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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얼굴 <지역의 사생활 99: 군산 - 해망굴 도깨비>

‘역사 만화’의 미덕(현재로부터 과거를 부활시킨 뒤, 그것을 현재와 묶어버리는 사실)이 담긴

2024-03-12 이선인


불친의 <지역의 사생활 99: 군산 - 해망굴 도깨비>(이하 <해망굴 도깨비>)에서 가장 눈에 띄는 지점은 작품이 두 개의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현재 시점을 그릴 때에는 이전의 작품들에서 사용하던 상당히 기호화된 작화를, 과거 시점을 그릴 때에는 거친 붓 선을 이용한 극화에 가까운 작화를 사용한다. 그리고 현재가 아닌 과거의 시점을 그릴 때에야 기호화의 형태를 넘어서려고 하는 점에서 독특함이 발생한다.


말하자면 <해망굴 도깨비>는 두 개의 시제 중에서 과거 쪽에 더 현실적 무게를 두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감각과는 얼핏 어긋나는 방식이다. 우리의 현실적 감각에 있어서 기호화되는 쪽은 대체로 과거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본 작품에서의 현재 시제는 과거 시제의 이야기를 여닫기 위한 액자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기에, 현실적 무게를 과거에 두려는 시도가 특별히 이상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현재 시제의 작화는 현실적 기조를 넘어서는 기호화된 작화일 필요가 있었을까.


첫번째로는 이는 전적으로 기능적 목적에서 작동하는 설정이다. 이 작품에는 도입부에서 도깨비와 조우한 소녀가 사실은 옥금의 동생 숙희라는 사실, 그러니까 사실은 소녀가 아니라 노인이라는 반전이 있다. 이러한 기호화된 작화는 그러한 캐릭터의 외피적 사실을 쉽게 은폐하고 조작하기 용이하다. 이 작화는 작품의 가장 중요한 반전 요소를 작동시키기 위한 기능적인 배치일 것이다.


하지만 또 하나, 그보다 더 중요한 조건이 있을수도 있다. 대비로서의 효과, 즉 ‘과거’에 현실적 터치를 부여하기 위해, 현재 시제를 상대적 개념으로서 기호화시킨 것이다. 요컨데 두 개 이상의 시제를 가르는 방법은 <해망굴 도깨비>이 사용하고 있는 방법론, 즉 작화의 대비 이외에도 다양하게 존재한다. 만화에서 작동시킬 수 있는 기호는 무궁무진하며, 그것은 쉽게 상호대비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친은 이 두 시제 사이에 구태여 두 개의 스타일을 배치하며, 현재의 시제로부터는 현실감을 제거하는 방식을 쓴다. 이를 통해 <해망굴 도깨비>에서 더 ‘생생함’을 갖게 되는 것은 과거의 이야기가 된다. 즉 독자의 시점에서 ‘지금 눈 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은 현재가 아니라 과거가 되는 셈이다.


<해망굴 도깨비>는 그래서, 현실이라는 체감을 뒤집어놓는 강력한 수를 사용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과거의 문제는 곧 현실의 문제가 된다. 즉 과거는 이미 지나간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당장 눈 앞에서 벌어지는 생동하는 사건이 된다. 그리고 그 작동의 배경에는 과거를 부활시키는 인물들의 기억과의 일치가 있다. 요컨데 과거 부분의 시각화는 도깨비와 (도깨비의 이야기를 듣는) 숙희의 의식을 통한 복원된 이미지일 것이다. 이 때 핵심은 기억이다. 과거는 어떻게 현실화하는가? 그것은 누군가가 그 과거를 명백히 기억하고 있을 때이다. 기억이 남아있는 한, 과거는 결코 소실되지 않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강력한 하나의 이미지는 숙희의 ‘진짜 얼굴’이다. 불친은 이 얼굴을 보이는 과정에서 자신이 제시해놓은 과거와 현재의 규정을 의도적으로 어긴다. 이렇게 현재로 규정되는 기호화된 스타일을 뚫고 나온 지극히 현실적인 숙희의 얼굴은 이 만화가 다루고 있는 시간성을 순식간에 불식시킨다. 이 얼굴, 그러니까 시대의 풍파를 그대로 드러내는 노인의 얼굴은 역사의 얼굴이며, 따라서 과거와 현재라는 두 시제를 봉합해버리는 힘을 발휘한다. <해망굴 도깨비>의 미덕은 현재로부터 과거를 부활시킨 뒤, 그것을 현재와 묶어버린 사실에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역사 만화’가 해야 할 일이다.


필진이미지

이선인

2017년 신인만화평론 공모로 만화평론가로 등단, 2022년 GG 게임 비평 공모로 게임평론가로 등단하였다. 영화를 전공했으며 평소에는 만화, 게임, 영화에 관한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