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을 위해 달리는 게 꼭 정답은 아니다. 길이 하나라는 고정관념이 나머지 길의 가능성을 가릴 때도 있다. 만화가 인기를 얻은 후에 영화로 만들어지는 게 당연한 수순이라 생각해왔던 이들에게 <환절기>는 신선한 시도처럼 보인다. 이동은 작가가 시나리오를 쓰고 정이용 작가가 그림을 그린 만화 <환절기>는 원래 영화 시나리오로 먼저 개발된 이야기였다. 영화화의 문턱을 넘지 못해 좌절을 겪던 이동은 작가는 정이용 작가와 의기투합해 만화 <환절기>가 태어났다. 그리고 마법처럼, 어쩌면 당연하게 이동은 작가는 감독이 되어 영화 <환절기>를 완성했다. 사실 선후가 중요한 건 아니다. <환절기>는 어떤 방식으로든 세상과 만날 수 있는 이야기였고 정이용 작가의 그림을 빌어 좀 더 일찍 사람들과 소통했을 따름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만화 <환절기>의 매력을 좀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이용 그림작가의 설명을 꼭 들어볼 필요가 있었다. 좋은 이야기는 어떻게 좋은 그림으로 표현될 수 있는가. 그는 수줍음이 많다고 자신을 소개했지만 꾹꾹 눌러 내뱉는 말 한 마디마다 진심이 묻어나는 사람이었다. 여기 신중하고 사려 깊은 그의 말들을 전한다.
Q. 디자인을 전공하고 IT 관련업계에서 일하다가 <환절기>를 통해 만화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고 들었다. <환절기>는 어떻게 시작된 프로젝트 인가.
A. 이동은 작가가 회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영화 시나리오를 쓸 무렵 나는 그의 시나리오를 모니터하는 사람 중의 한 명이다. 몇 작품을 탈고하고 단편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지만 영화제나 공모전, 각종 지원 사업에서 좀처럼 성과는 보이지 않아 지쳐가던 시기다. 그런 상황에서 나온 시나리오가 <환절기>였다. 나는 이 이야기가 무척 마음에 들었고 그냥 묻히는 것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상심한 이 작가에게 위로를 건넨답시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만화로 그려보잔 제의를 했고 그렇게 만화 <환절기>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Q. 먼 길을 돌아 만화가로 데뷔한 셈이다. 만화가라는 꿈은 언제부터 품고 있었나.
A. 내 학창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만화가가 된 지금의 나를 보고 ‘그럴 줄 알았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만화를 그리는 건 좋아하긴 했지만 확신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 시절엔 하고 싶은 이야기도, 이야기를 쓸 자신도 없었다. 솔직히 말해 나 같은 사람은 만화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진로를 결정해야 할 시기에 만화가 아닌 다른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환절기>는 일반적인 사정이나 업계의 어려움을 잘 몰랐기에 가능했던 무모한 도전이었던 셈인데 어쩌면 영영 출간이 안 됐을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진정한 좌절을 맛보고 있었을지도.(웃음) 다행히 처음 낸 결과물을 응원해준 출판사가 있어 두 번째 작품을 그릴 동력을 얻을 수 있었다. 다행스러울 따름이다.
Q. 말하자면 <환절기>가 습작이자 데뷔였던 셈인데 단번에 300페이지짜리 원고로 출간했다.
A. 도리어 연재를 했다면 어려웠을 거다. 그림을 효율적으로 그릴 수 있는 훈련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았기에 매주 마감을 한다는 건 불가능했을 것 같다. 느리게 가더라도 ‘완성’이라는 느슨한 마감이 있는 편이 내게 더 잘 맞았다. 물론 그 전까지 수입이 없다는 게 쉽진 않았지만 자신을 한계상황에 몰아넣는 것보단 견딜만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보다는 주변의 탐탁지 않은 시선을 버티며 자존감을 지키는 일이 가장 버거웠던 것 같다.
Q. 그런 어려움을 감수하고서라도 시도해볼 만큼 <환절기>의 이야기가 매력적이었나.
A. 특정장면보다는 전반적인 정서가 마음을 사로잡았다. 감정을 표출하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 태도도 좋았고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 상황으로 보여주는 우아함에 끌렸다.
Q. 이미 영화화 되어서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니라 컷의 구성이 마치 영화 콘티처럼 세밀합니다. 시점에 대한 배려과 고민도 보인다. 웹툰이 대세인 요즘 책 형태의 구성을 잡은 특별한 이유가 있나.
A. 나는 망가와 아니메 소비 세대였고 이동은 작가는 한국의 인디 만화나 유럽의 그래픽노블, 북미권의 인디 만화에 관심이 많았다. 게다가 웹툰이 한창 성장하던 시기에 다른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둘 다 디지털 매체에 대한 이해가 크지 않은 편이었다. 책이 익숙한 매체였던 셈이다. 대학 시절에는 만화와 조금 거리를 두고 영화를 많이 봤고 영화와 관련된 디자인을 한 적도 있어 내 만화에도 영화를 보면서 익숙해진 기법들이 자연스레 녹아있는 것 같다. 가령 컷을 구성 할 때도 배치를 한다는 생각보다는 이미 배치된 대상에 카메라를 들이댄다는 개념이다. 시나리오를 보면서 공간을 설계하거나 실제 장소를 결정하고 그 공간을 바탕으로 동선을 설계하는 식으로 콘티 짜기도 한다. 덕분에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는 앵글이나 과장된 구성은 거의 없다.
Q. <환절기>라는 제목이 이야기를 완성시켜준다는 인상이다.
A. 처음에는 제목이 없었다. 이동은 작가가 몇 가지 제목을 가져와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계절에 관계된 이름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고 문득 ´환절기´라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직감적으로
적당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인물 각자가 힘든 시기를 지나면서 삶을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이 마치 환절기에 사람들이 신체적, 정신적으로 느끼는 불안정한 상태와 닮았다. 그 시기를 지나면 다시금 새로운 계절에 적응하게 된다는 것까지 말이다.
Q. 사실 분류가 크게 의미 없긴 하지만 <환절기>는 만화책인가, 그래픽노블인가. 어떻게 불리면 좋겠나.
A. 연재가 되지 않고 장편 소설처럼 단 권 정도에서 서사가 완결, 출간되는 만화를 정의하는 용어가 없어서 우리끼린 그냥 ‘만화’라고 부른다. 그래픽노블의 정의에 일부 그런 개념이 포함되어 있고, 때때로 저희 작품도 그래픽노블로 홍보가 되기는 하지만, 만화적 형식으로 볼 때 그저 마케팅 용어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있어서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사용을 자제하고 있다. 하지만 특정한 범주로 지칭되는 것에 대한 욕구가 없지는 않다. 범주가 있다는 것 자체로 어떤 시장이 형성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좋다고 할까. 우리 같은 형태로 작업하는 작가들이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명칭도 생기지 않을까 생각한다.
Q. 본인의 그림체를 한 단어로 설명한다면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A. 심심함?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것이 특징인 것 같다. 원래 좀 심심한 사람이고 눈에 띄는 것도 싫어한다. 심심하게 지내도 큰 불만이 없고 큰 야심도 없다. 심지어 입맛도 심심한 편이다.(웃음) 내 그림이 딱 나 같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나 같다는 게 정확히 어떻다는 건지는 구체적으로 물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심심하다는 뜻 같다. (웃음) 흑백을 선택한 건 전적으로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였다. 채색을 위한 고민을 할 시간에 한 장이라도 더 그리자는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그런 한계를 드러낸 그림체가 긍정적이 반응을 들어서 묘한 기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환절기>는 만화가 현실적인 여건 때문에 포기한 것들, 대표적으로 색감 등을 생생히 표현해주길 바랐다.
Q. 영화와 만화의 가장 큰 차이가 색감인가.
A. 색은 형태보다 좀 더 빠른 속도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효과가 있다. 크게는 작품을 보는 태도를 정하고 작게는 장면을 대하는 태도를 결정하는데 있어 시각적으로 가장 먼저 인지되는 요소다. 영화에선 색이 크게 극 전후반을 중심으로 느낌이 달라진다. 전반엔 색이 어둠과 그늘에 묻혀 있다가 후반엔 대조적으로 화사해진다. 그런 부분이 책에서는 할수 없는 연출이었다. 반면 많은 이들의 지지처럼 만화 <환절기>의 흑백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감정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인물을 묘사하는 만큼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처럼 컷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고 믿고 싶다. 영화와 달리 책은 어떤 장면에 원하는 만큼 머물수 있기에 가능한 선택지이기도 하다.
Q. 그 말처럼 내내 애잔함이 수면 아래에 흐르는 이야기다. 그런 가운데 슬픔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이 특히 좋다. 이런 잔잔한 이야기를 ‘그림’으로 옮기는 과정이 궁금하다.
A. 이동은 작가에게 많은 것을 의지한다. 애초에 영화를 목적으로 했던 시나리오이기에 시나리오를 쓰면서 그려두었던 이미지가 있을 것으로 생각해서 물어보고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가상 캐스팅을 해볼 때도 있다. 캐릭터 디자인도 모두 합의를 거치고, 콘티도 정기적으로 만나서 함께 논의하면서 진행한다. 매 페이지가 완성될 때마다 이동은 작가에게 보여주고 예상과 크게 어긋나는 부분이 없는지 체크한다. 서로가 다른 정서나 느낌이 있을 땐 각자의 주장을 피력하고 설득력이 있는 쪽을 가져간다.
Q. <당신의 부탁>, <니나 내나> 등 이후로도 이동은 작가와 계속 호흡을 이어가고 있다. 파트너로서 어떤 매력이 있나.
A. 사람과 친해지는 것을 다소 어려워하는 나로서는 끊임없이 대화가 가능한 사람이 작업 파트너라는 점이 무척 든든하다. 내 처지와 캐릭터를 잘 이해해주고 서두르지 않는 점이 좋고 항상 고맙다. 다른 글작가와 작업을 하는 모습이 그려지질 않는다. 내 입장에서는 앞으로 이동은 작가가 감독으로서 너무 바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웃음)
Q. 작품이 쌓이면서 두 사람만의 세계가 형성되는 느낌이다. 독특한 인물들이나 변두리 정서를 다독이는 느낌이랄까.
A. 이동은 작가는 평범함 속에 평범하지 않은 사연을 한두 가지 지니고 사는 인물들을 그려낸다. 모든 사람에겐 자기가 평범하지 않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 남다르다는 것은 드물게 특별함으로 다가올 때도 있지만 대개는 외로움, 소외감으로 머문다. 그런 지점에 돋보기를 들이대서 무대에 올려놓고 그들이 평범하다는 것을 재발견하도록 하는 게 우리 만화가 아닐까 싶다.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다.
Q. 어떤 만화가로 기억되고 싶나.
A. 계속 그리는 작가. 그리고 새 작품이 기다려지는 만화가. 물론 아직은 희망사항이다. 만화가로서 공식 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 이유도 있겠지만 사실 데뷔 전과 데뷔 후 달라진 건 거의 없다. 한국만화가 중 마영신 작가를 좋아하고 많은 자극을 받는다. 최근 일본 만화 중에는 아오노 슌주 작가의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을 감명 깊게 봤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이야기되는 작가가 될 수 있으면 더 바랄 게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