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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벌전(무당, 벌레, 전설)>: 무림(武林)의 현실에 대하여

무벌전(노백, 네이버웹툰) 리뷰

2025-10-01 김득원

<무벌전(무당, 벌레, 전설)>: 무림(武林)의 현실에 대하여

『무벌전』, 노백


누군가는 ‘현실적인 무림’이 존재하는지 물을 것이다. 관무 불가침(官武 不可侵) 원칙에 따르면 강호는 그들만의 세계이며, 인간의 이중성 외에 어떤 사회적 장치를 더할 수 있는지, 나아가봐야 궁과 왕, 국가를 뒤엎는 전복 말고 무엇이 있겠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 지독한 현실의 원리를 적용한 무협 작품이 있다. 네이버 웹툰 플랫폼에서 2024년 6월 연재를 시작하여 2025년 7월 53화 이후로 휴재 중인 웹툰 <무벌전>이다.


영원한 건 없다: 무공의 종말

신무학(神武學)이란, 빠른 살상과 제압을 제일가치(第一價値)로 삼으며 어떠한 무술과 겨뤄도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실전 능력을 추구하는 실증주의(實證主義) 무술학파를 통칭한다.” 웹툰 <무벌전>의 1화 도입부는 상기와 같이 신무학을 설명하는 내레이션과 신무학에 처참하게 패배하는 구무학의 무림인들이 차례차례 격파되는 몽타주 컷이 이어진다. 금강불괴지신에 가깝다고 여겨지는 이가 단 한 합도 버티지 못하고 패배하는가 하면 구파일방으로 언급되는 명문정파인 곤륜, 점창, 형산마저 신무학에 범접하지 못한다.

이들은 패망의 길을 걷게 되며, 무당도 이 흐름에 휩쓸린다. 이에 무림맹은 ‘검증’이 끝났다며 신무학을 새로운 교본으로 삼아 익히도록 권한다. 신무학은 기술의 완성도를 떠나 승리를 위해 창안된 무술이란 점에서 현대의 격투기 기술과 유사하다. 게다가 내공이나 검기가 거의 표현되지 않아, 동양 판타지가 아니라 정통 액션물처럼 보인다. 한 합 한 합을 주고받으면서 그 여파가 고스란히 축적되는 게 느껴진다. 해당 작품은 무협 장르에서 신비로움을 거세하고, 무공을 단순히 우월한 폭력 수단의 일종으로 바라본다. 기존 구무학의 가치는 수련을 통한 ‘개인의 성취(成就)’인 무공 그 자체에 있었으나, 웹툰 <무벌전>은 이러한 개개인이 가진 무공이 ‘효율 기반의 이론적 체계(體系)’에 힘없이 무너지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그려냈다.

 

벌레가 된 영웅: 몰락한 무당과 남은 삶

긴 세계관 설명이 끝나고 주인공 ‘충엽’이 무당산을 오르는 장면에서 작품이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강호행을 마치고 돌아온 무당파의 제자 충엽은 본인이 없던 사이 무당이 망해 버렸음을 알게 된다. 장문인과 장로는 빚을 진 채 문파를 떠났고, 남은 제자들은 각자 살길을 찾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이 사실을 알려준 이는 충엽의 사매 ‘무영’, 무영은 근처 객잔에서 점소이로 일하며 무너진 무당의 전각에 들러, 사형제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내 충엽은 삶의 의욕을 잃고 ‘벌레’처럼 무위도식하며 무영에게 기대어 생활하게 된다. 그러나 목적 없는 주인공이 어떻게 작품을 이끌어 갈 수 있겠는가. 사형제 중 한 명이자 무당의 마지막 관문 제자, 그리고 무당 삼 협의 막내인 ‘석현’은 다시 나타나 무당표국을 개국하고, 문파의 재건을 꿈꾼다. 그는 충엽을 보살피고 이끌고자 한다. 와중 충엽이 강호행을 떠났을 당시 만났던 인연과 무당파의 다른 제자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작품이 진행된다. 웹툰 <무벌전>은 무공이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 재차 묻는다.

이후 무당표국의 첫 표행, 암습으로 인한 표행의 실패와 석현의 중상, 충엽의 강호행이 사실 무림맹의 특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여정이었다는 과거 서사 등이 차례로 다루어진다. 53화 이후 휴재인 현재 시점은 아직 작품의 도입부에 지나지 않는 듯하다. 석현이 무당을 재건하겠다는 포부가 시작부터 꺾이게 된 마당이고, 충엽이 뛰어난 무위를 가지고도 왜 그토록 의지를 다잡을 수 없었는지 설명해 주는 데 집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과정이 있기에 ‘무벌전’이 어떻게 풀려 무당과 벌레와 전설로 엮이는지 궁금해졌음을 말하고 싶다.

 

영광은 뒤로, 앞엔 현실뿐

근래 무림을 배경으로 하는 무협 장르는 동양풍 액션 판타지란 수식어와 쉬이 연결된다. 국적을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복식, 화려하며 길고 어려운 초식명, 단 2명의 다툼만으로도 주변이 초토화되는 상황이나 절벽을 훌쩍 뛰어오르고 산등성이 하나를 기파만으로 날려버리는 초현실적인 장면 등이 자주 보인다. 또한 삼류부터 현경이나 자연경, 생사경까지 점점 다양한 힘의 등급이 생겼다. 현경이더라도 같은 초입과 극으로 다시 세분된다. 육체와 정신을 단련하는 무()(도)에 대한 접근보다 힘을 향한 갈망과 환상만이 엿보이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어쩌면 우리가 보는 무림은 ‘구()무협’이 시대에 발맞추어 발전한 영리한 세계로 봐야 할 테다. 그리하여 많은 무협 장르의 세계관에선 이제 무공이 초월자로서의 전제이자 증거로서 존재한다. 주인공을 비롯한 주요 인물들은 대체로 인간 이상의 무언가가 된다. 우린 현실에서 벗어난 판타지를 향유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시대는 끊임없이 흐르고, 우리도 달라지고 있다. 더 수월한 입장에서 삶을 영위하고 싶다는 욕망이 반영되었을 ‘회귀·빙의·환생’ 설정마저 다시 시들해지고 있는 요즘, 우린 현실과 동떨어진 동경의 대상보다 현실적인 공감의 대상을 찾고 있는 걸로 보인다. 인스타툰 속 자전적 서사를 향한 뜨거운 관심 역시 이런 흐름의 증거가 아닐까. 무림에 대한 의견도 그렇다. 이상적이기만 한 낭만과 협의는 어색하다. 누구에겐 옳은 게, 누구에겐 그른 일일 수 있다는 관점의 변화 또한 이미 수많은 작품에서 다루어졌기에 이제 당연하다. ‘막연한 영웅담보다 조금 더 현실적인 생존기’를 찾는 경향성은 다양한 장르에 유의미한 영향을 주고 있다고 본다.

무협 장르 중 웹툰 <무벌전>은 그간의 전통적 상상력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며 사회적 맥락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현실적인 무림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무학이 대체될 수 있다는 가정하에, 무림인들이 차지하던 일종의 권위를 빼앗기는 과정을 느린 호흡으로 묘사한다. ‘진짜’들은 살아남았지만 ‘가짜’들이 일으킨 작은 파도가 모여 모두를 휩쓸 거라는 암시는 섬뜩하다. 충엽의 허무란 ‘진짜’가 느낀 시대에 대한 막막함에서 기인하지 않았는지 짐작한다.

 

'진짜' 현실의 축소판인 강호(江湖)

칼 한 자루를 들고 세상을 자유로이 떠도는 사람을 동경했던 적이 있다. 누구에게나 당당하고 본인의 존재 가치를 설명이 아닌 행동으로 증명해 내는 그 담백함이 근사했다. 며칠 동안 씻지 못하고 청결하지 않은 잠자리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자면서, 넝마를 입고 다니는 걸 익숙하게 여겨야 할 불편한 생활에 대한 걱정은 접어둔 채 단지 몇 장면만을 상상하면서 보고 싶은 것만 봤다. 꽤 오래전 일이긴 하다. 언제부턴가는 그저 편안하고 깨끗하며 단정한 시간을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 싶어졌다. 더군다나 떠돌이들은 대체로 뻔뻔하고 거칠며 어떤 책임들은 철저히 외면하곤 했기에, 대의(大義) 앞에서 사소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실제 삶은 챙기고 들여다봐야 할 게 너무 많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그 떠돌이들은, 정말로 자유로웠을까?

웹툰 <무벌전>의 무림 역시 정파와 마교의 구분이 있다. 그러나 실상은 생존과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현실 사회에 가깝다. 정치적 계산에 따른 권모술수, 계급, 지역성, 세력의 역학 등 요소들이 무공에 우선해서 대두되며, 천하제일인 내지 고금제일인과 같은 인물이 나오지 않는다. 대부분의 무림인이란 단지 운동을 많이 했기에 육체적 기량이 높은 ‘사람’처럼 그려진다. 전쟁의 승패를 뒤집는 특정 경지의 존재, 수많은 이들을 도륙하는 일당백의 살수 따위는 없다. 결국 웹툰 <무벌전>의 무공은 힘의 일종일 뿐, 사회적 관계와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은 현실의 축소판인 것이다. 무협 장르 속 무공의 신화가 효율성 앞에 맥없이 무너지는 이러한 서사는, 우리가 살아가는 경쟁 사회의 단면을 그대로 투영한다.

 

'가짜'가 넘쳐나는 세상, 무림이라고 예외는 아닐 터

웹툰 <무벌전>은 무협의 껍데기를 쓰고 있지만, 기실 현 사회의 냉엄한 경쟁 구도와 기존 권위의 몰락을 그린 우화(寓話)이다. 전통적인 무공(수양)이 무학(이론·기술)에 훼손되는 과정은 낭만적인 환상에서 깨어나는 우리의 모습을 대변한다. 무공은 언제든 대체될 수 있으며, 이는 무공에 한정되는 얘기가 아닐 거라는 함의를 던진다고 본다.

진짜”는 결국 살아남을 테지만, “가짜”가 넘쳐나는 세상인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신무학이란 새로운 질서 앞에 무너진 구무학에서도 낡은 명분만을 내세우던, “진짜 속 가짜”들을 수면 위로 끌어 올린 공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테다. 이 원리가 어디 웹툰 <무벌전> 속 무림에만 적용될까. 우리의 사회도 예외가 아닐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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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득원

만화 평론가
E-mail: dokwon0o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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