을 잡고 〈같이 죽자〉고 말한 순간은 가장 강렬하고도 두려운 기억으로 남는다. 이런 이유로 한국어는 데브에게 위로이자 상처의 언어다. 하지만 부정적 기억이 더 오래 남기에 데브는 점차 한국어 자체를 회피한다. 친구 퀸(Quinn)이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고 했을 때조차 데브가 “모른다”고 선을 긋는 대목은, 집 안에서 체화된 언어의 기억을 다시 수행하고 싶지 않은 몸의 반응으로 읽힌다.
그 정점은 데브가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반항 장면이다. 학교 역사 시간에 판매할 빵을 만들다 주방을 어질러 놓은 일을 두고 어머니와 다툼이 벌어지자, 데브는 처음으로 ‘닥쳐요’라고 맞선다. 그러나 이 반항은 곧 어머니의 손찌검과 한국어 욕설로 되돌아오고, 데브는 집을 나와 다시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다. 다행히 이번에는 친구 퀸이 곁에서 그녀를 붙잡으며, 데브는 관계 속에서 다시 살아갈 힘을 되찾는다. 결론적으로 이 작품 속 ‘한국 엄마’라는 이미지는 자녀의 성공에 전폭적으로 투자하는 상징 자본으로 기능하지만, 그 안에는 돌봄과 규범화의 요구가 겹쳐져 결국 엄마의 언어인 ‘모국어’, 즉 한국어는 상처의 언어로 변주된다.
<정상성의 압박과 외톨이 감각>
오랫동안 함께 지낸 친구 케이트와 멀어진 뒤, 뉴저지 토박이 퀸(Quinn)과의 첫 만남에서 데브는 묻는다. “사람이 어떻게 한 장소에서만 살아?” 퀸은 곧장 되묻는다. “사람이 어떻게 평생 돌아다니면서 살아?” 이 역질문은 디아스포라에게 뼈아프다. 데브는 답하지 못하고, 자신 안에 이미 각인된 ‘어디서나 외톨이’라는 감각을 다시 확인한다. 퀸은 아시아인에 대한 편견을 무심히 드러내지만, 문제라고 인식하지 않는다. 작품은 이러한 ‘악의 없는 편견’이 일상에 스며드는 방식을 담담히 보여준다. 교실·복도·거울 앞에서 반복되는 자기 응시는 단순한 외모 고민이 아니라, 집 안과 밖에서 한국인/아시안으로 분류되고 판단되는 시선의 작동을 드러낸다. 특히 “아시안끼리는 다 친할 것” 같은 선입견, 그리고 ‘예쁜 아시안/그렇지 않은 아시안’이라는 이중 잣대는 데브에게 열등감을 내면화시킨다.
방학마다 한국어 여름학교에 보내지지만, 그곳에서도 외톨이 감각은 깊어진다. “같은 한국인이라면 금세 친해질 것”이라는 기대는 곧 깨지고, 성장할수록 한국어에서 영어로 미끄러지는 선택이 연속된 칸으로 시각화된다. “나는 비-미국인이면서 동시에 비-한국인이다. 나는 영원히 그 사이에 있을 것이다”라는 독백은 정체성이 고정된 점이 아니라 흔들리는 진자에 가깝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국어 학교에서는 투명인간처럼 지워지고, 일반 학교에서도 있으나 마나 한 존재로 밀려나는 경험은, ‘보여지기’가 또래 관계와 성취에까지 깊게 작동하는 환경을 드러낸다. 데브는 처음엔 이를 성격과 외모 탓으로 돌리지만, 상담을 통해 차츰 지금까지 느꼈던 정상성은 결국 허구라는 것을 깨닫고 자기 자신에 집중하며 자기회복의 방법을 스스로 알아간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뒤, 데브는 바이올린과 우등반을 내려놓고 자신이 원하는 미술반으로 옮기며 비로소 잠시 머물 자리를 찾는다. 장면을 잘게 나누는 편집은 ‘소속의 문턱을 넘지만 매번 반쯤 밖에 머무는 시간’을 영화처럼 체감하게 한다.
결국 이야기의 핵심은 ‘예쁨’이 아니라 ‘정상성’의 문제다. 서구식 소통에서는 ‘눈을 똑바로 보는 자신감’이, 한국식 미용에서는 ‘눈매의 표준화’가 요구된다. 다른 언어로 말하지만, 둘 다 보이는 법과 불리는 법을 ‘정상’에 맞추라고 강요한다. 『In Limbo』는 이 압박을 청회색 팔레트, 집요한 클로즈업, 거터의 여백으로 번역해낸다. 그러한 압박과 불안을 작품에선 데브가 극단적 선택의 구체적 장면을 보여주지 않고, 그에 이르는 맥락과 여파에 집중한다. 10대 독자를 고려한 신중한 선택일 것이다.
<청회색의 팔레트: 우울에서 회복으로>
『In Limbo』의 기본 색조인 청회색은 차갑게만 보이지만, 실제로는 감정을 과열시키지 않고 오래 머물게 하는 톤으로 작동한다. 파랑의 잔열이 스민 회색은 우울·수치·고독을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페이지에 잔류감을 남긴다. 그래서 데브의 하루와 마음결은 폭발하지 않고 서서히 스민다. 이 느린 스며듦이 바로 회복의 호흡을 만든다. 장면 사이의 여백과 거터도 그 호흡을 받쳐 준다. 말풍선이 사라진 칸, 혹은 대사보다 넓은 공백은 ‘말하지 못한 것’과 ‘말하지 않기로 한 것’을 가르는 표지처럼 기능하며, 독자는 그 틈을 스스로 메운다. 사건의 고비마다 패널 밀도를 낮추거나 거터를 넓히는 선택은 망설임과 머뭇거림의 시간을 실제로 체감하게 하고, 그 시간은 곧 회복을 위한 지연과 숨 고르기가 된다. 규칙적인 6~9분할 그리드를 유지하다 임계점에서 스플래시(한 컷 가득)나 비대칭 분할로 그리드를 깨는 리듬은 다음 페이지로 손을 넘기는 긴장을 극대화한다. ‘넘겨 보기’가 아닌 ‘넘어가기’—우울에서 회복으로 건너가는 동작이 형식으로 번역되는 순간이다.
시선과 프레이밍의 문법도 섬세하다. 눈·입술·손끝을 과감히 당겨 잡는 클로즈업은 내면 독백보다 먼저 감정을 전한다. 특히 ‘눈’의 반복 클로즈업은 외모 규범과 자기 응시의 압박을 설명 대신 이미지로 증명한다. 다수가 모인 교실·복도 장면에서는 흰색–청회색 대비를 키워 늘 섞이지 못하는 부유감과 소외를 시각화한다. 이러한 대비는 데브가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오려는 미세한 움직임—회복을 향한 미묘한 복귀—을 더 또렷하게 만든다.
반복 모티프 역시 이야기의 뼈대를 이룬다. 이 작품에서 ‘물’은 청회색 팔레트와 맞물린 핵심 신호다. 욕조의 물, 빗줄기, 바닷가의 파문은 ‘잠겨 있지만 닿지 못하는 상태’를 호출하고, 동시에 잠수와 부상 사이를 왕복하는 회복의 리듬을 암시한다. 알약과 알약통은 통제와 의존의 애매한 경계를 드러내면서도, 도움을 요청하고 받는 과정 또한 회복의 일부임을 상기시킨다. 공간 구도는 뉴저지/뉴욕 교외의 가로(횡단)와 서울 도심의 수직 대비로 조직된다. 가로 구도는 멈춘 일상의 넓이를, 수직 구도는 밀도 높은 시선의 압박을 만든다. 서울로 온 장면에서 마천루들을 바라보는 데브의 얼굴이 화면 중앙에서 아주 조금 비켜서는 프레이밍은 동질감과 타자화 사이의 미세한 흔들림—그리고 그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가는 회복의 과정—을 시각화한다. 같은 청회색 안에서도 농도를 달리해 관계의 거리와 위기 수치를 조정하는 방식(가족 장면의 중간 농도, 학교 장면의 옅은 농도, 위기 장면의 짙은 농도)은 색채 없이도 감정선을 읽히게 한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감정의 소음을 의도적으로 낮춘다. 눈물과 비명, 효과음의 과장을 최소화하는 대신 정지, 여백, 낮은 채도가 남는다. 과잉의 드라마 대신 절제된 화면을 통해 독자는 데브와 함께 숨을 고르고, 천천히 돌아서는 법을 배운다. 이는 “더 크게 말하기”가 아니라 “자기 목소리로 말하기”라는 회복의 원칙과 맞닿는다. 청회색 팔레트, 여백과 거터, 시점과 타이포그래피, 모티프와 구도의 결은 결국 한 방향을 가리킨다. 소속의 문턱에서 흔들리던 인물이 과장 대신 호흡을 선택하고, 타인의 언어 대신 자기 언어로 빈칸을 채워 넣는 일—『In Limbo』의 미학은 바로 그 조용한 회복의 기술에 있다.
<코드 스위칭에서 자기명명으로>
『In Limbo』에서 주인공의 회복은 거창한 선언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아주 작은 말하기 방식과 표현 방식을 바꾸는 데서 출발한다. 여기서 핵심 개념은 두 가지다. 하나는 코드 스위칭(언어 전환), 다른 하나는 자기명명(스스로 이름 붙이기)이다. 이때 언어는 한국어·영어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림이라는 시각 언어도 동일한 비중으로 작동한다.
이 변화는 그림(컷)의 요소들 속에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한국어 대사는 꺾쇠 〈 〉 안에, 영어 대사는 일반 말풍선으로 표시되는데, 말풍선의 크기·자간·꼬리 각도까지 다르게 설계된다. 영문판에서 꺾쇠 〈 〉의 등장 대신 다른 글씨체를 씀과 동시에 한국어를 말할 때 말풍선이 더 작고 눌리거나 흐릿해지고, 글자가 여백 속으로 비좁게 끼어드는 장면이 반복된다. 수치심·분노·사랑처럼 뒤엉킨 감정의 무게가 타이포그래피로 시각화되는 셈이다. 한편, 자필 스케치와 그림들은 넉넉한 여백과 느린 리듬을 확보해, 말로 붙잡히지 않는 감정을 대신 떠받치는 세 번째 언어가 된다. 이 모든 것은 청회색 팔레트 위에서 톤을 높이지 않고 오래 머무는 감정의 잔향으로 남는다.
하지만 작은 전환들의 축적들 속에서 핼러윈 파티에서 균열로 터진다. 퀸과 어울려도 데브는 그저 끼워 넣어진 사람처럼 느낀다. 불안과 우울이 한꺼번에 솟구치며 집에 돌아오고 난 뒤 데브는 자살을 시도한다. 작품은 방법의 상세 묘사를 피하고, 욕조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약, 손톱의 거스러미를 피가 날 때까지 뜯는 이미지의 파편으로만 상황을 스친다. 그리고 곧바로 찾아오는 침묵을 오래 잡는다. 부모의 반응도 격한 폭발이 아니라 지쳐 버린 침묵이다. 그 뒤로 데브는 “자살이 실패로 끝나면 조롱거리가 된다…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만큼 형편없는 운명도 또 있을까?”라고 독백하며, 자신의 자살을 쉬쉬하는 그녀의 눈치를 보고 있는 주변 인물들의 상황을 그대로 그리며 보이는 것(걱정)과 보이지 않는 것(조롱) 사이의 모순을 말한다. 이후 뉴저지를 떠나 뉴욕에서 그림을 그리는 장면으로 넘어가면 글자는 줄고 이미지가 전면에 서면서, 고통과의 거리를 두는 방식이 드러난다.
회복의 윤리는 우정의 말하기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데브가 퀸에게 자살 시도를 털어놓은 뒤 두 사람은 멀어지지만, 졸업 직전에 다시 만나 각자의 마음을 꺼내 놓는다. 데브가 계속 “미안해”를 반복하자 퀸은 “그만 미안하라고” 말한다. 무조건적인 사과는 자기비난의 자동 반응일 뿐이다. 퀸의 요청은 “솔직해지고 벽을 세우지 말라”로 옮겨 가라는 초대다. “미안해”를 멈추는 순간, 데브는 진심을 담은 해명과 자기회복의 언어를 스스럼없이 내뱉을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퀸과의 관계가 회복된다. 이어서 퀸의 한국 유학 결정, 멀어졌던 케이트와의 화해도 피해자/가해자라는 단순한 구도를 벗어나, 소문과 오해를 설명하고 필요한 것을 요청하는 새로운 말하기의 연습으로 그려진다.
이 지점에서 작품은 시간의 언어까지 바꾼다. “토네이도 경보가 울리던 밤”에 모든 응어리가 풀어지고 화해로 이어진 데브가 전력 질주하는 장면이 연속적으로 4칸을 차지한다. 그리고 바로 반복된 칸으로 다음 페이지에는 곧바로 졸업식 강단으로 하드 컷하는 대담한 전환은, 고등학교 4년의 시간이 폭풍처럼 지나갔음을 형식으로 선고한다. 요컨대 『In Limbo』의 회복 서사는 코드 스위칭 → 새로운 말하기 → 자기명명으로 이어진다. 꺾쇠 속 한국어는 억압의 무게를, 공기감 있는 영어 말풍선은 표준의 규칙을, 자필 스케치는 치유의 호흡을 맡는다. 그리고 데브/정진이라는 이름의 짝은 하나를 버리는 선택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사용 권한을 스스로 배분하는 주체적 선택으로 정리된다.
결국 이 작품에서 예술(그리기)은 이름을 바꿔치기하는 일이 아니다. 이름에 살을 붙이는 일—말하지 못했던 자신을 이미지로 읽고, 다시 말로 가져오는 과정이다. 그렇게 데브는 타인의 호명에서 벗어나 자기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며,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자기 서사를 되찾는다.
<여기/거기를 넘어, 이동으로 산다.>
마지막 화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데브는 쌍꺼풀 수술을 계기로 10년 만에 한국을 찾는다. 한국에 와 사촌 언니와 이모를 만나며 가족의 테두리 안으로 다시 들어가고, ‘이정진’이라는 본명이 정확히 불리는 순간 10년 만의 어색함이 잠시간 내려놓아지며 안정을 느낀다. 지하철과 강남역의 인파 속, 한국인이 대부분인 거리에서 동질감도 스친다. 그러나 무심코 튀어나온 한국어에 영어 억양이 실리자 곧바로 ‘미국 사람’으로 분류된다. ‘고향’이자 안식처라 여겨 온 장소에서조차 타자화되는 그 순간에도 데브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하다. “한국에 10년 만에 왔다. 아마 많은 것이 변했을 것이다. 제길, 나는 나의 첫 언어를 완전히 잊어버렸다”라는 독백은, 귀환이 곧 완전한 귀속을 뜻하지 않음을 확인한다. 결국 어디에 있든 자신을 규정하는 최종 권한은 자기에게 있다는 깨달음—그리고 그 사실을 굳이 말로 늘이지 않을 때 찾아오는 조용한 평안—이 화면을 채운다.
사촌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친척 가족과 만나는 장면들은 이 이중적 감정을 더 세밀히 조직한다. 어머니를 빼닮은 외할머니와의 대화는 자주 헛도는 톱니처럼 맞물리지 않는다. 그 어긋남의 자리에서 데브는 오히려 잊어버린 한국어를 다시 배우고 싶다는 욕망을 조심스레 독백하며 고백하게 된다. 이어지는 무성(無聲)의 스냅들—카메라로 담아낸 한옥의 처마, 골목의 표면, 시장 상인의 손놀림, 수많은 한식—은 인디고 톤으로 채색되어, 말 대신 이미지를 수집하는 이방인의 시선을 흑백 사진처럼 고정한다. 친척들과의 식탁 장면에서 쏟아지는 한국어 질문과 정(情)의 오지랖은 데브에게 여전히 어색하지만, 그 어색함은 곧 부모에 대한 재맥락화로 돌아온다. 늘 서로를 갉아먹듯 부딪히던 기억만 남아 있던 그녀는 그날 밤 미국에 있는 부모님에게 연락한다. 부모님에게 못되게 굴었던 과거를 사과하고, 아버지는 “네가 행복하건 슬프건 늘 사랑한다”는 말을 건넨다. 그 간결한 확인은 긴 사춘기의 여진을 잔잔히 가라앉히는 문장으로 기능한다.
그러한 흐름에 이어 수술대의 몽롱한 마취 순간이 열어젖히는 회상은 더욱 인상적이다. 어린 데브는 어머니의 손가락이나 옷자락을 꼭 쥔 채 잠들고, 안경을 벗지 못한 채 꾸벅꾸벅 졸던 어머니는 이내 안경을 벗고 아이 곁에 누워 깊이 잠든다. 여기서 그동안 앞선 화에서 보여줬던 어머니의 강압적이고 히스테리적인 ‘아시안맘, 타이거맘’의 규율과 돌봄은 선과 악처럼 딱 잘라 나뉘지 않고 서로 겹쳐 나타난다. 성형 권유와 사랑의 언어가 충돌해 온 이 작품의 동맥 위에, 그 장면은 “강요”와 “지지”가 실제 생활에서는 얼마나 복잡하게 포개져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구성은 한국 방문(귀환 여행)을 ‘여기/거기’의 선택지로 제시하지 않는다. 작품은 귀환을 서사의 전환 축으로 삼되, 핵심 가치를 ‘이동’ 그 자체에 둔다. 장소의 이분법을 넘어, 억양·호명·응시가 바뀔 때마다 달라지는 자기 배치의 기술이 이야기의 동력으로 제시된다. 이 전환은 작품 바깥에서도 울림을 만든다. 한국의 독자층 역시 이 텍스트를 통해 디아스포라와 정신건강의 교차를 공동의 의제로 읽어내며, 국경을 건너는 감정의 호명에 응답한다. 『In Limbo』가 남기는 것은 “어디에 속하는가”보다 “어떻게 이동하며, 어떤 언어로 다시 자신을 부르는가”라는 질문이다. 그 질문 앞에서, 데브는 더 이상 수동적이지 않고 침묵과 발화, 한국어·영어·이미지 사이를 오가며 자기 명명의 문장을 자신의 속도로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림보에서 호흡으로>
한국의 독자는 이 책을 통해 ‘해외 한국계’를 관찰하던 시선을 잠시 거두고, 언어의 무게와 호명의 방식을 자기 삶에서 되짚어 볼 수 있다. 익숙해진 “한국식 예쁨”의 기준, “성취=도덕성”이라는 은근한 합의, “집에서는 본명/밖에서는 영어 이름” 같은 이중 장치가 실제로 누구를 안심시키고 누구를 배제하는지 묻게 된다. 『In Limbo』는 여기서 더 나아가 ‘내가 나를 부르는 이름’과 ‘타인이 나를 부르는 이름’ 사이의 거리를 스스로 관리하는 법을 제안한다. 국경을 넘어 공유될 수 있는, 이 책의 가장 실용적인 유산이다.
이 작품은 피해/가해, 여기/거기, 한국어/영어 같은 이분법의 틈을 ‘머무는 시간’으로 확장한다. 청회색 팔레트는 감정의 소음을 낮추고, 넓어진 거터와 여백은 독자에게 숨 돌릴 공간을 건넨다. 이름의 철자와 발음, 말풍선의 크기와 자간, 과감한 클로즈업과 그리드의 파열은 모두 한 방향을 가리킨다. 더 크게 말하기가 아니라 자기 목소리로 말하기—코드 스위칭에서 자기명명으로의 이동이다. 데브/정진의 쌍은 하나를 버리거나 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 권한을 배분하는 기술로 정리된다. 귀환(한국 방문)은 귀속의 완결이 아니라 이동의 감각을 배우는 전환 축이며, 상처와 사랑, 규율과 돌봄은 선악으로 갈라지지 않은 채 겹쳐 있는 현실로 제시된다.
그래서 이 성장담은 ‘아이에서 어른으로’라는 직선이 아니라, 흔들림–머무름–이동이 반복되는 타원형 궤적에 가깝다. 그 궤적의 한가운데에 거터의 공백이 있다. 말로 채우지 않은 그 빈칸을 통해 독자는 데브의 호흡을 함께 맞추고, 자기 삶의 언어를 조용히 정리한다. 작품이 남기는 질문도 분명하다. “어디에 속하는가”보다 “어떻게 이동하며, 어떤 언어로 다시 자신을 부르는가.” 그 질문에 답하는 순간, 우리는 타인의 호명으로부터 반걸음 물러나 자기 서사의 첫 문장을 쓸 수 있다. 그것이 이 책이 건네는 가장 단단한 선물이다.
결국 『In Limbo』는 전형적 영 어덜트 성장서사의 틀을 따르면서도, 다층적 성장의 레이어를 세밀하게 포착한다. 한국 독자에게 익숙한 균열과 흔들림을 예민하게 건드리기에, 작품은 긴 여운과 깊은 공감을 남긴다.
1) [횡설수설/이진영]모델 마이너리티, 이진영, 2021년 4월 5일, 동아일보, https://www.donga.com/news/Opinion/article/all/20210405/10624249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