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 머무는 곳, 흩어진 이야기가 만나는 자리, 만화축제
만화는 어디에 머무를까. 책장에 꽂힌 만화책일 수도 있고, 휴대전화 속의 웹툰일 수도 있다. 또는 전시장에 걸린 한 장의 이미지에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품을 다 읽고 책을 덮고, 화면을 닫거나 전시장을 나선다고 해도 이야기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독자는 마음에 남은 장면을 친구에게 이야기하고, 온라인상에서 감상을 남기며, 좋아하는 캐릭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작가의 손에서 시작된 만화는 독자를 만나고, 독자의 생각과 경험을 거치며 또 다른 이야기로 이어진다.
이처럼 만화에 관한 이야기는 저마다 다른 장소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펼쳐진다. 하지만 평소에는 각자의 자리에서 만화를 즐기고 만들던 사람들이 한 곳에 모이는 때가 있다. 바로 만화축제이다. 작가는 작업실을 나와 독자를 만나고, 독자는 작품 뒤에 있던 작가의 목소리를 듣는다. 비평가와 연구자들은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작품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과 만화 문화와 산업에 대해 의견을 나눈다. 만화를 좋아하는 팬들은 자신이 즐기는 작품과 캐릭터를 코스프레하며 다른 사람들과 공유한다. 이처럼 만화축제는 평소 서로 다른 곳에서 이루어지던 창작과 감상, 비평과 다양한 문화활동이 한자리에 모이는 장소이게 한다.
이러한 만남이 반드시 새로운 작품이나 특별한 성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낯선 작품과의 만남이나 우연히 나눈 대화가 새로운 생각의 출발점이 될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있다. 그런 의미에서 만화가 ‘머무른다’는 것은 멈춘다는 뜻이 아니다. 머무르다의 의미처럼 서로 다른 이야기가 잠시 한 곳에 모이고, 그 만남을 통해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만화축제는 사람들에게 어떤 경험을 제공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온라인 시대, 왜 다시 오프라인 축제일까.
이제는 만화를 보기 위해 만화방이나 대여점과 같은 특정 장소를 찾아갈 필요는 거의 없다. 만화를 보고 그에 관한 생각을 나누는 일 또한 마찬가지이다. 독자는 웹툰 플랫폼에서 작품을 감상하고 SNS에서 다른 독자들과 의견을 나눈다. 작가 역시 온라인을 통해 자신의 작품을 소개하고 독자의 반응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만화를 매개로 한 소통이 온라인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작가와 독자가 반드시 같은 공간에 모여야 할 필요는 줄어들었다. 온라인에서도 충분히 만화를 즐기고 이야기를 나룰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만화축제를 찾아간다. 어째서 사람들은 축제를 통해 굳이 한자리에 모이려고 하는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온라인에서 작품을 접하는 것과 만화축제에서 직접 만나는 것은 서로 다른 경험을 제공한다. 온라인에서는 자신의 취향에 맞는 작품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알고리즘 시스템은 이러한 상황을 더욱 강화하고, 독자가 새로운 작품을 접할 기회를 줄어들게 만든다. 하지만 축제의 장에서는 평소 관심을 두지 않았던 작품과 우연히 마주칠 기회가 생기기도 한다. 인기 웹툰을 보러 갔다가 낯선 독립만화 표지 앞에 발걸음을 멈추고, 굿즈를 구경하다가 창작자의 제작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 이처럼 처음부터 계획하지 않았던 만남이 새로운 작품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때로는 자신의 취향을 넓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작가에게도 차이가 있다. 댓글과 조회 수는 독자의 반응을 알려주지만, 자신의 책을 펼쳐 보는 사람의 표정이나 독자가 직접 건네는 질문은 다른 경험을 준다. 독자 역시 완성된 작품만이 아니라 그 작품을 만든 사람의 고민을 들을 수 있다.
취향이 사람을 만나는 방식
만화축제에 오는 사람들을 단순히 ‘관람객’이라고 부르면 놓치는 것이 있다. 누군가는 오래 좋아한 작가의 사인을 받으러 오고, 누군가는 처음으로 자신의 회지를 내놓는다. 코스프레를 준비해 온 사람에게 축제는 좋아하는 캐릭터를 직접 표현하는 무대이다.
특히 코스프레는 만화를 즐기는 방식이 읽기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캐릭터의 의상과 몸짓을 준비하는 과정에는 작품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시간이 담긴다. 그렇다고 모든 참여자가 활발히 참여해야만 축제가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혼자 조용히 전시를 보고 돌아가는 사람도 있고, 몇 권의 만화책을 사는 것으로 하루를 마치는 사람도 있다. 축제가 품어야 할 것은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 여러 방식의 참여다. 서로 다른 취향이 같은 장소에 존재할 수 있고, 원한다면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부천에서 동아리 부스까지, 축제의 크기는 달라도…
1998년에 시작된 부천국제만화축제는 우리나라 만화축제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 대표적인 자리다. 수상작 전시와 작가 대담에 더해 웹툰을 바탕으로 한 음악 행사, 국제코스프레대회 등 만화를 즐기는 방법이 다양하게 펼쳐진다. 2025년에는 야외만화카페와 캐리커처 체험, 작가 사인회도 운영됐다.
그렇지만 만화축제의 가치는 규모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코믹월드처럼 동아리와 아마추어 창작자가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행사는 다른 만남의 방식을 보여준다. 참가자는 거대한 전시의 주인공이 아니어도, 작은 책상 하나에 자신이 만든 이야기를 펼쳐 놓을 수 있다. 독자는 그 책을 만든 사람에게 바로 말을 걸 수 있다.

독립만화 축제의 역할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기존의 상업적인 출판과 플랫폼 중심의 유통 구조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창작자들에게는 작품을 발표하고 독자와 만나는 기회가 중요하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하고싶은 만화전(하만전)>이다. 2021년 온라인 전시로 시작해 2024년부터 독립 출판만화를 중심으로 한 오프라인 북페어로 발전한 이 행사는 다양한 독립만화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직접 선보이는 자리다. 특히 2025년에는 신작 발표를 장려해 독자들이 새로운 만화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넓히고자 했다. 이처럼 독립만화 행사는 작품을 판매하는 자리를 넘어, 기존의 유통망에서 쉽게 발견하기 어려웠던 만화가 새로운 독자를 만나는 통로가 된다.
한편으로 학생의 입장에서 축제 준비는 그림을 그리는 일만이 아니다. 몇 장을 인쇄할지, 표지는 어떻게 만들지, 자신의 작품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어떻게 설명할지도 결정해야 한다. 동아리 부스에 나란히 앉은 친구들은 서로의 판매 방식과 관람객의 반응을 보면서 배운다. 아직 진로를 확신하지 못하는 학생이 처음으로 자신의 작품을 공개하고, 동료와 관람객의 반응을 듣는 경험은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완성된 작품뿐 아니라 작업 중인 시도까지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학교의 작은 축제는 독특한 역할을 한다.
축제에서 실제로 시작된 새로운 이야기
축제에서 새로운 창작이 이루어진 사례도 있다. 2007년 프랑스 앙굴렘 국제만화축제 무렵 만화가 루이스 트롱댕의 제안으로 ‘24시간 만화 만들기’가 진행됐다. 참가 작가들은 첫 칸과 마지막 칸에 눈덩이를 등장시킨다는 조건 아래 하루 동안 24쪽짜리 만화를 그렸다. 이때 만들어진 이야기 중 아홉 편은 같은 해 《Boule de neige》(눈덩이)라는 책으로 묶여 출간됐다. 축제의 프로그램이 새로운 작품을 낳고, 그 결과가 행사장 밖의 독자에게까지 이어진 것이다.
![20《Boule de neige》 2007 앙굴렘 국제만화축제에서 그린 작품을 묶은 《Boule de neige》 [필자 제공]](https://www.kmas.or.kr/img/archive/webzine/bbs/images/000087/20261029100415662_4I24IVE6.jpg)
영국의 만화축제 ‘소트 버블(Thought Bubble)’ 역시 새로운 창작자를 발굴하고 작품 발표로 이어지는 기회를 마련해 왔다. 2007년에 시작된 이 축제는 만화 전문 출판사 《2000 AD》와 함께 신인 글 작가와 그림 작가를 발굴하는 '2000 AD 탤런트 서치(Talent Search)'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2025년 11월 15일부터 16일까지 영국 해러깃에서 개최된 행사에서는 참가자들이 자신의 이야기와 그림을 심사위원들에게 선보였으며, 글 부문에서 릴리스 앨런(Lilith Allen), 그림 부문에서 필립 리드(Philip Read)가 선정되었다. 두 사람은 이후 단편만화 <Creature Featurette>를 함께 제작했고, 이 작품은 2026년 4월 22일 발행된 《2000 AD》 제2479호에 정식 게재됐다. 축제에서 마련한 창작 기회가 실제 작품 발표와 신인 작가의 상업 출판 데뷔로 이어진 사례라 할 수 있다.
결과가 없어도 남는 것들
그렇다면 새로운 작품이나 계약이 이루어지지 않은 축제는 실패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처음 만난 만화가 마음에 들어 이후의 연재를 찾아보는 독자가 있을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작업 방식을 보고 자신의 그림을 다시 생각하는 학생도 있을 수 있다. 물론 가능성이 있다는 말만으로 모든 축제를 좋게 평가할 수는 없다. 제대로 만날 기회가 없고, 일부 인기 작품과 판매 행사만으로 공간이 채워진다면 다양한 이야기가 오갈 여지는 좁아진다.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다는 사실과 그 안에서 충분한 만남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다르다.
만화에 관한 이야기가 언제나 즐겁고 화기애애할 필요도 없다. 창작 노동과 연재 환경, 인공지능 기술의 활용, 원작을 다른 매체로 옮길 때의 권리문제처럼 사람마다 의견이 엇갈릴 주제도 있다. 축제가 이런 질문을 피하지 않고 작가와 독자, 산업 관계자가 함께 들을 기회를 마련한다면, 축제는 구경하는 공간에서 만화의 오늘을 논의하는 자리로 넓어질 수 있다.
앞으로의 만화축제는 무엇을 해야 할까
만화축제가 앞으로도 필요한 공간이 되려면 더 많은 사람을 모으는 일과 함께,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만날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인기 작가의 행사와 대형 전시는 분명 관객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 하지만 그 옆에 신인과 독립 창작자가 설 자리가 있는지, 관람객이 작품에 관해 질문할 기회가 있는지, 서로 다른 세대와 취향이 지나치지 않고 마주칠 수 있는지도 살펴야 한다.
작은 부스를 위한 적정한 참가 비용, 처음 참여하는 사람을 돕는 안내, 작가와 독자가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시간부터 시작할 수 있다. 학생에게는 작품을 보여주는 기회뿐 아니라 현업 작가에게 질문하고 조언을 듣는 시간이 도움이 될 것이다. 출판과 플랫폼의 관계자도 완성된 성과만 살피기보다 아직 형태를 갖추지 않은 시도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실제 참여에는 부담도 따른다. 부스 참가비와 인쇄비, 행사장까지의 이동 비용은 작은 창작자에게 가볍지 않다. 신청 방식이 복잡하거나 참가 자격이 지나치게 제한되면 처음 나온 사람은 문턱에서 돌아설 수 있다. 다양성을 이야기하려면 누가 비용과 시간을 감당해야 하는지도 함께 따져야 한다. 축제가 끝난 다음을 연결하는 일도 중요하다. 현장에서 만난 작품을 온라인에서 다시 찾아볼 수 있게 하고, 소규모 창작자와 동아리의 활동을 소개하며, 행사에서 나온 대화와 제안을 기록해 나누는 것이다. 온라인은 오프라인 축제의 경쟁 상대가 아니라 축제 이후의 이야기를 이어주는 통로가 될 수 있다. 축제가 며칠간 열리는 행사라면, 그 안에서 맺어진 관계는 더욱 오래 이어질 수도 있다.
만화가 머무는 곳, 다시 흘러가는 곳
축제가 끝나면 전시물은 철거되고 부스는 비워진다. 작가는 작업실로 돌아가고 독자는 다시 책장을 넘기거나 휴대전화 화면을 켠다. 하지만 행사장에서 받은 작은 책 한 권, 우연히 들은 질문, 뒤늦게 찾아본 작가의 다음 소식이 일상의 다른 선택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만화는 만들어지고 읽히며 계속 흘러간다. 만화축제는 저마다 다른 활동들이 잠시 동안 한자리에 놓이는 특별한 시간이다. 그곳에서 다음 작품과 독자,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생각이 나타날지는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 그 가능성을 열어 두는 일이야말로 만화축제가 오래 지켜야 할 역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만화가 머무는 곳. 이곳은 다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