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
미모의 기준을 가르는 얇디얇은 털 한 올. 자꾸만 나는 털, 자꾸만 빠지는 털. 사람을 괴롭히는 털의 종류는 참 다양할 터다. 그로 인해 고통 받는 인구는 몇이나 될까? 제모로부터 자유로운 여자는 (거의) 없다. 남녀노소를 불구하고, ‘탈모인구 천 만 시대‘ 제목의 기사가 쏟아진다. 어느 부위의 털은 레이저 등 장비까지 동원해 작살(?)을 내고, 또 다른 부위의 털은 모종을 옮겨 심듯 심혈을 기울인 수술까지 감행한다.
그렇다... 털. 한 글자가 안겨주는 공포는 좀비 스릴러물보다 크다. 털이 많고 적음으로 인한 슬픔은 여느 커플의 이별 이야기가 주는 그것보다 깊다. 이 웹툰의 소재가, 참으로 탁월하게 느껴졌던 이유다.
버프툰에 연재중인 <털업>. 털 나는 여고생과 털 빠지는 남고생이 원수 같은 털로 엮이는 기상천외한 털 상생 로맨스물이다. 장르는 코믹, 학원물. 코믹물답게, 작가의 개그 연출력이 스토리 곳곳에 녹아있다. 털로 인해 공포에 떨어본 이들, 슬퍼봤던 이들의 마음은 물론 배꼽까지 사로잡을 명작이 아닐까. (이 작품이 연재 플랫폼의 공모전 1등 수상작이라는 사실은 필자의 의견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근거일 뿐이다.)
캐릭터 소개로 넘어가보자. 쾌활하고, 예의바르며, 공부까지 잘하는 고등학교 3학년, 고향연.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아온 그녀의 일상을 깨트린 건 바로 턱수염. 거친 털이 보드랍고 매끈하던 턱을 뒤덮기 시작한 것이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야성적인 턱수염에 향연은 언제 어디서든 마스크를 쓰고 다녀야하는 처지가 된다. 가장 친한 친구들에게조차 터놓을 수 없었던 탓일까, 발랄했던 소녀는 수북해진 털로 인해 성격까지 괴팍해진다. 그 어떤 시술로도 사리지지 않는 징한 턱수염에 유일한 해결책은 면도뿐이었다.
그녀의 학교에는 또 다른 종류의 ‘털’로 고생하는 한 남자가 있다. 바로 전교 2등 이태백이다. 그 또한 가족, 성적, 친구 등 모든 방면에서 충만한 유년시절을 거쳐 왔지만, 중학교 3학년 예상치 못했던 인생의 고비가 시작된다. 학교 폭력, 아버지의 사업 부도는 약과(?)랄까. 그에게 닥친 비극은 한 움큼씩 빠지기 시작한 머리 털이다. 이 때문에, 태백은 열심히 공부해 부자가 되는 것이 목표다. 대머리가 되어버린 열아홉 소년에게는 가난보다도 ‘모발’이 공부의 원동력이다. 이런 두 캐릭터가 전교 등수로 엮여 있는 설정이 설득력을 지니는 지점이다.
‘우당탕탕’ 서로가 부딪히는 로맨스 첫 만남의 클리셰로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엮인다. 학교 복도에서 부딪힌 두 남녀. 그러나 마냥 진부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부딪힌 순간, 둘은 각자 털의 존재와 부재의 가리개인 마스크와 가발을 신경 쓴다. 향연의 마스크가 살짝 벗겨질 듯하는 순간, 타들어가는 그녀의 심정이 필자에게는, 느껴졌다. 이후, 씩- 씩- 거리며 집으로 향하는 향연의 뒷모습이 특히 애잔했다.
또 재밌었던건, 바닥에 떨어진 물건의 정체다. 둘을 엮기 시작한 충돌씬에서 활용된 건, 로맨스 물의 핵심 아이템인 ‘책’이 아니라 ‘발모제’다. 부딪히며 태백에게서 떨어진 대머리 태백의 발모제다. 그러나, 향연은 이를 자신의 면도크림으로 착각해 급히 주워 달아난다. 집에 도착해 턱에 발모제를 바르기까지 한다. 그래서 수염이 더 나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물건의 정체를 깨닫게 된다. 풋풋한 열아홉 남녀의 관계를 ‘발모제’가 잇는 웹툰이라니... 바람직(?)하다.
아무튼 발모제로 인해, 두 사람의 사이는 전교 등수로 맺어진 라이벌 구도에서 로맨스 구도로 전환된다. 가난한 탈모인 태백에게 비싼 발모제는 하루 빨리 되찾아야 하는 물건이기에, 태백은 향연을 좇는다. 비가 추적추적 오는 어느 날, 발모제를 되찾기 위해 태백은 향연과 함께 그녀의 집으로 향한다. 습한 날씨 탓인지 태백의 가발이 스르르 벗겨지고, 이어 향연의 마스크까지 벗겨지고 만다.
이후 두 주인공은 피부 접촉 사고로 서로가 생각지도 못한 털 상생관계임을 깨닫게 된다. 이 웹툰의 포인트는 개성있는 캐릭터 설정과 둘의 관계에 있다. 여자와 턱수염이 짝지어져 탄생한 향연의 캐릭터와 대머리와 고등학생이 연결되어 구축된 태백의 캐릭터. 그 둘이 서로 가발과 마스크라는 가리개없이 생활하기 위해서는 두 손을 꼭 붙잡고 있는 시간이 필요한 사이. 듣도 보도 못한 그런 털 상생 관계다.
대머리 태백에 두근거리기 시작한 향연과, 수염 난 향연이 신경 쓰이기 시작한 태백. 현재 15화까지 연재된 웹툰 <털업>에서는 코믹 삼각 로맨스가 막 시동을 막 걸고 있다. 태백을 짝사랑하는 여자 캐릭터 '허솔'의 등장으로 코믹한 긴장감이 더해진다. 태백과 향연의 가까운 사이를 질투한 허솔은 향연의 약점을 잡아 괴롭히려 든다. ‘털’있는 독자라면 향연과 태백의 이야기를 늦지 않게 감상하길 추천한다.
향연과 태백을 포함한 제모인과 탈모인들이 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세상을 바라며, 다함께 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