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골계만화 - 왕십리 종합병원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의사라는 직업이 가지는 보편적인 이미지란 무엇일까. 한편에서는 돈 많이 버는 박사 선생님 겸 일류 신랑감 일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사람의 목숨은 안중에도 없이 돈만 밝히는 수전노에 인간말종일 수도 있다. <허 준>이라는 TV드라마가 방영 당시 말 그대로 하늘을 찌르는 인기를 얻은 것은 그와 같은 살신성인의 의사상이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실세계에서는 거의 판타지에 가까운 히어로 드라마였기 때문일 것이다
2002-04-01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의사라는 직업이 가지는 보편적인 이미지란 무엇일까. 한편에서는 돈 많이 버는 박사 선생님 겸 일류 신랑감 일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사람의 목숨은 안중에도 없이 돈만 밝히는 수전노에 인간말종일 수도 있다. <허 준>이라는 TV드라마가 방영 당시 말 그대로 하늘을 찌르는 인기를 얻은 것은 그와 같은 살신성인의 의사상이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실세계에서는 거의 판타지에 가까운 히어로 드라마였기 때문일 것이다. 지리한 의약분업 파동 따위를 지켜봐온 서민들의 눈으로 보기에 이른바 사회지도층으로 불리는 의사라는 존재는 존경이라기 보다는 비아냥거림의 대상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한국의 의사라는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한 김진태의 <왕십리 종합병원>은 시작부터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이 만화는 특정 병원, 의료계 종사자, 환자 그리고 의료계 현실과는 무관하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 만화가 애초부터 개그만화라는 점을 인지하고 들어간다면 <왕십리 종합병원> 이라는 작품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은 바로 이 문장일지도 모른다. 시작의 경고문부터가 개그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의사라는 직업의 가지는 이미지가 이미 그러한 수준에 와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타이틀부터 특정 지역의 지명이 들어가면서도 현실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시작부터 엄포를 놓은 <왕십리 종합병원>은 황당하기 그지없다. 작가가 단행본의 첫머리에서 밝혔듯이 병원을 소재로한 만화를 그려보고 싶다는 소원은 푼 셈이지만, 만화 속에서는 제대로 된 의료계 종사자는 단 한 명도 나오지 않는다. 수술 때마다 매번 사람을 죽여나가는 외과의 한호색을 비롯한 여타 캐릭터들은 그 누구도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이전의 김진태표 개그 만화들과 비교해도 꽤나 바이올런스하고 에로틱한 장면들이 넘쳐난다. 성인만화지라는 장르가 거의 고사해 버린 시점에서 신예로 등장하여 <야후>, <짜장면>, <용비불패>등 작가의 하고 싶은 바를 비교적 자유롭게 표출해낸 볼만한 만화들을 게재해온 [부킹]이라는 춤판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대한민국 황대장>과 같은 소년만화가의 이미지로 김진태라는 작가를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이 <왕십리 종합병원>은 굉장히 쇼킹하게 보여질지도 모른다.
시작부터 병원관계자가 기계에 말려 들어가 죽어버리는 과격한 개그로 시작하는 <왕십리 종합병원>은 또한 작가 김진태의 특기인 패러디 개그의 보고이기도 하다. 김진태 특유의, 각종 서브컬쳐들의 크로스카운터를 통한 복합적인 패러디 - 이를 테면 왕십리 종합병원 안의 우물에 갖혀있는 폭력배 넘버2의 시츄에이션은 일본의 호러영화인 <링>에서 따온 것이다. 바로 앞에 적은 기계에 말려 들어가는 상황 또한 7,80년대 일본제 로봇 애니메이션에서 흔히 보아온 변신합체 로봇의 출격장면이 아니던가. 환자를 수술하기 위해 마이크로화하여 환자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미크로 결사대>와 같은 고전 SF영화까지를 모두 섭렵해야만 충분히 웃을 수 있는 <왕십리 종합병원>은 새삼 김진태라는 작가가 개그 만화가로서 얼마나 고단수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단순히 병원을 소재로 한 개그만화에 불과 할 수도 있지만, 한국에서도 이러한 성인만화 다운 성인만화가 보다 많이 나올 수 있는 플랫폼이 많이 부족하다는 현실이 새삼 아쉬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