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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한 인간들의 연대와 희망의 원리 -고태호 웹툰의 미학과 윤리

웹툰 작가 고태호의 작품 세계와 미학적·윤리적 특징을 분석하며, 그의 작품이 인간의 내면과 구원의 가능성을 어떻게 그려내는지 다룬다,

2025-11-07 심우일

불완전한 인간들의 연대와 희망의 원리
-고태호 웹툰의 미학과 윤리

1. 방백(傍白)과 얼굴의 미학

고태호는 웹툰 <방백남녀>(2018)로 데뷔한 이래 현재 그의 대표작으로 <당신의 과녁>(2019)<펀치드렁커드>(2023)가 있다. 1993년생인 작가는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인간 심연의 감춰진 이중성을 탐구하는 데에 탁월한 솜씨를 보인다. 그의 작품 세계는 참과 거짓, 선과 악,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오가며, 우리 일상에 감춰진 무의식을 들춰낸다.

우리는 누군가의 행동에서 의도를 읽어내는 버릇이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타자의 행동이 지닌 의미는 주체의 주관적 관념 내에서 작동하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우리는 타자의 의도를 읽는 것이 아니라 우리 무의식에 내재하는 가치판단의 구조를 타자에게 투영한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생각보다 타자에 대해 무관심하며, 타자가 감추고 있는 내면의 진실을 알아차리기 어렵다.

고태호 작가는 데뷔작 웹툰 <방백남녀>에서부터 인간의 무의식에 대한 관심을 드러낸 바 있다. 웹툰 <방백남녀>는 토익 영어반에서 만난 두 남녀 주인공의 일상을 중심으로, 그들이 어떻게 서로에 대해 오해하는지, 그러면서도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며 각자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과정을 다룬다. 이 웹툰의 타이틀인 방백(傍白)’은 연극 용어로 무대에서 한 인물이 무대의 등장인물을 곁에 두고 관객들에게 자기 속내를 드러내는 기법이다. 방백은 배우의 독백이 무대 위의 등장인물에게 들리지 않는다는 약속 아래 수행된다. 쉽게 말해 배우의 독백을 들을 수 있는 대상은 객석에 앉은 관객뿐이다.

극적 장치로서 방백의 효과는 정보의 불균형을 가져온다는 점이다. 정보의 불균형은 연극을 보는 관객들의 심리에 극적 효과를 불러온다. 예컨대 병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은 남자가 사랑하는 연인과 헤어지고자 한다면 어떨까? 그가 사랑하는 연인을 자기 곁에서 밀어내는 행위의 슬픔은 관객들에게 공감을 불러오고, 인물이 처한 상황에 쉽게 몰입할 수 있게 해준다.

마찬가지로 웹툰 <방백남녀>는 방백이라는 극적 기법을 차용(借用)해 남녀 주인공의 트라우마를 독자들에게 고백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 작품은 제1화에서부터 검은 배경 화면을 통해 인물들의 무의식 세계로 진입하고, 붉은색으로 처리된 말풍선이 영화의 내레이션 방식처럼 활용되어 인물들의 속내를 드러나는 방식으로 연출된다.

이 과정에서 남자 주인공 민남주는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축구 선수로 실패한 현실에 좌절하고 있다는 것, 여자 주인공 여주혜는 결핍된 가정환경으로 인해 타인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는 점을 독자들은 알게 된다. 웹툰에서 사용되는 붉은 말풍선은 일상에서 어긋난 느낌을 주고, 인물의 은폐된 무의식을 드러내는 장치이며, 부모의 일상적인 질문을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하는 인물들의 행위는 작품의 분위기를 아이러니하게 이끌어간다.

이러한 연출을 통해 웹툰의 독자들은 현실에 상처받은 인물들의 트라우마에 대해 인식하게 되고, 영어토익반 첫 수업 때부터 서로에 대해 오해하게 되는 민남주와 여주혜의 상황을 지켜보는 독자들은 타자에게 이해받기를 원하는 그들의 마음에 서서히 공감하게 된다. 고태호 작가는 앞의 역설적 상황을 인물들의 얼굴과 공간을 활용해 극적으로 연출한다.

예컨대 민남주가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어리광을 피우는 장면과 경직된 딱딱한 얼굴이 탈색된 흑백사진처럼 교차되며 연출되거나, 때로 인물의 표정이 사라지기도 하며, 아예 검은 얼굴에 예민해진 눈의 움직임만 나타나기도 한다. 이 같은 웹툰 연출은 인물들의 얼굴 변화를 통해 사건을 마주한 남녀의 내면적 충격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색채의 밝기를 탈색시키는 흑백 연출은 인물의 표정과 감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만들고 독자들에게 각인(刻印)하는 효과를 준다. 이러한 흑백 연출은 인물들에 대한 독자의 동일시를 일시적으로 지연시키며, 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되돌아보게 한다. 결과적으로 웹툰 <방백남녀>의 심리 연출은 두 남녀 주인공의 무의식에 침입한 대타자의 응시(사회적 가치와 요구 등)를 독자에게 되돌려준다.

웹툰 <방백남녀>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욕망을 따라가다 보면, 이 작품을 구성하는 작가의 세계관과 독자의 시선이 일치하는 경험에 도달한다. 그 일치의 경험은 매끈해 보이는 우리 일상의 표면에 잡힌 주름진 굴곡이며, 평평해 보이는 우리의 일상이 복잡하고 무수한 이해관계의 산물임을 재인식시킨다. 고태호의 <방백남녀>에서 민남주와 여주혜가 서로 닮아가며 이해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정신분석적으로 보면 사랑은 남녀가 오해를 반복하고 화해하는 과정, 다시 말해 서로를 기만하는 행위를 반복적으로 하고 있다는 데에서 찾아진다. 사랑이라는 환상은 기만적 행위의 반복으로 구성된다.

이에 대한 해제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1813)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영국 사회의 결혼 행위의 관습을 따르고 있는 디아시의 행위를 엘리자베스가 오만하다고 판단하면서 두 남녀는 충돌한다. 그럼에도 서로가 계속해 대화한다는 것, 좁힐 수 없는 간극을 두고 서로에게 말과 행동으로 상처를 주면서도, 남녀의 역할놀이를 지속한다는 사실이 두 여인의 사랑을 완성한다. 이렇게 말과 행동의 불일치가 불러오는 무의식적 욕망의 세계가 바로 고태호에게는 방백의 세계이다.

이 방백은 고태호 작가에게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방백은 무대 위에 올려진 웹툰이라는 가상의 세계와 독자가 살아가는 매끈한 실재 세계를 매개하며, 진실과 거짓, 선과 악, 정상과 비정상, 가상과 실재라는 구분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매듭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 누설되는 공백의 지점이기 때문이다.


2. '벌레'에서 '밀양'으로 그리고 '당신의 과녁까지 

앞에서 언급한 방백의 세계는 고태호 작가의 대표작 <당신의 과녁>에 이르러 인간 심연의 이중성을 포착하는 겹눈의 시선으로 발전한다. 고태호 작가의 작품 세계를 인간 심연을 포착하는 겹눈이라고 호명하는 이유는 그의 웹툰들이 표면으로 드러난 것감춰진 것사이의 낙차(落差)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낙차를 설명하는 적절한 미학적 기법이 있다면 우리는 아이러니라고 부를 수 있다.

아이러니는 일상적 의미가 어떤 특정한 사건을 계기로 그 의미가 반전되면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극적(劇的) 기법이기도 하다. 웹툰 <방백 남녀>에서 남녀의 실제 마음과 그들의 막상 만났을 때 주고받는 말과 행동의 낙차가 바로 아이러니한 효과를 주는 것과 같다. 다만 이러한 아이러니의 미학은 <당신의 과녁>에서 이르러 그 비극성을 더하고 있으며, 주제 의식의 측면에서 한 인간의 운명에 관한 존재론적 물음을 던진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웹툰 <당신의 과녁>은 평범한 삶을 살아가던 청년이 연쇄살인 용의자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면서 사건이 벌어진다. 이 작품의 오프닝이 독특한 것은 주인공 최엽의 시점이 아니라 연쇄살인마가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면서 시작한다는 점이다. 병원에서 곧 죽음을 앞둔 노인이 있다. 그는 일상의 평범한 노인처럼 보이지만 그의 정체는 무수한 연쇄살인을 저지른 연쇄살인마이다. 세상에 태어나 살인 충동을 억누르지 못하고 무수한 살인을 저질렀지만, 죽음을 앞둔 직전까지 사람들은 그가 연쇄살인마라는 사실을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저 하늘을 바라보며 웃음을 짓는 연쇄살인마의 모습은 평범한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때마다 그는 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신이 존재한다면 왜 자신의 살인을 못 본 척하고 있느냐고, 왜 자기의 죄악에 대해 당신은 지켜보기만 하는지 묻는다. 질문과 함께 연쇄살인마는 평온하게 죽음을 맞는다. 이 작품은 신에게 질문을 던지며 평온하게 죽음을 맞은 연쇄살인마와 그의 죄를 덮어쓰고 옥살이를 한 최엽의 처지가 대비되어 다루어진다. 이 같은 웹툰의 아이러니한 상황 연출은 이 작품이 신의 존재 혹은 부재에 관한 묵직한 물음을 던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연쇄살인마는 그 죄악에 맞는 처벌을 받아야 마땅하고, 신이 존재해도 살인마가 죄악에 합당한 처벌을 받지 않는다면, 신은 세상에 없거나 혹은 필요 없다는 것이다. 과연 연쇄살인마의 죄를 덮어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된 최엽이라는 희생양의 삶은 부조리한 현실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이런 점에서 고태호의 웹툰 <당신의 과녁>은 단순한 복수극이 아니라 신의 존재에 대한 물음과 부조리한 세계 내에서 인간의 구원 가능성을 모색하는 작품이다.

웹툰 <당신의 과녁>이 풀어내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비슷한 주제 의식을 보여주고 있는 두 편의 작품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는 소설가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와 이창동 감독의 밀양(密陽)’을 잠시 경유하기로 하자. 이청준의 소설 <벌레이야기> (1985)는 화자인 남편의 관점에서 아내의 변화를 관찰하는 소설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아이가 주산 학원 원장인 김도섭이라는 인물에게 유괴 납치되었다가 살해된 이후 아내의 심경이 변화하는 과정을 일인칭 관찰자의 시점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소설에서 남편의 아내는 처음 아이가 유괴되어 살해된 이후 삶의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신앙의 힘으로 그 상처를 극복하고, 자신의 아이를 살해한 김도섭을 용서하기로 한다. 그런데 막상 아내가 납치범과 대면했을 때 아내는 그를 용서하지 못한다. 정확히 말하면 용서할 기회를 빼앗긴다. 왜냐하면 납치범은 사형이 집행되면 자신의 눈과 신장을 다른 사람에게 이식해 주기로 하고, 오히려 성자와 같은 모습으로 자신이 신에게 구원을 받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 아내는 충격을 얻는다.

이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게 된다. 지금까지 김도섭이라는 납치범을 용서하고자 했던 아내의 노력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아내가 아이의 죽음으로 받게 된 고통에 의미가 있는가? 신의 섭리 앞에서 인간의 영역에서 나올 수 있는 질문들은 모두 무화(無化)된다. 소설 속의 아내는 복수를 원하는 인간의 마음과 신의 섭리를 수용하고자 하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자살한다. 그런데 이 소설의 중간에 다음과 같은 남편의 독백이 나온다.

 

"사람에게는 사람만이 가야 하고 사람으로서 갈 수밖에 없는 길이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사람에겐 사람으로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따로 있는 모양이다." (벌레이야기, 이청준 전집 20, 66.)

 

남편이 관찰하는 대상은 분명 아내이지만, 그가 정작 응시하는 것은 아내 뒤에 드러난 인간의 영역과 그것을 초월한 실재(신의 영역) 사이의 간극이다. 아내가 차라리 납치범을 저주했더라면 아마도 그녀는 죽음(자살)을 면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신의 섭리를 품고자 했고, 그것에 실패함으로써 비극적 인간의 초상으로 남는다. 이 소설은 인간의 영역과 신의 영역을 구분하고 그 경계를 강조하며 사건의 비극성을 강화한다. , 소설에서 말하는 벌레의 의미는 신의 희롱에 꿈틀거리는 인간적 삶의 무력함이다.

반면 <벌레이야기>를 원작으로 하는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은 원작 소설을 뒤집어 놓는다. 앞의 소설과 마찬가지로 아들이 범인에게 유괴되어 살해당한 영화의 주인공 신애는 교도소에서 유괴범과 대면하고, 자신의 용서를 받았다는 범인의 태도에 고통받고 괴로워하지만 소설 속의 아내처럼 자살하지 않는다. 대신 영화는 신을 향해 분노하며 부정하는 신애의 모습을 보여준다. 예컨대 아파트에서 열리는 성경 모임 장소에 돌을 던지고, 자신에게 치근거리는 목사와 성관계를 맺고, 유괴범의 딸에게 화를 내는 신애의 모습은 지극히 인간적인 반응이다. 다시 말하면 이 너저분한 인간의 삶은 신의 손짓에 부정당하거나 거세되지 않고 그럼에도 향유된다.

신애도 손목을 긋는 행위를 통해 소설 속의 아내처럼 자살을 시도하지만, 그 순간 신애가 내뱉는 말은 "살려주세요. 살고 싶어요."이다. 영화는 인간의 너저분한 삶을 신의 영역과 비교하며 구차한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죽는 것이 차라리 나을지 모르는 상황이더라도, 사는 것이 부끄럽게 여겨질지라도, 살고 싶다는 욕망 그 자체는 긍정성을 지닌다. 그리고 이것이 영화의 타이틀과 공간적 배경이 밀양(密陽)인 이유이다. ‘은밀한 태양은 바로 죽음에 가까운 불행에도 끝없이 이어지는 삶의 희망을 의미한다.

3. 죄 없는 고통과 구원의 주체

그렇다면 웹툰 <당신의 과녁>의 경우는 어떠한가? 앞의 두 작품이 사건이 끝난 이후 남겨진 자들의 이야기라면, 웹툰은 죄 없이 범죄에 희생된 희생양(죽은 아이)의 관점에서 발화된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웹툰 <당신의 과녁>고통은 죄에서 오는가?”라고 질문을 던지고 있는 성경의 욥기를 모티프로 한다. 그래서 이 작품의 주인공 이름도 최엽이다.

성경의 욥기에서 욥은 하느님이 내린 고난을 의심하지 않고, 자신이 겪는 고난이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다고 믿는 자이다. 그러나 인간의 눈으로 본다면 욥의 고난은 그가 고통받아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아무런 죄도 없는데 불행한 인간이 존재한다면, 삶의 불합리성으로부터 구원해 줄 수 없는 신이란 아무 의미가 없는 것 아닐까? 근대 이후 니체의 말처럼 신이 죽었다면 우리는 자신의 불행으로부터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앞의 작품들과 비교할 때 선명해진다. 소설 <벌레이야기>의 경우 아내는 신에 대한 믿음과 아들의 죽음이라는 두 사건의 괴리 사이에서 죽음을 선택한다. 소설은 인간의 삶이 신의 희롱에 농락당하는 벌레와 같지만, 욥과 같이 신의 섭리를 마냥 받아들일 수 없는 인간도 있다는 것을 간증하며 인간 운명의 비극성을 강조한다. 반면 영화 <밀양>은 과감하게 신의 거대한 섭리를 부정한다. 신의 섭리에 의지하는 대신 인간의 삶은 스스로 구원해야 하며, 누구도 삶을 대신해 줄 수 없다고 말한다. 인간은 각자의 지옥에서 산다는 니체의 말처럼 우리는 각자의 지옥을 자신의 몫만큼 견디며 삶을 지속하는 것이다.

하지만 웹툰 <당신의 과녁>은 앞의 두 작품처럼 죽음의 절망과 막연한 삶의 희망 대신 타자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는 공동체적 연대라는 구체적 비전을 제시한다. 이 지점에서 웹툰 <당신의 과녁>은 성경의 욥기는 물론 앞의 두 작품과 결을 달리한다. 바로 부당한 희생을 당한 자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는 공동체적 연대만이 신의 구원을 대신하는 하나의 가능성일 수 있다는 웹툰의 관점은 구원이란 신이 아닌 바로 곁의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웹툰에서 최엽은 억울한 살인 누명의 피해자로 등장하고, 그가 처한 아이러니한 상황들은 작품을 보는 내내 독자들의 가슴을 짓누른다. 그가 억울한 살인 누명의 피해자라는 것을 모두 인지하고 있음에도 그를 향한 사회적 낙인은 사라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최엽과 절친했던 친구들과 그를 둘러싼 가족들의 무의식에 새겨진 낙인의 흔적이 지워지지 않고 계속 회귀한다.

예컨대 최엽은 교도소에서 출소한 이후 여동생과 가족들을 만난다. 그때 여동생은 자신의 아이를 최엽에게 소개한다. 최엽에 대한 편견이 없는 조카는 집에서 그와 함께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덕분에 기분이 좋아진 최엽은 잠시 조카와 산책을 다녀오겠다고 여동생에게 말한다. 그 순간 여동생과 그의 남편은 은밀히 감춰왔던 최엽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낸다. 이 상황은 화목한 가족처럼 보이는 장면 다음에 인물들의 표정이 경직되는 장면이 반복되도록 연출되는데, 이러한 대비적 연출은 최엽을 향한 사회적 낙인이 가족 내부에서도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작품의 초반부는 최엽을 향한 사회적 낙인 효과가 강조된다. 최엽의 살인 누명이 벗겨졌음에도 지속되는 사회적인 낙인 효과는 그를 계속 괴롭힌다. 그로 인해 누적된 최엽의 복수심은 자신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운 연쇄살인마의 가족들을 향한다. 작품의 초중반까지 최엽은 자신을 괴롭히는 고통에서 스스로를 구원하고자 애쓰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고통을 타자에게 되갚기 위한 복수와 응징을 선택한다.

자신에게 억울한 옥살이를 시킨 연쇄살인마의 가족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가 연쇄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감춘 연쇄살인마의 가족들에게 복수하고자 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연쇄살인마의 손녀를 납치해 지하감옥에 가두는 똑같은 방법으로 응징하고자 했던 최엽의 시도는 불한당들에게 납치되는 연쇄살인마의 손녀를 구출하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으로 전개로 반전되고, 최엽의 복수는 실패한다. 오히려 딸의 목숨을 구해준 최엽에게 용서를 구하는 연쇄살인마의 가족들을 바라보며, 그는 앞의 두 작품처럼 복수의 기회를 박탈당한다.

앞의 소설과 영화의 경우 아이의 부모들이 살인범을 용서할 기회를 박탈당했다면, 웹툰에서 최엽(죽은 아이)은 복수의 기회를 빼앗긴다. 복수의 기회를 빼앗긴 최엽은 삶의 동력을 빼앗기고, 삶의 동력을 잃은 최엽의 마지막 선택은 자살로 이어진다. 그는 폐공사장의 천장에 밧줄을 묶고 스스로 목을 맨다. 그런데 정신이 혼미해지며 정신을 잃은 최엽이 다시 눈을 떴을 때 밧줄이 끊겨 있고, 떠오르는 태양이 그의 눈을 가득 메운다. 과연 자살에 실패한 최엽이 바라본 태양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가 마주한 것은 신의 섭리일까? 웹툰은 어떠한 진실도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이후의 장면들에서 우리는 그 태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자신을 밀어냈던 가족과 친구들이 서서히 최엽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되는 모습에서 이 작품이 말하는 구원은 추상적인 신의 섭리가 아니라 바로 그를 곁을 떠나지 않고 머물렀던 공동체적 연대에 있음을 알게 된다. 여러 복잡한 이해관계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친구들이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 다시 말해 서로 다투면서도 관계를 지속하는 것이 바로 사랑의 원리라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웹툰 <당신의 과녁>은 구원을 초월적인 신에게서 맡기지 않고, 공동체라는 집단의 문제로 이동시킨다. 고태호 작가는 만약 신이 부재한다면, 그 자리를 대신해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최엽에게 자신들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며 그의 가슴에 응어리진 복수심을 풀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친구들의 모습은 우리가 사회적 희생자들을 대하는 윤리적 태도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말해준다. 결국 웹툰 <당신의 과녁>이 말하고 싶은 것은 이 불합리한 세계를 견디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우리가 서로에게 구원이 되는 것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쯤에서 작품의 타이틀에 등장하는 과녁의 의미에 대해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웹툰에서 과녁의 첫 번째 의미는 연쇄살인 사건이라는 사회적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희생양으로 선택된 최엽을 의미한다면, 두 번째 의미는 최엽이 계획한 복수의 대상들이고, 세 번째 의미는 사회의 부조리한 폭력(연쇄살인사건을 덮기 위한 부조리한 경찰의 수사)이 다시 폭력을 재생산하는 순환의 구조이다. 이 세 개의 과녁은 부조리한 세계를 만들어내는 폭력의 순환 고리를 의미하며, 이러한 폭력의 재생산과 순환의 과정을 끊어내려는 연대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작가의 목소리에 우리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4.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

이렇듯 인간의 감춰진 이중적 욕망을 지속해 관찰하던 고태호 작가의 작품 세계는 더 직접적으로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인간의 무의식에 대한 탐구로 나아간다. 고태호 작가의 세 번째 웹툰 타이틀은 <펀치드렁커드(punch drunk)>, ‘펀치드렁커드는 복싱 선수들과 같이 반복적으로 머리에 타격을 입게 되면 않게 되는 뇌 손상을 가리키는 스포츠 의학 용어이다.

그런데 왜 고태호 작가는 웹툰의 타이틀로 펀치드렁커드를 선택했을까? ‘주먹으로 치다를 의미하는 펀치(punch)술에 취한 상태를 가리키는 드렁커드(drunk)를 조합해 보면 그 의도가 드러난다. 바로 펀치드렁커드는 현대 사회에서 반복되는 정신적 충격과 심리적으로 무너진 인간성에 대한 환유로 읽을 수 있다.

웹툰 <펀치드렁커드>는 야유회를 다녀오던 서울 소재 정신병원 환자들이 폭설로 인해 외부의 접근이 어려운 휴게소에 고립되면서 시작한다. 문제는 휴게소에 병원의 환자들과 함께 평범한 일반인들도 함께 고립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신과 전문의인 주인공 도민수는 두 집단의 미묘한 신경전과 충돌로 인해 예상치 못한 사건에 휘말린다.

이 작품은 도입부터 아이러니하다. 가족과 직장 내 인간관계로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는 정신과 전문의 도민수가 정신질환을 앓는 환자들을 치유한다는 설정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는 유튜브 안에서 유명한 쇼닥터이지만, 정작 자신은 직장에서 그 실력을 의심받고, 부모와 연인의 무관심에 상처받으며 사는 평범한 개인이다. 웹툰에서 정신병원의 환자들을 치료하는 정신과 전문의가 심리적 트라우마를 앓고 있는 것으로 설정한 것은 환자들이 앓는 내면의 결핍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집단적이고 공동체적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특히 웹툰에서 정상적으로 보이는 일반인들이 병원의 환자들에게 보이는 편견과 이분법적 태도는 누가 보더라도 폭력적이다. 예컨대 정신병을 앓고 있다는 이유로 환자들의 증언이 일반인들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오해를 사게 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휴게소의 부엌에서 갑자기 화재가 발생했을 때, 누가 방화했는지 밝혀지지 않았음에도 환자들이 범인이라고 지목을 당하거나, 방화범이 아니라는 환자들의 주장은 일방적으로 기각된다. 그 외에도 환자들의 화장실 사용을 제한하거나, 행동을 감시하고, 같이 있는 것이 불안하다는 이유로 휴게소 이층 공간에 격리한다. 이러한 일반인들의 태도에 대해 도민수와 정신병원의 보호사들이 이의를 제기해 보지만, 아무도 설득하지 못한다.

또한 인간 내면의 분열적이고 이중적인 태도는 휴게소에 고립된 일반인들뿐만 아니라 정신병원 측의 구성원들 내부에도 존재한다. 일반인들이 환자들을 대하는 차별에 분노하는 수간호사가 정작 일에 서투른 막내 간호사에게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며 가혹하게 대하는 장면을 예로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웹툰의 설정은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일방적으로 옹호하거나 부정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결핍과 분열을 중립적이고 관찰자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보여준다.

웹툰 <펀치드렁커드>는 군상극의 형식으로, 정상으로 보이는 일반인도 사실 내적 결핍을 지니고 있으며, 그로 인해 고통받고 있음을 드러낸다. 평범해 보이는 중년 부부, 자살을 꿈꾸는 부부의 딸, 체면을 중시하는 노인, 타인과 비정상적인 성관계에 집착하는 젊은 여성, 분노조절장애를 앓는 폭력적인 남성 등등. 그들은 표면적으로 정상인처럼 보이지만, 단지 정도의 차이일 뿐 그 내면에 각자의 결핍을 지니고 있음을 웹툰을 읽어 나가는 과정에서 알아차리게 된다. 이렇듯 웹툰 <펀치드렁커드>는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이분법을 거부하고, 현대 사회에서 고립된 인간들의 내면에 감춰진 아픔과 욕망 그리고 두려움을 독자들이 목격하도록 한다.

그런데 왜 웹툰 <펀치드렁커드>의 공간적 배경이 거세게 눈이 내리는 고립된 휴게소일까? 하염없이 내리는 눈은 일종의 상징적 장치로 볼 수 있다. 끊임없이 흔들리고 쌓여가는 눈은 혼란한 우리들의 불안한 내면의 운동성을 드러내는 은유이고, 그 눈이 쌓여가는 고립된 휴게소는 외부 사람들이 쉽게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한 무의식의 세계를 상징한다. 이 같은 공간적 상징의 맥락을 고려하면, 휴게소에 고립된 사람들이 자기 내면의 결핍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서로 소통하게 된다는 것은 이 작품의 핵심적 메시지를 구성한다.

이 소통 과정을 통해 정상성이라는 사회적 기준이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지, 그리고 우리는 누구나 각자의 지옥에서 마음의 병을 앓고 있으며, 그것을 치유하는 방법은 서로에게 손을 내미는 연대임을 설득력 있게 드러낸다. 아마도 우리 내면의 결핍을 병리학적인 것이 아니라 소통의 출발점으로 바라본다는 것이 이 웹툰의 가장 큰 반전이 아닐까? 자신의 결핍을 타인에게 드러내는 일이 타자에게 공격받거나 사회적으로 배제되어야 하는 약점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는 소통의 출발점이 된다는 사고의 전환을 불러온다는 것이야말로 이 작품의 진정한 가치일 것이다.

5. 환멸의 세계에서 공동체적 연대로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고태호 작가의 작품 세계는 인간 내면의 균열을 집요하게 응시하면서도, 윤리적 구원의 가능성을 공동체 속에서 모색하는 여정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초기작 <방백남녀>에서부터 방백의 형식을 통해 인간 내면의 분열을 성찰해 왔으며, 우리의 의식은 타자의 내면에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그럼에도 타자와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가는 행위에서 우린 미약하나마 구원 가능성을 모색하게 된다.

데뷔작 <방백남녀>가 좁은 남녀 사이의 감춰진 무의식의 세계를 관찰하는 것에 머물렀다면, 후속작 <당신의 과녁>에서부터 작가의 사유는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되는 양상을 보인다. 고태호 작가는 죄 없는 인간의 고통과 사회적 낙인이 만들어내는 폭력의 순환을 폭로하고자 한다. 그의 대표작 <당신의 과녁>에서 주인공 최엽은 살인 누명으로 인해 감옥에 갇히게 되고, 그 충격으로 그의 어머니는 쓰러지고, 사랑하던 연인에게 버림을 받았으며, 출소 이후에도 정상적인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한 채 사회적 배제라는 부당한 처벌을 받는다.

이 과정에서 독자들은 최엽을 둘러싼 인간들의 이중적인 태도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환멸 그리고 은밀하게 작동하는 사회적 낙인으로 인한 배제의 메커니즘 마지막으로 진실에 무관심한 세상의 부조리를 목격한다. 이렇게 신이 부재하는 세상에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을까? 이 같은 물음에 고태호 작가는 그 가능성을 불완전한 인간들의 공동체적 연대에서 찾는다.

이 같은 작가의 전망이 형상화된 작품이 바로 <펀치드렁커드>이다. 이 작품은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분되는 이분법적 관점의 경계를 허물고, 낯선 타자를 향한 무차별적인 적개심과 일상적인 폭력의 세계를 긴장감 있게 그려낸다. 고립된 휴게소라는 공간에서 정신병원의 환자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광기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정상성의 기준을 뒤흔든다. 특히 의사인 주인공조차 공황장애와 알코올중독을 앓고 있다는 설정은 정상으로 보이는 우리들이 사실 각자의 결핍과 아픔을 견디며 살아가는 존재임을 드러낸다.

이처럼 고태호 웹툰의 미학은 드러난 것과 감추진 것 사이의 불일치라는 아이러니를 핵심 기법으로 삼는다. 그는 이를 통해 인간 내면의 분열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 낙차를 메우기 위해 서로의 불완전한 결핍을 인정하고 연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고태호 작가에게 구원이란 신의 섭리에 자기 삶을 내맡기는 초월적이고 관념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삶의 고통을 함께 견디며 서로에게 손을 내미는 행위이다. 이러한 구체적인 연대와 협력의 과정에서 우리는 구원의 가능성을 비로소 사유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고태호의 작품들은 인간 내면의 이중성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그로 인해 각자의 지옥을 살고 있는 인간 존재의 심연에 감춰진 무의식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작가는 주어진 현실 세계에 대한 비관이나 인간 존재에 대한 회의주의로 빠지지 않는다. 부조리한 현실에서도 집요하게 희망의 원리를 찾고자 하는 그의 작가 정신은 고통의 원인이 되는 인간에게서 동시에 구원의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고태호 웹툰의 독특성을 만들어내는 미학적 토대가 되고 있다.

필진이미지

심우일

· 1983년생  
· 중앙대학교 일반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 과정 졸업 
· 선문대학교 대학원 K-언어문화기업학과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