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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케고르와 법구경> 다시 읽기

키르케고르와 법구경(글, 그림 약국 / 삐약삐약북스 출판) 리뷰

2024-05-22 최윤주

<키르케고르와 법구경> 다시 읽기

  비서울을 배경으로 하는 창작 만화 지역의 사생활시리즈의 한 작품인 <키르케고르와 법구경>(약국, 삐약삐약 북스)을 다시 읽는다. 단행본에 수록된 인터뷰의 질문자로 참여하며 처음 만난 만화인데, 독자로서 만났다 하더라도 몇 번이고 거듭해서 읽었을 것 같다. “20대의 키르케고르에서 30대의 법구경으로의 이행”(87), 달리 말해 더 어리고 젊었던 어느 시절의 한복판과 그 이후를 내가 경험하고 느낀 것과 가장 근접한 방식으로 그려낸 작품이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와 법구경>은 경남 양산의 이야기다. 그중에서도 쇠락한 관광지인 통도 환타지아 근처의 식당가를 배경으로 한다. 경남 양산, 양산의 통도 환타지아, 그 근처의 식당가. 구불구불 구체화된 현실적인 배경이기에 그 안에서 그려지는 사건 역시 거의 현실 그대로의 축척을 띠고 있다. 재개발 지역으로 정해진 식당가의 보상금이 터무니없이 적게 책정되었고, 이에 주민들이 반발하며 계획이 지연되자 시공사에서 편법을 동원해 개발을 강행시킨 상황을 그렸다.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이야기가 시청의 말단 공무원 경민과 시청과 대립하는 상가 주민 은수를 두 축 삼아 펼쳐진다는 것이고, 그 두 사람이 십여 년 전 연극영화과 선후배 사이였다는 사실이다.

  두 사람은 예상치 못한 서로의 근황에 놀란다. 예술이나 그 언저리의 무엇은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완전히 예술 바깥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은수에겐 경민이 공무원이 됐다는 사실이 놀랍다. 늘 시위에 나가고 교수에게 대들며 반골 기질이 다분했던 경민이 공무원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경민은 경민대로 은수가 영화 감독을 하고 있지 않아 놀란다. 내심 질투가 날 만큼 재능을 가지고 있던 은수가 당연히 영화 일을 할 줄 알아서다. 아마도 대학 시절 함께했던 다른 사람들 또한 뭐라도 될 줄 알았”(13)던 두 사람의 근황을 듣는다면 놀라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다른 누구보다도 가장 당황할 이는 그 시절의 경민과 은수일지도 모르겠다.

  지나온 시간이 쌓일수록 현실을 바라보는 일이 뒤죽박죽이 된다. 과거를 떠올리는 일에 현재의 시선이 끼어들어 미래를 보고 온 사람처럼 허무하고 냉소적인 마음이 되기도 하고,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모습에 측은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현재를 바라볼 때도 지난 날이 개입한다. 천진한 얼굴로 대단한 것을 기대하던 과거가 빤히 쳐다보는 느낌에, 지금을 마주하는 일이 괴로울 정도로 부담스러워지는 것이다.

  대학 시절 은수와 함께 만들었던 단편 영화 자유의 현기증을 보던 경민이 바로 딱 그렇게 과거도 현재도 아닌 자리에서 영화를 감상했을 것 같다. 영화는 혼자 힘으로 동생까지 돌보며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스물한 살의 은희가, 자신이 선택하고 책임져야 하는 모든 것의 무게에 짓눌려 동생을 버리고 마는 이야기다. 부조리를 그려내려 했던 반골 기질, 오도 가도 못하는 내몰린 처지를 선택과 자유라는 언어로 설명하는 혈기, 영화를 향한 애정과 열의. 이제 와 보면 웃음이 나올 정도로 조악한 만듦새인 단편 영화에서, 지난 시절에 두고 와 지금의 경민에게는 거의 남지 않은 것들이 읽힌다. 그리고 그런 경민의 영화를 엿보며 오래전 써둔 일기를 읽는 기분이 들었다. 턱을 괴고 덤덤히 영화를 보던 그의 얼굴에 이입한 탓일 것이다.

  처음 작품을 읽을 때에는 이렇게 읽지 않았다. 그때는 경민이 얄밉다고만 생각됐다. 늘 상대방의 입장은 고려 않고 훈수를 두던 경민이 나이가 들어서도 공무원 편에서 이러저러 떠드는 모습이 은수의 말대로 좀 재수 없다싶었고, 함께 영화를 만들었으면서 이제는 완전히 빠져나간 것처럼 구는 모습이 어쩐지 좀 서운하게도 느껴졌다. 그렇게 읽은 게 고작 3년 전인데, 그사이 나도 뭔가를 많이 두고 온 걸까? 이제는 경민의 심경을 알 것도 같다. 영화를 그만둔 것을 여러 번 후회한 일이 당연할 정도로 영화를 좋아했으면서도 이제 미련이 없다고, 취미도 전문도 아닌 딱 이 정도 거리감이 좋”(63)다고 말하기까지 경민이 통과했을 시간을 헤아리게 되었다. 대단한 승리나 성취가 아닌 딱 이 정도의 적당한 거리감을 찾는 것조차 드문 최선일 수 있었겠다고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지난 시절의 질투심을 인정하고, 은수의 일갈에 상가 주민들의 현실을 듣기로 결심한 경민이 사실은 나보다 용기도 의욕도 나았다는 생각까지 든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구차해 기도 한 번 해본 적 없던 은수가 법구경 앞에 선 장면도 다르게 읽혔다. 좋아하는 영화를 포기하고, 재개발 문제로 질 것이 뻔한 싸움을 견뎌온 은수에게,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절망이나 불안은 지나치게 거창한 것이었을 것 같다. 번번이 희망에게 배신당하며 희망을 짊어지고 사는 것은 너무나 많은 체력을 필요로”(71) 한다는 별 볼 일 없는 깨달음을 얻기까지, 은수가 체득해야 했던 것은 절망보다 실망이었을 것이고 불안보다 무기력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법구경 곁에서 소원을 빌며 기꺼이 구차해지기로 마음먹는 은수의 모습을 다시 읽을 때, 거기서 나는 희망이 아닌 희망 바깥의 것들을 읽었다. 형체도 없는 주제에 곧고 단단하다고 설명하게 되는, 구차할지라도 오늘을 견디게 하는 조용한 기도. 어쩌면 희망을 말하는 일보다도 세상에 나오기까지 더 큰 용기와 체력이 필요했을지 모르는 기도. 기약 없는 내일을 말하는 희망보다는 희망이 뽑혀 나간 곳에서 다짐하는 그 기도가 차라리 믿을 만했고, 그나마 믿어지는 것들 중 가장 좋았다.

필진이미지

최윤주

만화평론가
2021 대한민국 만화평론공모전 대상
2019 만화평론공모전 신인부문 대상, 2020 만화평론공모전 기성부문 가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