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을 표현하지 않고 실루엣으로 처리하는 것은 각종 예술 작품에서 정체불명의 타자를 표현하는 가장 직관적인 방법의 하나가 되었다. 존재를 확인할 수 없는 인물들은 각종 배경의 군중으로 활용되거나, 의미심장한 역할로 쓰였다. 이러한 인물들은 개개의 드라마가 없는, 연출을 위한 장치적인 수단으로 쓰인다. 이 수단을 목적으로 전도하여 메시지 연출에 적극적으로 이용한 그래픽노블이 2018년 1월에 출간되었으니, 영화 <부산행>과 <돼지의 왕>, <사이비> 등으로 알려진 연상호 감독의 <얼굴>이다.

연상호 감독은 애니메이션과 실사 영화, 각 분야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세계를 구축해왔다. “<돼지의 왕>(2011)부터 <창>(2012), <사이비>(2013)로 이어지는 연상호의 애니메이션은 빠르고 효율적인 제작방식뿐 아니라 그 주제 의식부터 사회파 드라마의 성향을 띠고 있다. 반면 실사영화 <부산행>과 신작 <염력>(2018)의 경우 판타지적인 상상력으로부터 출발한다.”(<연상호의 두 세계>, 한국영화 2018년 2월호)
한국일보의 연상호 감독 인터뷰에 따르면 <얼굴>은 <사이비> 차기작으로 <서울역>과 경합했던 작품이었다. 그래서인지 <얼굴>의 세계는 그간 애니메이션에서 보아온 세계와 좀 더 가깝다. 정치적 메시지가 기둥으로 자리하고, 노동문제, 여성 문제, 약자의 문제 등 사회의. 단면의 레이어가 겹겹이 놓여있다. 여러 층위의 성격을 갖고 있는 등장인물들은 복합적으로 움직이며, ‘정상적인’ 일상으로의 복귀를 갈망한다. 그들이 일상으로 복귀하길 바라는 것은 기형적인 예외상태가 일상이 돼버린 탓이다.
<서울역>의 혜선과 기웅은 어린 나이에 가출해 원조교제를 하고, <창>은 군대라는 폐쇄적, 권위적 집단 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돼지의 왕>에서 아이들은 학교 폭력에 시달리지만 어떤 어른도 그들을 보호해주지 못하며, <사이비>에서는 수몰예정의 마을에 보상금을 노리고 나타난 사이비 장로를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얼굴>의 배경 역시 부조리한 사회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맥을 함께 하지만 그의 비일상은 더욱 교묘하고 은밀하게 자리하고 있다. 약자가 약자에게 행하는 외면, 그리고 성과 외모에 관한 관습적인 폭력은 만연히 사회에 스며있기 때문이다.
<얼굴>의 이야기 구조는 연상호 감독의 다른 작품에 비해 간결하며 직선적이다. 동환의 아버지 임영규는 시각장애라는 천형을 극복한 전각 장인이며, 동환은 아버지의 캘리그래피 연구소 소장이다. 방송국에서 아버지의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던 도중, 동환은 어렸을 적 자신을 버리고 떠난 줄만 알았던 어머니의 소식을 부고로 처음 접한다. 30년 만에 만난 어머니, ‘정영희’는 산에 파묻혀 백골이 된지 오래였고, 시신과 함께 파묻혔던 주민등록증 사진은 훼손되어 고인의 얼굴도 알아볼 수 없는 상황이다. 동환과 다큐멘터리 PD는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추적하게 된다.
그런데 30년 만에 만난 외가 친척들은 물론이고 함께 근무했다던 직장 동료들도 그녀에 대한 회상이 영 석연치 않다. “걔는 얼굴이 괴물 같았거든....”, “우리는 똥걸레라 불렀어.” 주변 사람들이 그토록 멸시하는 영희. 하지만 그들이 영희를 혐오하는 마땅한 이유를 그녀에게서 찾기는 힘들다. 오히려 그녀는 등장인물들 중 가장 상식적이며 정의로운 방향으로 움직이려는 사람이었다. 왜 영희의 얼굴은 ‘똥걸레’나 ‘괴물’같은 폭력적인 언어로 가려져야만 했을까.

영희의 실마리를 찾고자 하는 PD와 영환에게 청풍 피복 직원들 중 하나가 사장과 연관된 기억을 더듬자, 다른 직원이 급히 부인하는 장면이 있다. “우리 사장님이랑....”, “에이, 그건 말하지 말어. 그 사장님이 얼마나 심성이 좋으신 분인데 똥걸레를 거시기 했겄어...?” “우리가 밥 안 굶던 것도 다 사장님 덕이구먼....”
그들에게 사장은 먹고 살길을 마련해주고 용돈도 가끔 쥐어 주었던 고마운 사람이다. 예나 지금이나 ‘먹고 살길’이라는 표현이 갖는 위력은 상당하여 사람을 쉽게 굴복하게 한다. 그들에게 사장은 어떠한 의문을 가져서도 안 되는 존재인 것이다. 권력은 서열을 전제로 한다. 권력 체계에 순응한 인간은 스스로 벗어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를 노예로 격하시킨다. 우스꽝스러운 것은 자발적으로 복종한 인간 역시 서열의 최하층은 거부하면서 다른 사람을 내몰기는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연상호 감독이 그리는 세계에서는 번듯하게 차려입은 등장인물들이 그럴듯한 말을 하지 않는다. 그곳은 바닥의 사람들끼리 더 밑바닥으로 상대를 보내기 위해 이전투구를 벌이는 세계다.
영희의 자매들은 주변에서 영희를 괴물로, 자신들을 괴물 가족이라고 놀리는 것을 오히려 영희를 무시하고 따돌림으로써 화풀이를 한다. 청풍 피복에서 일할 당시 영희의 사수였던 재봉사는 그녀가 당한 성폭행과 해고를 위해 발 벗고 나섰던 영희에게 욕지거리를 한다. 당시 도장을 팠던 시각장애인 영규는 주변 사람들의 부추김에 호감이 있던 영희와 결혼했는데, 똥걸레와 결혼했다며 자신에게 쏟아지는 조롱과 멸시의 원인을 영희의 외모 탓으로 여긴다. 영희에게 ‘똥걸레’라고 별명이 붙은 경위는 이 모든 상황을 압축하는데 근무 중 배가 아팠던 그녀에게 화장실을 다녀올 수 있도록 주어진 시간은 1분이었다. 여자 화장실은 이미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상황이었고, 결국 영희는 바지에 실례를 하고 만다. 진정 똥걸레라고 불렸어야 하는 것은 그녀에게 생리현상조차 제대로 해결할 시간도 주지 않는 비인간적인 노동환경과 그 착취로 이득을 취하는 세력이었어야 하지만 모두가 그녀를 똥걸레라고 조롱할 뿐이다.

차별받는 모멸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장 손쉬운 방법은 상대를 더 약자로 만드는 방법이다. 그편이 시스템의 전복보다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나의 안위를 위해, 타인에게 내 권력을 이용하여 원하는 가면을 씌움으로써, 상대는 철저히 타자가 된다. 임영규는 그렇게 정영희에게 ‘떳떳하게 살기 위한 나의 노력이 수포가 된 것은 네가 못생긴 탓이다’라는 탈을 그녀에게 씌운다. 여태껏 다른 등장인물들이 그녀에게 못생긴 괴물, 똥걸레의 탈을 씌운 것과 같다. 가면 아래 타자는 한 명의 인간이 아닌 내 위상 상승을 위한 대상이 될 뿐이다. 그들은 본질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그녀 개인의 외모에 모든 화살을 돌림으로써 적극적으로 부조리를 외면한다. 이 도피나 다를 것 없는 외면은 비합리적인 기존의 체제를 굳건하게 만드는데 일조한다. 영희가 권위에 굴종하지 않고 옳은 행동을 하고자 했던 것은 비상식, 비일상이 만연한 사회에서 이미 ‘괴물’로 규정지어진 그녀를 탄압하기에 더 좋은 조건이었다. 그렇게 정영희를 ‘괴물’이라고 불렀던 인간들은 ‘괴물’이 되고, ‘괴물’이라 불렸던 정영희는 인간이 되었다.

한층 질 나쁜 것은 내가 아닌 너를 위해서 해냈다는 자위다. 결말부 임영규의 “너를 번듯하게 기르기 위해서, 너한테까지 그 모멸감을 물려줄 수 없어서 그랬다”는 오열은 그래서 위선적으로 느껴진다. 동환이 납득하지 못하자 그는 바로 태도를 바꾸며 “너는 내가 고생해서 이룬 걸 그냥 받아먹는 기생충이다”는 비난을 가한다. 내 운명은 내가 개척했다, 나는 살아있는 한국의 기적이라고 주장하는 임영규의 초점 잃은 눈빛은 자유민주주의를 대가로 한강의 기적을 이룩했던 기성세대를 연상케 한다. 이 지점에서 이 책은 진정으로 그들을 서로 타자화시킨 것이, 그들 스스로에게 서열을 매기도록 만든 것이 누구인지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실로 얼굴을 지운 것은 누구이고 얼굴이 지워진 것은 누구인가. 한강의 기적이 뒤로 낳은 그림자가 그들의 모두의 얼굴을 덮고 있는지 모른다.
<부러진 화살> 맺음말에 수록된 한 할아버지의 인터뷰를 인용한다. 그는 1970년 전태일 분신자살 사건을 지척에 목격한 사람이었다.
할아버지 : 그때 내가 포목을 지게로 나르고 있었거든. 경비가 나보고 원단 하나 달래. 그것으로 불 끈다고. 그런데 내가 거절했어.
작가 : 왜요?
할아버지 : 그럼 내가 원단 값을 물어줘야 하잖아. 잘 됐잖아.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라고 했는데 나도 여기서 먹고살아야 하겠고, 결국 전태일은 유명해졌잖아. 난 더 이상 할 말 없으니까 그만 가!작가 : 그래도 세월이 흐르니까 그때 원단 건네주지 않은 거 미안하다는 생각이 안 드세요?
할아버지 : (한숨 쉬며) 살다가 가끔 그런 생각이 안 드는 건 아닌데.... (강하게) 그때 만약 살았어 봐! 그 화상 입은 병신을 누가 돌봐 줄 거야. 평생을 누가 돌봐 주냐고! 그러니 잘 죽은 거야, 유명해지고. 전태일 때문에 노동자 운동해서 권익이 조금은 보호됐잖아.

그를 쉬이 비판할 수 없다는 점이 우리 사회의 비극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자본이라고 했다. 자본을 쟁취한 자가 자유라는 권력을 누릴 수 있고, 자유가 없는 자는 생명과 존재를 눈앞에 두고도 그 무게를 가늠할 길이 없다. 전태일의 몸에 붙은 불을 꺼주지 않은 것도, 정영희를 ‘똥걸레’로 규정한 것도 자본을 등에 입은 권력이었다. 그리고 더 깊이는, 성 억압적인 권력 구도와 인간성의 본질에 대한 의문 역시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얼굴> 마지막 장, 미소 짓는 영희의 얼굴 너머에는 무수한 인영들이 있다. 감독이 던진 화두가 단지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는데 그치지 않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