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판타지 장르, 줄여서 로판이라고 불리는 장르는 최근 들어 웹툰에서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 장르이다. 로판 웹소설의 성장이 웹툰의 제작으로 이어지면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남녀의 연애 서사를 기본으로 마법과 신화, 드래곤 등 이종족과 같은 판타지적 요소를 버무린 로판 장르는 자칫 뻔할 수 있는 서사에 여러 가지 매력적인 요소를 더하며 인기를 얻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오늘날의 로판 장르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주목해야 할 점은 ‘여성 주인공’을 내세운 ‘여성 서사’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로판 장르를 향유하는 층은 상당수가 젊은 여성 독자이다. 젊은 여성 독자들의 관심사인 페미니즘과 맞물리면서 현재의 로판 장르는 여성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여성의 이야기라는 점에 좀 더 방점이 찍혀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로판 장르에서 여성 주인공과 남성의 연애 서사를 다루더라도 그것이 여성 주인공의 자아실현에 도움이 되는 방식이거나, 혹은 서사의 중심에 여성 주인공의 성장과 모험이 놓이고 로맨스는 뒷전인 경우도 많다. 이러한 현상은 독자의 관심사에 민감하고, 반응이 빠른 웹소설, 웹툰이라는 매체의 특성으로 인해 당연한 결과라고 하겠다. 따라서 오늘날의 로판 장르 웹소설, 웹툰은 현재의 페미니즘 경향을 빠르게 반영하여 다양한 여성 서사들을 생산하고 있다.여성서사로서 로판 장르의 특징 이외에도 최근의 로판 장르에서 흥미로운 점은 로판을 관통하는 로맨스나 판타지 장르적 요소뿐 아니라 다른 장르적 요소나 현대적 소재와의 접합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로판 장르가 가지고 있는 유연성과 확장성에서 기인하는 특성이다.
태선의 웹소설을 원작으로 레페 작가가 카카오페이지에서 연재하고 있는 <치트라:미남을 뽑는 여백작>(이하 <치트라>)는 오늘날 로판 장르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작품 중 하나다. 공무원 고시 준비를 하던 주인공은 갑작스런 차 사고로 사망하고 미의 남신의 인도 아래 신과 마법이 공존하는 이세계의 여백작 ‘치트라 세레키노’의 육체에 빙의한다. 치트라는 백작으로서, 그리고 미의 남신의 사도로서 영지를 다스리고 미의 남신의 이름을 널리 알려야 하는 사명을 맡는다. <치트라>에서 특색 있는 점은 인재를 영입하는 방식에 게임의 요소를 차용했다는 점이다. 치트라가 인재를 ‘뽑는’ 방식은 소위 ‘가챠 게임’이라고 불리는, 코인을 지불하고 무작위로 인물 및 아이템을 뽑을 수 있는 방식이다. 인물 혹은 아이템의 가치는 1성~5성으로 분류되어 숫자가 높을수록 높은 가치를 지니고, 가치가 높을수록 뽑을 수 있는 확률이 극단적으로 낮아진다. 치트라가 직접 영입하는 인물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인재는 뽑기를 통해 소환된 과거의 영웅이다. 치트라의 역할은 이런 인물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하여 영지를 발전시키고 미의 남신의 이름을 알릴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다. 영지와 신앙을 관리하는 방식은 전략 게임의 방식을 연상시킨다. 영지민의 수와 영지의 발전도, 신앙의 정도 등이 수치화되어 나타나며 전담 관리 인재를 붙일 수 있는 것 등이 유사하다. 인물들의 스테이터스, 즉 능력치가 가시화되어 인물의 성장과 변화가 작화를 통해 가시적으로 보인다.
작중의 설정으로는 <치트라>의 게임적인 요소는 주인공이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며 미의 남신의 사도로서 활동하는 일종의 대가이다. 주인공은 이세계에 빙의하여 ‘치트라’로서의 삶을 살기 이전, 현대사회에서 사망하기 직전까지 휴대폰 게임을 손에서 놓지 않았을 정도로 게임을 굉장히 좋아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러한 게임 요소가 작중에 반영되면서 인물의 변화와 능력 상승이 가시화되고, 장악력이나 카리스마가 수치화되어 돋보이게 되면서 권력자로서의 치트라의 면모가 강조된다. 치트라가 권력자로 성장해가는 것은 작품의 서사에서 가장 중요하다. 때문에 <치트라>의 서사에서는 영주로서 치트라의 성장과 영지의 발전과 확장, 다른 영주와의 정쟁 등을 심도 깊게 포함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뽑은(말 그대로 랜덤 뽑기에서 뽑은)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것이 치트라의 역할이다. 작중에서 표현되듯, 영지를 다스리고 상업을 발전시켜 미의 남신의 영향력도 증대하고 정쟁의 해법을 찾는 것만으로도 주인공의 하루는 바쁘다. 그런데 그 와중에 인재들과의 핑크빛 기류도 챙기자니, 감정을 충분히 고조시킬 만 한 사건이 생길 여유가 충분치 않다. 심지어 남주인공 후보들이 두 세 명의 수준이 아니다. 양 손으로 세어봐야 할 만큼 된다. 이러한 점에서 <치트라>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로맨스’가 성립하지 않는다. ‘로맨스’라고 하는 것의 매력이라고 하면 인물 간의 주고받는 어떤 서정적인 감정선에 있을 것이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두 인물(혹은 그 이상)이 감정적인 측면에서 비슷한 선상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치트라>에서 치트라는 권력자이고 그 주변의 남성들은 그의 가신이다. 남성들은 치트라에게 애정과 충심을 바치고, 치트라는 남성들의 빛나는 미모에 코피를 흘리며 그들의 성적 매력에 만족한다. 일 대 다수의, 이른바 ‘하렘’의 구도이다.
<치트라>에서 드러나는 이들의 ‘하렘’ 관계는 매체의 특성상 만화적으로 과장된 부분이 있어 웃음을 자아내는 요소이기도 하다. 하렘 구도는 남성 일 대 다수의 여성으로 구성되는 경우가 다수라는 점에서, 일종의 통념과 역전된 관계에서 오는 쾌감도 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바 있듯이 인물의 수가 많은 만큼 인물 간의 관계성을 심화시키는 것에는 어려움이 있다. 작중에는 뽑기를 통해 뽑은 인물들의 영혼 구슬을 삼켜 치트라에게 귀속시키면 그 인물과 영혼에서부터 깊이 연결되는, 내밀한 관계가 된다는 떡밥이 있긴 하지만, 웹툰 <치트라>에서 이 부분은 그다지 가시적으로 부각되지 않았다. 필연적으로 다수의 인물들은 평면적이 되기 쉬우며, 캐릭터로부터 작화를 통해 외적으로 드러나는 이상의 매력을 발견하기는 어려워진다. 이 인물들이 무작위 뽑기를 통해 뽑아 ‘수집된’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대상화는 더욱 심화된다. 치트라가 뽑은 인물들은 생명을 포함하여 치트라에게 귀속된다. 이런 관계에서 새콤 달달한, 로맨스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감이 있다. 로판 장르에 소속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음에도 <치트라>가 ‘로맨스’에서 탈주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로판 장르가 이전의 로맨스 우선의 서사에서 여성 서사로 방점이 옮겨가면서 발생한 특질이라고 할 수 있다. 서사는 치트라라고 하는, 과거에는 비참했으나 스스로, 때로는 주변 인물들의 도움을 받으며 성장해 낸 여성이 위대한 권력자가 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치트라에게 종속된 남성 인물들은 이런 치트라의 ‘제왕’적인 면모를 부각시켜 주는 일종의 보조적인 역할인 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인물 구성은 낯선 것은 아니다. 일반적인 남성의 영웅 서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구도를, 남녀 반전으로 재편성 한 것에 가깝다. 그럼에도 새로운 느낌을 주는 것은 일반적이라고 관념화 된 관계의 역전이 주는 쾌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역전이 주는 쾌감은 익숙해지기 쉽고, 익숙해질수록 무뎌지게 될 수 있다. <치트라>는 이제 시즌 2가 마무리 된 참으로 원작의 전개를 염두에 둘 때 아직 풀어나가야 할 이야기가 많다. 남은 이야기에도 이 역전된 관계가 유효할지, 혹은 웹툰 <치트라>만의 새로운 방식으로 전개를 풀어나가야 할지는 고민해 볼 만한 문제일 것이다. 계속될 ‘치트라’의 성장을 기대한다.※ 필자주) 로판 웹툰은 원작 소설이 있는 경우가 대다수이므로 작품을 논할 때 웹툰만을 언급하는 것은 불충분해 보인다. 그러나 소설에서 만화로의 변용 과정에서 매체가 가지는 차이로 인한 변별점은 분명히 존재하므로, 현 지면에서는 카카오페이지에서 연재되고 있는 웹툰 <치트라>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한정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