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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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왕자 (紅茶王子)

“홍차의 나라 영국의, 그다지 미덥지 않은 민화. 밤 12시, 백자컵의 다질링. 보름달이 비치는 컵 속을 은스푼으로 한 번 저으면, 달은 일그러진다. 그리고….” 야마다 난페이의 『홍차왕자』는 이처럼 낭만적인 영국의 전설로부터 시작된다. 국제중학교 홍차동호회원인 ...

2002-02-14 노수인
“홍차의 나라 영국의, 그다지 미덥지 않은 민화. 밤 12시, 백자컵의 다질링. 보름달이 비치는 컵 속을 은스푼으로 한 번 저으면, 달은 일그러진다. 그리고….” 야마다 난페이의 『홍차왕자』는 이처럼 낭만적인 영국의 전설로부터 시작된다. 국제중학교 홍차동호회원인 승아와 남호, 미경이가 보름달 아래에서 홍차를 마신 날 밤, 홍차의 왕자인 얼그레이와 아삼이 홍차 속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이들은 주인의 세 가지 소원을 들어줄 때까지 함께 머무르게 된다. 작가는 ‘자고로 로맨스란 이국적인 풍물과 결합해야 제 맛이 난다’는 점을 충분히 활용하고 있다. ‘홍차’라던가 ‘국제중학교’라는 설정부터가 그렇고, 홍차에 곁들이는 서양식 먹거리는 보기만 해도 황홀할 정도로 예쁘다. 그러한 배경 속에서 주인공은 홍차의 왕자님들과 함께 환상적인 학창시절을 보낸다. ‘매지컬 학원 로맨스’라는 별칭이 따라붙는 『홍차왕자』는 ‘매지컬’보다는 ‘로맨스’의 측면에서 읽을 거리가 많다. 특히 이 만화는 사춘기 소녀들의 성적인 판타지로 가득하다. 소녀에게 성(性)은 호기심과 동경의 대상이지만, 동시에 미지의 두려움과 공포이기도 하다. 그런데 홍차왕자들은 100% 안전하다. 이들은 처음에는 남성성이 제거된, 조그만 인형같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때로는 멋진 모습으로 커져서 보호자나 데이트의 상대가 되기도 한다. 게다가 아삼, 얼그레이, 세일론, 홍목단 등 수많은 홍차의 종류만큼이나 아름다운 홍차왕자들이 얼마든지 늘어날 수 있으니 금상첨화다. 이(異)세계와 현실세계가 공존하는 여느 판타지가 그러하듯이, 『홍차왕자』도 일종의 ‘성장만화’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승아는 소꿉친구인 남호는 남자로도 보지 않고, 조비상의 무례한 접근을 두려워하면서도, 아삼의 사심 없는 스킨십에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빨개진다. 그리고 서서히 ‘소녀’에서 ‘여자’로 성장해 간다. 승아에게는 아버지가 없다. 그래서 늘 아버지를 그리워한다. 하지만 그녀의 주변에는 아버지의 대리인들이 끊임없이 넘쳐난다. 기준 삼촌과 남호, 아삼, 얼그레이… 모두가 그녀를 뒤에서 소리 없이 받쳐주고 있다. 남호가 아삼에게 첫 번째로 얘기한 소원이 승아의 아버지 모습으로 승아와 함께 차를 마셔주는 것이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아버지는 딸에게 최초의 ‘남자’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애착을 형성하는 ‘이성’이라는 말이다. 딸이 자라나서 아버지의 보호로부터 벗어나 또래 이성과의 대등한 사랑으로 무사히 이행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성장’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여러 가지 매력적인 요소가 듬뿍 담겨 있는 『홍차왕자』는 십대 소녀들에게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고, 점점 장기화되면서 새로운 인물들이 줄줄이 첨가되고 있다. 홍차왕자가 세 가지 소원을 모두 들어주면 언젠가는 헤어져야 한다는 시한부 동거를 작가는 마지막까지 어떻게 요리할까? 이제는 ‘늘리기’가 아니라 ‘마무리’에 집중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