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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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커런트

저류 혹은 암류 (토요타 테츠야 작) 이선인(만화평론가) 토요타 테츠야는 1989년 애프터눈 사계상(アフタヌ-ン四季賞)에 가작으로 입선하였지만 작가로 데뷔하지 않았다.(혹은 못했다.) 그가 작가로써 데뷔하게 된 것은...

2018-06-21 이선인


저류 혹은 암류

<언더커런트> (토요타 테츠야 작)


이선인(만화평론가)

토요타 테츠야는 1989년 애프터눈 사계상(アフタヌ-ン四季賞)에 가작으로 입선하였지만 작가로 데뷔하지 않았다.(혹은 못했다.) 그가 작가로써 데뷔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14년 후인 2003년이었으며, 다시 만화를 그린 계기는 다름 아닌 생계를 위해서였다고 한다.

2003년에 동일한 공모전인 애프터눈 사계상에 응모하였고, 단편 <고글>로 대상을 수상한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다니구치 지로는 <고글>을 ‘모든 면에서 완벽한 만화’라고 극찬한 바 있다. 이러한 찬사에 힘입어 2004년에는 드디어 장편 <언더커런트>를 월간 애프터눈에 연재하게 된다. 이것이 그의 꿈의 프로젝트였는지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2회의 휴재를 포함해 정확히 1년(10화)의 연재로 <언더커런트>를 마감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선택이 매우 흥미로운데, 그는 ‘공장에서 일을 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작품 활동을 중단했다고 한다. 다행히 약 1년 후 부터 다시 부정기로 단편을 기고하기 시작했고 2008년에는 옴니버스 연작인 <커피시간>도 연재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언더커런트>가 (현재까지는) 그의 유일한 장편 작업이다. 



<언더커런트>가 그의 사고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알 수는 없다. 그가 원했던 ‘생계유지’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혹은 ‘대상’이라는 영예와 찬사에 비해 자신의 결과물-과 그 반응-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건 이 <언더커런트>가 그에게 작가의 삶을 완연히 보장해주지는 못하였던 것 아닐까? 당대에는 의미 있는 평을 받았다는 모양이나, 토요타 테츠야의 이 저작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거나 흥미를 끌지는 못했음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나마 <언더커런트>의 명예가 2009년 앙굴렘 국제만화제에 출품되고 프랑스어판의 발간이 확정되고 나서야 공고해졌음을 감안하자면, 그가 자신의 작품에 대한 만족감을 4년이나 유예했었을 가능성도 어느 정도 예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그의 유일한 장편인 <언더커런트>는 이러한 내용이 된다. 아버지로부터 대중목욕탕 ‘츠키노유’를 물려받아 남편 사토루와 함께 운영 중이던 카나에. 어느날, 목욕탕 조합원들끼리의 여행에 함께 나선 사토루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카나에는 충격을 받아 목욕탕을 휴업하게 되지만, 결국 아무런 소식을 듣지 못한 채 3개월이 지나고 만다. 카나에는 다시 목욕탕을 재개하기로 결정하고 조합을 통해 사토루의 업무를 도맡을 사람을 부탁한다. 그렇게 무뚝뚝한 남자 호리가 카나에의 앞에 나타나고 목욕탕은 점점 예전의 활기를 되찾아간다. 그러던 어느날, 카나에는 친구 요코로부터 탐정 야마자키를 소개받아 남편 사토루의 행방을 다시금 좇기 시작한다. 하지만 야마자키가 알려주는 사토루에 대한 사실들은 카나에에게 생소하기만 하다.

감춰진 진실과 고통이 수반될 것 같은 시놉시스를 가지고 있음에도, <언더커런트>는 그것을 강력한 무기처럼 휘두르려고 하지 않는다. 한 페이지에 많아야 6컷, 기교 없는 직사각형의 컷들과 가늘고 촘촘한 선으로 이루어진 <언더커런트>의 세계는 예상보다 훨씬 심심한 맛이다. 이야기 역시 남편이 사라져 고통으로 일관 중이던 시기를 이미 지나 다시금 목욕탕을 재개하려는 시점을 시발점으로 사용한다.

즉 토요타 테츠야는 <언더커런트>의 세계를 구축함에 있어 강력하게 촉발되는 감정을 배제하려든다. 그는 수수하고 일상적인 터치, 가볍고 소소한 농담들을 <언더커런트>라는 이야기가 가진 진짜 무기로 다루려 한다. 그렇기에 책을 처음 펼치게 된 독자들은 이 작품이 사뭇 느슨한 일상의 사건과 교훈 따위를 다루는 작품처럼 느끼게 될 수도 있다.

이 작품의 재미있는 포인트는 이러한 작품의 태도를 절정 이후까지 지속적으로 유지한다는 점이다. 상기에는 토요타 테츠야가 ‘강력하게 촉발되는 감정’을 배제하려 들었다 했으나, <언더커런트>는 절대 피상적이거나 가벼운 감정만을 다루는 작품은 아니다. 이것은 ‘어떤’ 감정을 다루고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동일한 감정을 ‘어떻게’ 다루고 있느냐 하는 관점의 문제다.

<언더커런트>는 (매우 당연하게도) 카나에의 심적 동요와 혼란을 수반하는 이야기로 전개되어간다. 하지만 그 과정에 있어서 절대 독자들보다 먼저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고조된 감정을 만드는 즉시적 표현들, 이를테면 강렬한 표정, 뾰족하게 날이 선 외침의 말풍선, 어지러운 컷의 배치 따위는 최대한 배제된다. 토요타 테츠야는 도리어 카나에의 심적 골이 깊어질수록 가로로 긴 컷들을 쌓듯이 수직 배치해 플랫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런 방법론은 독자가 작품의 감정선을 쫓아 깊이 들어오려는 것을 최대한 방어한다.

 


결국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특히 주인공 카나에의 감정은 양식이라는 표면의 아래쪽에서만 요동치게 된다. 독자는 작가가 제공하는 표면적인 행동들, 이미 감정을 통해 만들어진 일견 딱딱해 보이는 결과들과 조우하게 되기에 미세한 촉각을 세우지 않고서는 완전히 감정을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공교롭게도 작중에서 탐정 야마자키는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뭡니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들은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언더커런트>를 읽는다는 것은 주인공 카나에를 ‘알게 되는’ 과정과 상통하는 것일까? 무언가를 본다는 것, 그것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그에 대한 정확한 이해로 가는 확실한 길인가?

 


<언더커런트>는 그러한 질문에 부정의 대답을 던진다. 카나에가 남편 사토루를 생각보다 잘 알고 있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가 작가가 만들어 놓은 형식을 통해서 그와 유사한 감각을 느끼는 것처럼. 작품의 제목이 되는 ‘언더커런트(Undercurrent)’라는 단어는 물의 표면이 아닌 아래쪽에서 흐르는 저류(低流) 혹은 표면과 모순되는 암류(暗流)를 뜻하는 단어다. 이 제목은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확실히 내비친다.

우리가 표면의 무엇만을 보고 있는 한, 그 밑에 흐르는 또 다른 물의 흐름은 읽어낼 수 없다. ‘츠키노유’의 재개장을 다루는 초반 시퀀스에서는 탕에 몸을 담그고 카나에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동네 사람들의 모습을 열거한다. 탕에 몸을 담그고 있는 사람들은 그 표면의 위에서 서로의 정보를 나누지만 이 정보들은 그저 휘발되는 표피의 정보일 뿐이다. 진짜 가치는 그들이 몸을 담고 있는 표면 아래, 탕 내부의 흐름에 있을 터인데 그들은 그것의 중요성이나 가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나누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이 ‘목욕탕’이라는 공간은 <언더커런트>가 말하는 세계의 미니어처 같은 느낌까지 준다.

하지만 그 전부가 일종의 악은 아닐 것이다. 작품이 가지고 있는 표면적인 말랑말랑함 또는 유쾌함, 그리고 작중의 인물들이 서로에게 배푸는 관심과 선의는 토요타 테츠야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근본적 신뢰를 져버리지는 않았다는 증거처럼 느껴진다. 그렇다, 인물들은 서로에 대해 속단하고 근거 없는 정보를 나누며 때로는 오판한다. 주변 사람들은 호리와 카나에가 서로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지니고 있는지, 그 저류가 어떠한지 읽으려 시도하지도 않으면서 둘이 부부가 될 것인 양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작 중 누구도 그런 말을 저속한 생각의 발로 혹은 음해와 모독을 위한 무기처럼 다루지 않는다. 굳이 이것을 읽어야 한다면, 그것은 당장의 커다란 사건을 감내해야 하는 카나에에 대한 염려로 봐야 하지 않을까?

관계의 실패를 다룸에도 냉소와 허무로 빠져들지 않을 수 있었던 배경은 역시 이러한 사려 깊음의 작용이 아닐까 싶다. 작중의 인물들은 표면만을 읽기에 진의를 파악하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대상을 깊이 의심하거나 증오하지는 않는다. 카나에는 말도 없이 사라진 사토루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긴 하나, 그것을 책망에 이용하기는커녕 자기 스스로를 돌아보는 데에 사용하려 한다. 토요타 테츠야는 카나에라는 인물을 이용해 결국 이 모든 것이 우리가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얕은 속성임을 밝힌다.

 


카나에의 대사를 빌리자면 우리는 모두 ‘약한 인간’이라는 것인데, 때문에 우리는 각자의 저류를 감추거나 그것이 없는 양 표면의 정보만을 훔치게 된다. 다만 이는 죄악이 아니다. 상기 이야기했던 바, 이 모든 것은 그저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속성에 지나지 않으니까 말이다. 종국에 따귀를 날리기 보다는 목도리를 감아주기를 선택한 카나에의 결정처럼, 그러한 약점을 내제하고서라도 타인에 대한 선의를 잊지 만 않으면 된다는 것이다. 혹은 ‘남자에게 기대지 않고 잘 해나갈 거다.’라는 선언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기를 결정하면 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장에서 일을 하기 위해’ 잠시 사라졌던 그가 이러한 희망마저 버리지는 않았었기를 빌었던 때도 있었다. 그래서 과연 어떠했을지는, 토요타 테츠야의 복귀작 인 <커피 시간>을 보면 해소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커피 시간>의 ‘언더커런트’를 최대한 읽어주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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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인

2017년 신인만화평론 공모로 만화평론가로 등단, 2022년 GG 게임 비평 공모로 게임평론가로 등단하였다. 영화를 전공했으며 평소에는 만화, 게임, 영화에 관한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