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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된 경험, <시베리아의 숲에서: 바이칼에서 찾은 삶의 의미>

시베리아의 숲에서: 바이칼에서 찾은 삶의 의미 (실뱅 테송, BH balance & harmony) 리뷰

2025-05-30 박근형

박제된 경험, <시베리아의 숲에서: 바이칼에서 찾은 삶의 의미>

『시베리아의 숲에서: 바이칼에서 찾은 삶의 의미, 실뱅 테송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떠올린 첫 단어는 박제였다. <시베리아의 숲에서: 바이칼에서 찾은 삶의 의미>(이하, <시베리아의 숲에서>)는 실뱅 테송의 에세이 희망의 발견: 시베리아의 숲에서(이하, 시베리아의 숲에서)를 그래픽노블로 옮긴 작품이다. 테송은 마흔이 되기 전에 바이칼호 근처의 오두막에서 6개월을 은둔하며 보내기로 한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는 다섯 시간을 걸어야 하는 곳이다. 그가 시베리아에서 보낸 겨울과 봄이 <시베리아의 숲에서>에 만화로 담겼다. 약동, 고즈넉함, ‘힐링과 같은 개념들이 연상될 법도 한데 어째서 박제가 떠올랐을까.

만화로 각색하기

에세이를 만화로 각색하는 과정에서 <시베리아의 숲에서>는 몇 가지 질문과 조우한다. 영화에서 이미지는 카메라에 의해 포착되지만, 회화에서의 이미지는 작가에 의해 포획된다. 고전적인 의미에서, 회화는 완성된 구도 안에 모든 것을 붙잡아두려 하지만 영화는 순간의 이미지로는 관객을 붙잡아 둘 수 없다. 영화의 관객은 이미 다음 이미지를 관람하고 있거나1), 카메라에 포착되지 않은 프레임 밖을 연상하고 있다. 만화는 그림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이미지를 포획할 수 있으며, 칸으로 이루어진 연속된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것을 포착할 수도 있다. 시베리아에서의 나날들을 만화로 옮긴다고 상상해 보자. 작가는 그 경험을 포획할 것인가, 포착할 것인가? 각색의 과정에서 작가가 맞히고자 하는 과녁은 무엇일까?

시베리아의 숲에서를 만화로 각색하려 한다는 것은 여행 에세이가 지닌 근본적 성격-‘로망을 이미지 서사로 구현하고, 작가가 이루어낸 성찰을 독자에게도 전하고 싶다는 욕망에 닿아있다. 이때 <시베리아의 숲에서>에 필요한 것은 원작과는 다른 새로운 것-이미지에 기반하여 새로운 감각을 유발하는 것이다. 시베리아의 자연과 오두막에서 생활상은 흥미롭고 생명력 넘치게 그려져야 하고, 작가의 내적 고뇌나 감동을 독자가 함께 느낄 수 있는 연출이 필요하다. 독자는 관조의 시간이 충분히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하술하는 이유로 <시베리아의 숲에서>는 연출과 메시지 간에 배치(背馳)가 일어난다. 이미지는 회화적 욕망에 포획되고, 그에 따라 메시지는 힘을 잃는다. 이 어긋남 때문에 새롭게 감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무산된다.

이미지 서사의 실패

먼저 판형과 연출에 관해 생각해 본다. 시베리아의 숲에서는 시베리아라는 특수한 배경이 작품의 메시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에세이다. 시베리아라는 장소와 세로로 긴 페이지는 시각적으로 상충하는 부분이 있다. 만화를 가로가 긴 페이지로 편집하거나, 책의 사이즈를 더 크게 만들어 가로로 긴 직사각형 칸을 보다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광활한 풍경과 가로로 긴 프레임이 자연스럽게 어울렸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혹은 텍스트와 칸의 개수를 과감히 줄이고 작화 완성도를 높여야 하는 칸들을 더 크게 배치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포리즘적인 문장이 많은 원작 특성상, 텍스트 분량을 크게 줄인다고 하더라도 독자가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칸 내부의 텍스트와 이미지가 같은 내용을 지시하는 것은 새로운 인식을 만들어내는 연출은 아니다. 지나치게 많은 정보량은 독자가 칸을 더 빠르게 읽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칸에는 텍스트가 없는 것이 내용상 더 적절하기도 할 것이다.

두 번째는 이미지 플롯이 어떻게 메시지의 전달에 영향을 주는지와 관련이 있다. 서사에서 독자가 인물에게 이입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독자가 인물과 같은 것을 보고 겪어야 한다. 영화에서 핸드헬드 기법이 감상자에게 어떤 효과를 유발하는지, 게임에서 캐릭터와 플레이어의 시점을 일치시키는 것은 어떤 목적이 있는지 떠올려 보자. 화면이 꼭 일인칭 시점일 필요는 없지만 독자와 인물이 경험하는 것에 차이가 발생하면 독자는 인물에 이입하기 어렵다.

<시베리아의 숲에서>는 대부분 무언가를 하는 인물의 모습이 칸에서 구도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테송이 보고 있는 것과 독자가 보고 있는 것이 다름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테송이 산을 보고 감탄하는 칸이 있을 때, 그 칸에서 독자는 테송과 산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산을 바라보는 테송을 본다. 풍경에 인물이 함께 등장하면 독자는 자연스럽게 인물을 더 중요한 것으로 인식하게 되고, 풍경은 인물의 배경으로 전락한다. 텍스트는 자연의 경이를 칭송하지만, 독자는 자연에 압도되지 않는다.

회화적 욕망은 인물, 사건, 배경, 텍스트까지 모든 것을 한 화면에 담아 포획하려 한다. 그것은 거꾸로 말하자면, 두드러지게 강조되는 것이 없게 될 수 있다는 것과 같다. 테송이 느꼈을 벅찬 감정과 행복이 독자에게 쉬이 전달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박제되어 버린 경험

<시베리아의 숲에서>에는 페이지 모서리로 확장된 칸도, 페이지 양쪽으로 펼쳐지는 칸도 없다. 독자가 페이지 끝까지 확장된 칸들을 볼 때 페이지 너머로 나머지 보이지 않는 부분도 함께 상상한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아마 <시베리아의 숲에서>가 진실로 만화로 그려내고 싶었을 부분은 페이지 너머의 보이지 않는 부분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바이칼호의 얼음이 깨지는 소리, 너무나 거대해서 시야에 다 담기지 않는 나무들, 눈 속에서 열흘 치 장작을 패며 흘리는 땀방울……. 여정의 빛나는 순간들은 포획될 수 없고, 포착될 수만 있는 것은 아닐지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계획되지도, 통제되지도 않는 순간들을 맛보고자 사람들은 여행이라는 이름의 모험을 하는 것은 아닌지.

그러나 <시베리아 숲에서>의 칸은 온통 홈통으로 둘러싸여 있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도록 배열된 직사각형의 칸에는 테두리 선이 없다. 그것은 액자와 매트보드로 격리된 회화 작품처럼보인다. 자연은 질감 없는 매끈한 디지털 페인팅으로 방부 처리되고, 시간은 균일한 간격으로 나열된 홈통에 둘러싸여 사로잡힌다.

시베리아에서의 생동감 넘치는 경험은 이러한 미학적 배치 안에서 박제되어 버렸다. 단적으로 말풍선을 보라. 인물은 스스로 말하지 못하고 직접 인용되고 있다. 어쩌면 만화라면 가능할 수도 있었던 것-새롭게 감각하기는 실패한다. <시베리아의 숲에서>가 그린 타이가 숲에서는 박새의 지저귐이 들리지 않는다.



1) <만화학의 재구성>(한상정, 2021, 이숲)에서 인용한 발터 벤야민을 재인용.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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