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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검 (애장판)

『불의 검』은 90년대에 들어서 김혜린의 주관심사가 변화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네 번째 장편작이다.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여성캐릭터의 획기적인 변화를 꼽을 수 있다.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했던 80년대의 대표작들인 『북해의 별』,『비천무』,『테르미도르』에서는 ...

2002-02-25 노수인
『불의 검』은 90년대에 들어서 김혜린의 주관심사가 변화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네 번째 장편작이다.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여성캐릭터의 획기적인 변화를 꼽을 수 있다.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했던 80년대의 대표작들인 『북해의 별』,『비천무』,『테르미도르』에서는 시대가 주는 절망에 고뇌하는 "남"주인공들에 포커스가 맞춰져 상대적으로 "여"주인공은 그 "남성"들의 비애를 돋보이게 연출해주는 조연정도의 역할에 만족해야 했다. 물론 그 역할의 강도는 후속작으로 가면서 점점 주연급에 걸맞게 격상했지만, 여주인공 자신의 문제보다는 남주인공의 행보에 따라 사랑에 웃고 우는 정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불의 검』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인 아라는 아사와 궤를 같이 하면서도 독자적인 자신의 역사를, 그녀가 가진 기술로 철검을 만들고 있다. 소서노는 한편으론 이뤄지지 않는 자신의 사랑을 안타까워하지만 신녀로서의 끊임없는 자기연마를 멈추지 않는다. 여주인공의 변화뿐만이 아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항상 크게 조명되는 부분인 전쟁, 정치 같은 남성적, 주도층의 영역이 주로 부각되던 전작과는 달리 전쟁이 휩쓸고 간 그 자리에 남아있는 여인네들의 쓰라린 경험들, 정치적 암투에 희생되어 눈물짓는 여인들, 혼혈아로 태어나 언제나 손가락질 받고 자라야 하는 사람들..의 일상사들이 함께 녹아들어 있다. 즉, 80년대의 작품과 비교해서 90년대에 연재하기 시작한 작품에서는 불합리한 사회의 모순과 같은 거시적인 문제보다는 인간사회 내부의 좀더 개인적이고 직접적으로 피부에 와닿는 미시적인 문제들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러한 성격은 단편들에도 그대로 나타나 『샤만의 바위』, 『로프누르 잃어버린 호수』등에서는 은유적이기는 하나 한편으론 직설적으로 여성문제를 그려내고 있다. 80년대의 대표적인 단편인 『그대를 위한 방문자』, 『히스꽃 필 때에는…』, 『그대를 위한 방문자』와 비교해 보면 그 변화는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이렇게 변화된 관심사가 작가의 성숙된 일면을 보여주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20대에 겪은 시대상황으로 말미암아 분출할 출구 하나 없던 갈증을 작품으로 승화시켰던 그는 30대가 되어 자연스럽게 자신의 욕구에 따라 그려낸 작품을 통해 이전에 가지고 있던 역사의식의 폭을 한층 넓혔다. 그 결과 여성문제뿐만이 아니라 집단을 이루는 인간사회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분쟁(다툼)이나 민족, 혈족의 강조로 생기는 문제들에 대한 묘사가 더욱 섬세해졌고, 시대적 아픔으로 정신적인 공황기를 겪는 등장인물이 아니라 바로 살을 맞대고 있는 이웃이 던지는 욕지거리에 아파하는 우리네 모습을 작품 속에 그대로 투영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불의 검』은 그동안 남성적인 시각에서만 그려지던 반쪽짜리 역사의 모습에 여성의 숨결을 함께 불어넣은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역사를 주도한 계층이라 일컫는 지배자의 역사에 민족, 민중의 개개인의 서글픔, 아픔을 온전히 그려낸 작품이기도 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불의 검』의 행보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면, 1992년~1996년 만화잡지 「댕기」에 연재되다가 잡지폐간으로 중단된 후 4년여만에 다시 2000년 11월 「화이트」에 연재되기 시작, 그러나 2001년 3월호를 마지막으로 다시 연재가 중단된 작품이다. 만화시장의 척박한 환경으로 작품에 공백기간이 생긴 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올 리가 없다. 대표적인 피해로는 그림체의 변화인데, 거칠게 보이면서도 힘있던 선이 매끈하고 부드러워져 고대 청동기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불의 검』의 생동감이 줄어들어 안타깝다. 그러나 『불의 검』에 내재된 에너지는 여전히 독자들을 북만주의 어느 곳을 헤매 이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