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션 (AUDITION)
천계영은 90년대 최고의 인기작가다. 『언플러그드 보이』는 한국 순정만화 사상 최초로 30만부를 넘겼고 팬시상품으로 80억원대의 매상을 올렸다. 그런 그가 후속작으로 로맨스가 전혀 없는 만화를 준비한다고 들었을 때, 대중적인 인기는 포기한 건가 싶었다. ‘순정만화=로맨...
2002-02-14
노수인
천계영은 90년대 최고의 인기작가다. 『언플러그드 보이』는 한국 순정만화 사상 최초로 30만부를 넘겼고 팬시상품으로 80억원대의 매상을 올렸다. 그런 그가 후속작으로 로맨스가 전혀 없는 만화를 준비한다고 들었을 때, 대중적인 인기는 포기한 건가 싶었다. ‘순정만화=로맨스만화’는 아닐지라도, 사랑이 빠진 순정만화는 상상이 안 갔다. 게다가 그의 절대적인 지지세력인 10대 소녀들이 가장 열광하는 게 사랑 이야기 아니던가! 하지만, 『오디션』은 이러한 우려를 가뿐하게 잠식시켰다. 더욱 두터운 팬층을 확보한 것은 물론이고, 한․일 합작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다는 소식까지 들려 “역시, 천계영!”이라는 감탄을 자아냈다. 이 작품은 네 명의 천재소년이 ‘재활용밴드’를 결성하고 8단계의 오디션을 거치면서 성장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작가는 음악 자체가 이 만화의 목적은 아니라고 했지만 “기타 코드 잡는 손가락 하나까지” 사실적으로 묘사했고, 독자들은 이처럼 철저한 리얼리티를 바탕으로 한 “황당한 만화적 재미”를 맛볼 수 있었다. 『오디션』은 만화적 재미를 위해 『개구장이 스머프』의 덩치(장달봉), 똘똘이(황보래용), 허영이(류미끼), 투덜이(국철)에서 착안한 개성 있는 캐릭터와, 소년만화가 아닌 순정만화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토너먼트식 전개를 도입했다. 또한, 재활용밴드와 오디션에서 대결하는 상대들을 정말 ‘황당하게’ 설정했다. 작가가 무척 고심했을 법한 이러한 장치들은 곳곳에서 폭소를 이끌어낸다. 내 남동생도 『오디션』을 무척 재미있어 했다. 하지만 재활용밴드가 결승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왜 이렇게 억지스럽게 이기는 거냐”며 화를 냈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그러한 점 때문에 ‘사실적’이라고 느꼈다.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어느 날 갑자기 훌륭한 뮤지션이 될 수는 없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활용밴드에겐 ‘어쨌든 이겨야 한다’는 당위가 있다. 무슨 수를 써서든 결승까지 올라가야 이 만화가 준비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토너먼트식 만화의 결말은 항상 주인공의 승리다. 하지만, 지금까지 착실하게 상업만화의 문법을 답습하던 『오디션』은 신선한 반전을 보여준다. 재활용밴드의 결승전 패배… 그러나 완벽한 해피엔딩… 그것이 작가의 의도였다. 극심한 우울증으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지만 멤버들의 도움으로 결승전 무대에 오른 황보래용은 생각한다. “내가 행복하니까… 이 노래는 해피엔딩이야…”라고. 결국 네 명의 천재소년은 오디션 우승을 놓치지만 재능을 담보로 ‘동료’와 ‘행복’을 얻는다. 그리고 로맨스 없는 만화 『오디션』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결혼식장에서 막을 내린다. 오디션과 관련된 사람들이 참석한 가운데 송송 회장의 유언이 강한 여운을 남긴다. “어떤가…? 우리들은… 원하는 것들을 모두 얻지 않았나…?”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인상적인 엔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