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치킨 전설 오니기리맨
<후르츠 바스켓> (타카야 나츠키 작)
이복한솔(만화평론가)
사랑을 방해하는 장애물은 동서고금 이야기꾼들의 연구대상으로, 주인공이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혹은 철저하게 패배하는) 이야기는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장애물은 시대와 유행에 따라 바뀌지만, 본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 듯하다. 모처럼 사랑할 만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 전후에 구축된 관계나 바탕이 훼방을 놓는 것이다. 하필 상대가 몬테규 가문 인간이라서, 하필 상대의 부모가 반대해서, 하필 상대가 다른 사람을 바라고 있어서...... 이야기가 끝나기까지 짧으면 단편영화 몇 분, 길면 만화 단행본 수십 권이 걸린다.
<후르츠 바스켓>은 몇 달 전 어머니를 잃고 고아가 된 혼다 토오루에서 시작한다. 연고는 있지만 물려받은 유산이 없는 그는 잠깐 노숙자가 된다. 그러다 우연한 계기로 소마 시구레와 그의 사촌 유키를 만나 식객이 되라는 제안을 받는다. 가사를 도우며 식객 생활을 시작한 그는 유일한 혼다 씨로서 소마 가문 사람들과 어울린다. 그 과정에서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가문의 자초지종을 알게 되고, 나중에는 깊숙이 개입하기에 이른다.
유키와 쿄우는 토오루와 한 지붕 아래에 사는 동급생이다. 그들은 토오루를 사이에 둔 연적으로, 틈만 나면 쥐와 고양이처럼 심하게 다툰다. 아닌 게 아니라 그들은 인간인 동시에 동물이기도 하다. 유키는 쥐로, 쿄우는 고양이로, 이성과 밀착하거나 심신이 허하면 동물로 변해버리는 저주에 걸려있다. 여성 소마 셋과 남성 소마 아홉이 모두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들은 ‘십이지’라고 불린다. 이름 그대로 소마에 속한 열두 인물은 십이지의 열두 동물과 연결된다. 단, ‘고양이’ 쿄우는 예외로 취급된다. 타인, 특히 이성과 접촉할 수 없다는 점에서 소마 십이지는 이미 아웃사이더인데, 쿄우는 그 가운데서도 소외당하는 이중고를 겪는다. <개구리 왕자>의 개구리가 <미녀와 야수>의 야수가 못마땅하다며 비웃는 꼴이지만 고양이를 따돌리는 주동자가 너무 막강해서 다른 도리가 없다.

포옹이나 키스 같은 친밀한 접촉이 저주를 푸는 것이 아니라 발동시킨다는 역발상은 퍽 침울하다. ‘개구리’나 ‘야수’가 동물에서 인간으로 변하는 것은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졌을 때 나타나는 긍정적인 변화를 암시한다. 상대에게 인정받고 나면 그와 동등한 입장을 획득/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십이지의 변신은 정반대다. 그들은 애정을 공유하려는 욕구나 아파서 도움을 청해야겠다는 본능을 억제한다. 인간 앞에서 동물로 변하면 입장이 한참 격하될 뿐 아니라, 그것을 회복하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공포는 인물을 위축시키고, 위축된 인물은 상황이 등을 떠밀지 않는 한 다음 플롯으로 넘어가지 못한다.
십이지 인생의 장애물은 원치 않는 변신뿐만이 아니다. 소마 가문의 당주 아키토를 향한 막연한 애정 역시 그들의 성장과 발전을 저해한다. 이 감정은 개인의 의도와 무관하다. 선택 사항이 아니며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불가항력이다. 작가가 그렇다니까 그러려니 하지만, 영문 모를 조건 없는 사랑은 그것을 누리는 아키토에게도 그다지 설득력이 없는 모양이다. 아키토는 긴밀한 관계에 뒤따르기 마련인 불안-‘오늘부터 상대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어쩌지?’, ‘나를 싫어하게 되면 어쩌지?’-을 폭력과 감정(특히 절망) 소모로 표현한다. 저주를 자꾸 언급하면서 십이지는 소마의 울타리 밖에서는 살아갈 수 없다고 잔뜩 겁을 준다. 십이지는 아키토가 찌르면 맞고, 밀면 떨어지고, 욕을 하면 듣는다. 가끔 맞서기도 하지만 매번 쉽게 무너지고 만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십이지의 부모가 자녀를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동물로 변하는 자녀를 거부하는 부모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는데, 어느 쪽이든 아키토로부터 자녀를 지키겠다고 나서는 친부모는 등장하지 않는다.
혈육에게 외면당하고, 폭력에 노출된 십이지는 불안정하다. 당주 보다 일찍 태어난 이들은 정도가 덜하지만, 그와 동갑내기이거나 보다 어린 이들은 다소 극단적인 성향을 보인다. 감정을 필요 이상으로 강하게 분출하거나, 아예 표현하지 않고 침잠하거나, 상대를 강하게 거부하는 식이다. 두 가지 양상은 작품 내에서도 진지하게 다루지만, 첫 번째 양상은 작품의 정서와 명암을 조절하기 위해 반농담조로 그려진 경우가 많아서 조금 아쉽다. 상대를 동물 이름으로 부르고, 연애 감정에 응해주지 않는다고 기습 공격을 가하고, 전후 사정 따지지 않고 일방적으로 사과를 늘어놓는 등의 언행이 그렇다. 방식은 다르지만, 갈등 해결에 도움이 안 되는 제자리걸음이라는 점에서 전부 대동소이한 실수다.
와중에, 토오루가 썩 등장한다. 커피 머신이 망가진 카페를 찾은 이방인처럼, 그는 쭈뼛거리며 주위를 맴도는가 싶더니 소마 십이지를 하나둘 제 편으로 만들면서 문제의 근원까지 파고 들어간다. 십이지를 매료한 토오루의 마법은 “듣고 싶은 말을 들려”주는 것이다. 그는 당주가 십이지에게 주입한 생각과 상반되는 이야기를 한다. 게임의 선택지를 다 아는 상태에서 플레이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실수가 없는데, 그가 고른 선택지의 내용은 대략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a) 네가 괜찮지 않다니 내가 슬프다. b) 그래도 살다 보면 좋은 날이 온다. c) 살아남는 과정에서 저지른 모든 실수에는 희망이 있다.

부모의 지지를 제대로 받지 못한 십이지는 마음의 밥이 될 만한 말을 떼어주는 토오루의 모습을 모성으로 인식한다. 저주를 풀어줄 수 있는 공주님과 애타게 찾고 있던 이상적인 엄마가 동일인인 것이다. 인정하긴 싫지만, 모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남아있는 사회에서는 아직도 유효한 설정이다. 픽션에서 제시되는 사랑의 장애물 가운데 더 흔하고 현실적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우며, 작가가 이 부분을 제대로 다루고 마무리한다는 점에서 만족스럽다.
그러나 작품에서 다루는 더 크고 중요한 장애물은 타인에게 자신을 드러낼 수 없다는 속박, 거절당할 위험이 매우 높다고 믿는 마음이다. 이성과 접촉하면 동물로 변하는 체질은 보살을 만나면 극복할 만하다. 하지만 내면에 깃든 공포와 절망은 관계를 책임지는 두 사람이 각자 극복해야만 한다. 본인이 노력하지 않으면 도움을 받아도 무용하다. 엄마도 소용 없다.
<후르츠 바스켓>에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유익한 것은 함락신이라는 짓궂은 별명을 붙이고 싶을 정도로 강력한 오니기리(주먹밥)맨 토오루의 모범 답안이다. 하필 나에게 치명적인 결함이 있을 때 감히 사랑을 시도해 볼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대한 조언이다: 사람이 사랑을 갈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상대가 누구든, 원하는 관계가 어떤 형태이든 스스로 원하는 것이라면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조심조심 쑤어봐라. (폭력적이지만 않다면) 좀 이상하고 어설퍼도 괜찮다. 다들 그렇게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