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윤창의 <네이처맨>은 전대물을 소재로 한 웹툰이다. 과거의 배우들이 다시금 모여 전대물을 찍는다는 설정의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극 중 극의 형태를 취한다. 작품을 찍는 과정에서 배우의 안전보다 장면을 마무리하는 일을 택했던 주인공은 시간이 지나 생각지 못한 형태로 이를 마주하게 된다. 빌런 역할의 배우가 돌아와 ‘네이처맨’을 다시 찍을 것을 종용한다는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목격한다. 첫 번째는 이 작품이 이윤창이 가장 잘하는 방식으로 쓰였다는 점이다. 전작인 <좀비딸>에 이어 여기서도 극 중 극의 형태로 등장하는 <오즈랜드>는 <네이처맨>을 ‘이윤창 유니버스’ 작품군에 넣는다. 각자는 서로 다른 우주나 시간선일지는 몰라도,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준거점이 있다면 작품을 이해하는 일은 쉬워지기 마련이다. ‘오즈랜드’를 준거점으로 삼아 우리는 <네이처맨>의 이야기가 아무리 심각해지더라도 행복한 결말로 끝나리라고 예측해볼 수 있다. 그런데 행복이란 무엇일까? 현실을 웃도는 수준의 감정들?
쿠엔틴 타란티노의 작품들이 공유하는 분위기처럼 이윤창의 작품들에서는 특정 이상으로 심각해지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이야기가 행복하게 끝나리라는 사실이 예견되어있다면 관객은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기를 바라보는 일에서 비교적 안전한 자리를 찾게 된다. 마치 소꿉친구의 연애를 다루는 이야기가 결국에는 두 사람의 연애를 성사시키듯이 이윤창의 작품은 그 운명이 행복한 결말로 고정돼 있다. 이 점에서 <네이처맨>은 과거의 것이 현재에 돌아온다는 레트로토피아의 관점으로도 바라보아진다. 과거의 것이 현재에 돌아올 때 이들은 항상 행복의 관점으로만 바라보아진다. 적어도 과거가 지금보다는 나았으리라고 여기는 마음에서 추구되는 ‘귀환’은 그게 실제로 어떠했는지와는 별 관계없이 과거를 미화하며, 여기서 과거와 현재 사이에 존재하는 낙차는 쉽게 왜곡된다. <네이처맨>은 그러한 왜곡들이 현재에 돌아왔을 때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생각해보면 이윤창의 작품은 그러한 낙차를 자주 응용한다. <타임 인 조선>(2011~2013)은 현대 사람이 조선 시대에 외계인과 함께 떨어진다는 기묘한 설정이 있고, 흥미롭게도 ‘조선’은 과거에 비해 모든 면이 낙후함에도 정작 현대에서는 누리거나 느껴보지 못했던 것들이 돌아오는 장소다. <오즈랜드>(2014~2017)도 현대와 판타지 세계에 영혼이 뒤바뀌는 과정에서 오는 간극들에 대해 말한다. 오즈랜드는 모든 게 낯설지만 오히려 친숙한 본래 세상보다 고독하지만은 않은 세계다. <좀비딸>(2018~2020)로 오면 이런 간극은 장소나 시대를 이동하지는 않지만, 이미 좀비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자신의 딸인 대상을 인식하는 과정을 묘사한다. ‘좀비딸’은 인간으로 볼만한 구석이 없는 상황에서 이에 대한 인식이 우위를 갖는 모습을 보인다: 요약해서 말하면 이윤창 작품의 특징은 다시금 본래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투입하는 외부적 요인들에 있다. 거리를 두었던 일상이 회복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우화란, 현재를 상회하는 수준의 과거를 뜻한다.
<네이처맨>에서 특기할 만한 두 번째 지점이 그렇다. <네이처맨>에서 돌아오는 것은 과거이다. 촬영과정에서 있었던 불미스러운 사고는 ‘연기’를 현실에 밀어붙인 결과였으며 이를 따라 청산되지 않은 현실이 다시금 돌아오게 된다. 이때 현실은 인물이 살아가는 곳이라는 점에서 본래적 장소이며, 과거의 것이 돌아오는 일은 도식 상으로는 회복처럼 보인다. 이들은 항상 행복한 결말을 맞이했고, 행복은 이들이 본래 있어야 할 곳처럼 보였다. 그런데 <네이처맨>은 기본적으로 돌아오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해 말한다. 미화되었던 과거가 현재에 돌아올 때, 우리는 생각만큼 아름답지는 않다는 걸 깨닫곤 한다. 이렇게 돌아오는 것들은 사실 그러지 않았어야 했던 건 아닐까. 마크 피셔의 말처럼 ‘기이하고 으스스한 것’은 외부 세계와 내부 세계의 괴리에서 비롯되며 이는 적어도 우리가 아는 현실 인식과 관련된다. <네이처맨>은 되려 현실을 행복하게 하기 보단 행복의 마무리 청산작업에 더 가까워 보인다. 유년기의 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