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천무 (飛天無)
김혜린의 두 번째 장편인 『비천무』는 1988년~1991년에 걸쳐 대본소용 단행본으로 출판된 작품이다. 이 시기에 우리나라 만화시장은 중요한 변화를 맞고 있었는데, 바로 순정만화잡지의 출현이 그것이다. 이때 김혜린은 『비천무』를 그리는 한편, 만화잡지「르네상스」에는 『...
2002-02-25
노수인
김혜린의 두 번째 장편인 『비천무』는 1988년~1991년에 걸쳐 대본소용 단행본으로 출판된 작품이다. 이 시기에 우리나라 만화시장은 중요한 변화를 맞고 있었는데, 바로 순정만화잡지의 출현이 그것이다. 이때 김혜린은 『비천무』를 그리는 한편, 만화잡지「르네상스」에는 『테르미도르』를 연재하고 있었다. 즉, 마감시간이나 잡지 연재 중 일어날 수 있는 불상사에 구애받지 않고 작가가 자신의 창작욕구로 조절할 수 있는 작품이 바로 『비천무』였다는 것이다. 이 사실에 주목하는 까닭은 『비천무』의 태생 자체가 우리 만화계에서 매우 특이한 지점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전작인 『북해의 별』이나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던 『테르미도르』를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80년대 우리 "순정"만화의 배경은 언제나 서양 지향적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는 일본 소녀만화(특히 이케다 리요코의 작품들)의 영향으로 부흥기를 맞이한 우리 "순정"만화였기에 여전히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반증해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김혜린은 낭만화된 서양을 작품배경으로 하는 것이 당연하던 시기에 중국 원명교체기에 눈을 돌려 『비천무』에 매달린 것이다. 그 결과 "순정"만화에서 굽슬거리는 금발머리, 푸른 눈으로 대변되던 등장인물의 모습이 검은 직모, 검은 눈을 가진 동양인으로 바꿔지고, 레이스 달린 옷자락을 펄럭이던 주인공은 단아한 비단옷을 걸치게 되었다. "순정"만화란 소녀들의 꿈과 낭만을 대변해주는 것이란 암묵적인 인식을 가진 풍토에서 이러한 변화를 시도하는 것 자체가 모험이었다. 게다가 남성성이 극대화되는 무협이란 장르적인 요소를 가미하는 것 또한 "순정"만화에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 당시 소녀들은 하이틴 로맨스를, 소년들은 무협지를 보면서 자신의 욕구를 해소하고 있었기에, 소녀들의 전유물처럼 되어버린 "순정"만화에 무협이란 요소는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치부되는 것이다. 여성적 로맨스와 남성적 무협의 결합이란 위험 천만의 것이므로. 그래서 이 두 가지 실험적인 요소의 도입은 도박과도 같은 것이었고, 이러한 도박은 작가가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작업에만 열중할 수 있는 대본소용 단행본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전작인 『북해의 별』의 성공적인 데뷔로 작가를 구속할만한 여건은 없었겠지만 말이다. 결국 김혜린의 실험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오히려 서양적 미의식에 구속되어 있던 독자들의 눈꺼풀을 한겹 벗겨준 결과까지 낳게 되었다. 윤기가 흐르는 듯한 검은머리의 아름다움, 한폭의 동양화 같은 배경들, 작품 곳곳에 등장하는 한시(漢詩)의 매력, 붓으로 그린 듯한 그림체 등등.. 그리고 우려했던 무협 적인 요소는 작품에 훌륭하게 스며들어 표피적인 영웅심에 우쭐대는 인물이 아닌, 역사 속에서 생생히 살아 숨쉬는 인물을 창조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비천무』는 주변의 우려 속에 시작한 작품이었으나 김혜린을 남녀 독자 모두에게 사랑 받는 대중적인 작가로 만들어준 작품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1991년에 완결 이후에도 독자들의 인기에 힘입어 세 번 재판되었으며 여전히 스테디셀러로 자리잡고 있다. 또한 10년이 지난 2000년에는 영화로도 만들어져서 원작의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입증해주는 실례를 낳기도 했다. 게임과 드라마로도 만들어지고 있으며 해외시장에도 문을 두드리는 중이다. 개인적으로는 "순정"만화의 이단아 정도로 취급하던 『비천무』에 대한 평가가 앞으로 어떤 행로를 걷게 될지 사뭇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