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한달전쯤인가 만화기획에 대한원고 청탁전화가웬일인지 전문 만화기획자가 아닌 만화를그리고 있던B에게 걸려왔었다.
어쩌면 전화혼선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 글을 쓰는 지금도 B는 여전히 궁금하지만, ‘만화에 관련된 모든 돈 되는 일을 웬만하면 마다하지 말자!’고 마음먹고 있던 때여서 덜컥 글 청탁을 받아들였다.
만화가이기 이전에 만화독자였으며 지금도 여전히 만화를 읽고 있는 독자이나, 지금은 만화를 읽는 시간보다 만화를 고민하고 그리는 시간이많아진 만화가B로서 이 글을 쓴다.
누가 나의 만화를 읽어주었으면 좋을지 나름대로 희망독자를생각하며 만화를 그리는 오랜 습관으로, 이 글 역시 누가 읽어주었으면 좋을지를 고민하며 글의 흐름을 잡았다.
만화로 생활을 하고 싶은 (돈을 벌고 싶은)만화가로서, 만화로 생활을 하고 싶어 하는 (돈을 벌고 싶어 하는) 만화기획자가 읽어주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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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봉구야, 미정, 김광석 프로젝트 스무 살 |
만화기획에 관해 어떤 방향으로 글을 쓸까 고민만 하고 있던 B에게 지난 한달동안(다행이도) 몇 가지 ‘만화기획’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일들이 있었다.
1.우선은 몇 개의 주목할만한 만화전시회가 있었다.
파주의 헤이리에서 신명환작가의 ‘깔깔깔 구르기 전’(아트팩토리, 2005년 5월 3일~ 6월 6일)이 아동 관람객을 주 대상으로 한, 직접 만지고 구르며 참여할 수 있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고, 부천 만화박물관에서는 온라인과 만화의 새로운 접점을 모색하는 ‘만화, 온라인 모험기’(한국 만화박물관, 2005년 4월 21일~6월 19일)가 카툰작가와 온라인작가들을 중심으로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한일 작가주의 만화 교류전 COMIX & AX ’(2005년 6월 11일 ~ 6월 30일, 안양 롯데 백화점/2005년 7월 4일 ~ 7월 15일, 홍대 꽃 갤러리).
B가 주목했던 위의 세 전시들 이외에도 6월 한 달 내내 몇 개의 만화관련 전시가 더 열리고 있었는데, 그 것은 만화가 B에게 ‘더 이상 만화는 만화책만이 전부는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sicaf(서울 국제 만화 애니메이션 페스티벌),pisaf(부천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등 대규모 만화전시를 비롯한 크고 작은 만화관련 전시들은 한국의 만화지형도 속에서 일상적인 풍경이 되었다.
만화’는 ‘만화책’이라고만 생각했던 만화가와 만화독자들에게 ‘공간’에서의 ‘설치’와 ‘전시’라는 의미 확장을 가져온 ‘만화전시(들)’은 만화를 고민해온 만화기획자들의 힘이자 노력의 결과였다.
만화의 새로운 접근과 독법을 공간의 활용과 설치를 통해 보여준 ‘깔깔깔 구르기 전’과 ‘만화, 온라인 모험기’는 만화기획의 힘을 보여주는 전시의 한 예였다.
그리고 B가 게스트 작가로 참여해 전시의 기획단계에서 작품설치, 관람객/독자와의 만남까지를 경험했던 ‘한일 작가주의 만화 교류전 COMIX & AX’.
언더그라운드만화웹진 ‘코믹스’가 주축이 되고, 일본의 대안만화잡지 ‘AX(악스)의 작가진이 참여하는 이번 전시는 코믹스의 활동 10년을 기념하는 단행본 <베스트 오브 코믹스> (새만화책)의 발간과 함께 이루어진 기획전이었다.
지난 10년 동안의 작품 활동을 통해 대안문화 혹은 비주류문화를 원하는 만화독자라는 비교적 명확한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코믹스의 이번 전시는, 코믹스와 악스의 전시 참여 작가들이 각자 개인의 단편을 발표하고, 그 단편 속에서 의미 있는 한 컷을 발췌, 캔버스에 아크릴 재료로 이미지를 확대, 표현하여, 관람객들이 전시된 캔버스 그림과, 함께 비치된 단편만화를 비교해 볼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만화와 미술의 만남’ 과 ‘관람객이 참여할 수 있는 부분’을 함께 의도한 기획이었다.
그 전시공간은 위층에 멀티플렉스 극장, 같은 층에 식당가가 위치해 있는 등, 유동인구가 많은 백화점에 위치한 공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관람객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B가 주목하는 것은, 그 많지 않은 관람객들 중에서 ‘코믹스’의 전시의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이해한 관람객은 어린아이들이라는 것이었다. (어린아이들은 전시그림과 비치된 만화책들을 비교하가며 만화책 속에서 한 컷을 발견해 내고는 즐거워하곤 했었다.)
전시작품의 내용이 대부분 20대 전후반의 성인에게 맞추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시의 핵심을 이해하고 받아들인 대상 층이 대부분 어린아이였다는 것은, ‘잘못 기획된 전시’가 아닌 ‘그저 발걸음을 옮길 뿐인, 좀처럼 몸을 움직여 참여하지 않는 성인관람객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비교적) 기획의도가 명확하고, (비교적) 좋은 전시공간에서의 기획전도 좋은 관람객/독자를 만나지 못하면 의미를 알 수 없는 그저 평범한 전시를 위한 전시로 보여 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2.그리고 두 번째, 만화가 B는 지난 1년을 포함한 최근 한 달 동안 몇 가지 개인적으로 기획했던 만화(대부분은 만화단행본에 대한 기획들이었다)에 대한 생각과 계획들이 잘 진행되지 않아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사실 만화가B는 만화가를 목표로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 이래 언제나 힘들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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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icx & ax 전시, 깔깔깔 구르기 전, 만화온라인모험기 |
스스로 준비했던 ‘소설의 만화화’에 대한 기획도, 출판사로부터 의뢰를 받았던 ‘아동을 위한 학습만화’의 기획도 대부분 기획단계에서 좀처럼 앞으로 진행되지 않거나 중도에 없던 일들이 되곤 했었다. 만화가 B의 시작이 출판 잡지만화에서 시작되었으므로 가장 이상적인 것은 잡지만화, 혹은 출판만화의 지형도 안에서 만화작업을 지속하는 것이었으나, 이미 출판만화는 최소한의 잡지와 작가군 으로 그 참여의 폭이 줄어들 대로 줄어든 상태였고 B는 그 최소한의 작가군 에서도 이미 멀어져 있었다. B가 출판만화의 대안으로 생각했던 온라인 만화 (그 중에서도 ‘스크롤만화’라고 흔히 불리어지는)로의 접근을 위한 몇 가지 기획들도 진행의 시작단계에서 난항을 겪을 뿐이었다.(B는 포기가 빨랐다.)
만화 이외의 일, 그러니까 소설, 동화책의 삽화작업이나 주간 시사 잡지의 한 컷 만화 등 만화작업을 기본으로 한 여타의 그림 작업들도 가끔의 의뢰로 시작되곤 하였으나, 그 역시 중도하차하는 아픈 계절을 통과해야만 했다. (‘무엇이 문제였기에 일이 잘 진행되지 않는 걸까’를 고민하면, 대부분 개인적 만화그리기의 한계와 작품기획의 어긋남으로 결론 내려지곤 했다.)
만화를 둘러싼 몇 가지 실패의 경험들과 (힘겨웠던) 만화그리기를 통과하며 만화로 살아남기 위해 암중모색, 고군분투 중인 만화가 B는, 스스로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화기획에 대한 고민의 어느 한 부분을 정리해 보기로 한다.(그러니까 이 글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경험과 생각 위에서의 ‘만화기획’에 관한 글쓰기이다.)
여러 만화의 지형도 (출판만화/잡지만화, 학습만화/교양만화, 온라인만화를 중심으로) 속에서 만나본 만화편집자, 혹은 만화 기획자들은 대부분 비슷한 이야기로 B의 기획들과 의뢰했던 기획들을 반려하곤 했었는데, 그것은 ‘독자들(시장)이 원하는 부분이랑 방향이 달라서’ 라는 이유에서였다.(B는 그 안 좋았던 결과들이 ‘편집자/기획자의 (개인적인/주관적인) 편집/기획의 방향과 어긋나 있는데, 독자(들)을 무기(핑계)로 기획들을 반려하고 있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편집자/기획자들의 안테나는 항상 독자들(시장)을 향하고 있으니, ‘독자들(시장)이 원하는 부분이랑 방향이 달라서’라는 이야기는 결국 ‘기획자/편집자가 원하는 방향이랑 달라서’라는 말의 이음동의어가 아닐까라고 생각하고 있다.)
‘한국에서 만화독자란 무엇인가’
‘만화기획자’들이 말하는 ‘만화독자’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는 부분이었다
2. 만화기획자(들)
어떤 독자층이 어떤 만화를 보고 싶어 하는지, 어떤 장르의 만화가 시장에서 잘 팔리고 있는지를 고군분투 분석하는 만화기획자는 있어도, 어떤 만화가가 어떤 만화를 그리고 싶어 하는지, 어떤 만화를 그려왔는지를 생각하고 분석하는 만화기획자들을 만나기는 (좀처럼)힘들다.
만화가 지망생들과 만화가 지망생을 통과한 만화가들에게서 종종 듣곤 하는, 자신의 원고를 들고 찾아간 만화출판사 기자와의 만남에서"이런 만화처럼 그려보면 어때요" 라며 건네어지는 잘나가는 일본만화를 마주했을 때의 당황스러움은,단지 대형 만화잡지 출판사에서만 맞부딪치는 당황스러운 시추에이션이 아니다.
인터넷 포털의 만화담당자들은 "인터넷의 독자들은밝고 가벼운만화를 원하니까"라며 이야기를 시작하고, 한창 기세 좋은 학습만화 (교양만화라고도 불리어지는) 출판사의 담당자들은 요즘 유행하는 소재와 장르와, 잘 팔리고 있는 학습만화들을 펼쳐놓고, 예로 들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좋은(잘 팔리는/돈 버는) 만화를 고민하는 만화가와, 좋은(잘 팔리는/돈 버는) 만화를 고민하는 만화기획자가 만나서, 알 수 없는 독자들의 취향과 선택을 중심에 놓고, 이미 검증받은 좋은(잘 팔리는/돈 버는) 만화책(들)을 예로 들며 새로운 만화를 기획하기 위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언제나 소비자는 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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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암행어사, 순정만화, snowcat in paris |
3. 만화가(들)
출판만화를 중심으로 한 만화가에게 있어서 만화를 발표할 지면이 점차 줄어드는 것도 힘들고, 혹여 지면을 얻어 만화를 연재해도 리액션이 없는 독자의 반응이 무심하고, 좀처럼 팔리지 않는 단행본도 만화그리기를 힘겹게 한다. 무리한 연재 스케줄과 열악한 원고료의 온라인만화가들도 독자들의 따뜻한 댓글(들)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 학습만화를 지향하는 만화가들은 주요독자인 아동의 눈높이와 부모들의 취향에 자신의 그림스타일을 맞추기 위해 자신의 그림스타일을 버린다. (학습만화가 지금처럼 잘 팔리지 않던 시절부터 아동 학습만화에 주력했던 학습만화가들을 제외하고) 자신의 스타일을 버린다는 것은 자신의 이름을 지운다는 것이다.
만화기획자들이 독자혹은소비자의 이름으로 요구하는 각 매체 장르(출판, 온라인)의 틀에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만화를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맞추어 가야하는 만화가(들)과 그들의 만화(들)은 힘겹다.
(독자가 원하는 그림을 그릴 것인가,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그릴 것인가는 작가 스스로의 선택의 문제이지만, 지금 한국의 만화가들(의 대부분)은 ‘독자가 원하는 그림’을 그리기를 강요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강요의 압박에서 자유로운 만화가(들)은 생활(돈)에 자유로운(무심한) 만화가(들) 뿐이다.
4. ‘현재의 만화’에 대한 불안
현재의 만화를 둘러싼 상황들이 좋다고 하기도 하고, 좋지 않다고 하기도 한다. 어떤 지점에서 만화를 그리고, 만화를 기획하고, 만화를 보고 있는지에 따라서 그 판단은 각기 다른데, B는 ‘만화를 둘러싼 상황들’은 좋지만, ‘만화를 둘러싼 사람들’은 그 상황이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대중문화 장르로서의 ‘만화’는 주목받고 있지만, 만화를 둘러싼 사람들 (독자, 기획자, 편집자, 만화가)의 상황은 그리 좋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대중문화 장르로서의 ‘만화’를 주목하게 만든 것도 만화를 둘러싼 사람들의 힘이고, 만화를 둘러싼 사람들의 위기(대개 만화계 내부의 위기의식일 뿐이지만)도 그들 스스로가 만든 것이었다.
특히 출판만화를 중심으로 한 위기의 상황은 꽤 오랫동안 지속적인 불안감을 안은 채, 만화계 전반에 대한 위기의 징후로 읽혀지고 있다.(출판만화는 여전히 만화의 ‘핵’이다.)
그리고 싶은 만화를 (팔리지 않기 때문에) 그리지 못하는 만화가들의 불안과, 보고 싶은 만화를 보지 못하는 (우선은 이미 어렵게 나와 있는 좋은 만화들을 찾아 읽어보라는 말을 하고 싶지만) 독자들의 불만 사이에, 만화가와 만화독자 사이에 위치해 있는 만화기획자들의 힘이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5. 만화기획자(들)에게 바침
결국 만화를 둘러싼 모든 글(들)과 이야기(들)의 끝은 ‘한국만화의 발전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개인적으로는 ‘나는 어떻게 만화로 먹고 살 수 있을 것인가’만을 고민하지만.)
만화를 둘러싼 사람들(만화편집자/만화기획자, 만화평론가, 만화독자/소비자, 그리고 만화가)은 서로의 요구(혹은 욕구)들로 서로 긴장하며 갈등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같은 고민을 안고, 같은 지향점을 향해,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만화를 만드는(보는) 것’ 그리고 ‘잘 팔리는 만화를 만드는 것’
(‘잘 팔리는 만화’가 ‘좋은 만화’인가의 논의는 예외로 한다. ‘(만화로 생활을 하고 싶어 하는)만화가’와 ‘만화기획자’혹은 ‘만화를 산업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만은 ‘잘 팔리는 만화’가 ‘좋은 만화’라는 등식이 성립된다고 생각하지만.)
좋은 (잘 팔리는) 만화를 만들고 싶어 하는 만화기획자들은 흔히 만화독자/만화소비자들이 어떤 만화를 원하는지를 분석하고 데이터화해서, 그 결과를 만화가들에게 이해시키려고 한다. 독자가 주도하는 시장의 목소리(돈)가 중요함을 모르는 바 아니나, 만화를 창작/생산하는 만화가들의 요구(혹은 욕구) 또한 만화문화(시장)의 확대, 발전에 중요한 요소들이다.
어떤 만화가가 어떤 만화를 그려왔는지, 어떤 만화를 그리고 싶어 하는지, 어떤 만화적 고민들을 갖고 살아가는지 이해하고, 분석하고 데이터화하는 일도 독자 혹은 시장을 분석하는 것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만화시장의 축소 (대중문화 장르로서의 ‘만화’매체가 활동하는 공간은 ‘전시 공간’ ‘온라인 공간’ ‘타 문화장르와의 연대’ 등으로 점차 확대되어감에도 불구하고)로 인한 불안이 어떻게 만화가들의 영혼을 잠식하는지, 그들의 불안으로 잠식된 영혼이 어떻게 만화독자들에게 전해지고 있는지 들여다보기를 바란다.
독자(소비자)에게서 만화가(생산자)로의 요구와 소통(혹은 전염)이 아닌, 만화가에게서 독자로의 요구(혹은 욕구)를 이해하고 분석(혹은 상품화)하는 ‘(만화기획의)시작의 전환’을 통해 ‘만화가로부터 독자로의 전염’이라는 ‘새로운 시작’을 기대해본다.
언제나 새로운 만화는 새로운 독자(들)에게서가 아닌, 새로운 만화가(들)과, 새로운 만화를 모색하는 새로운 기획자(들)에게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