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부터 네이버 웹툰에서 연재되고 있는 <지옥>은 영화 「부산행」으로 화려하게 극영화 감독으로 데뷔한 연상호 감독과, 웹툰 <송곳>으로 주목받았던 최규석 작가의 협업으로 화제가 되었던 작품이다. 영화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던 연상호 감독이 웹툰을 제작한다는 것은 다소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상호 감독은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기 이전에 이미 단편 애니메이션 <창>, 장편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 <사이비> 등 활발하게 애니메이션을 기획하고 제작한 이력이 있는 인물이다. 이미 애니메이션에서 실사 영화로의 영역 확장이라는 큰 변화를 한 번 추구한 바 있는데다, 이미지를 제작함으로써 무한히 창조적인 서사를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애니메이션과 만화는 닮은 장르이기도 하다. 게다가 작품의 스토리를 담당하는 연상호 감독과 작화를 맡은 최규석 작가는 오래 협업한 이력이 있는 사이다. 연상호 작가의 작업물에서 오랜 시간 캐릭터 원화를 맡아 온 최규석 작가이기에, 두 사람이 웹툰 <지옥> 제작에 손발을 맞추기로 결정하는 것은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연상호 감독이 상상한 ‘지옥’은 최규석 작가의 손으로 우리의 눈앞에 펼쳐지게 되었고, 최근에는 그 여정이 마무리되었다.

연상호 감독과 최규석 작가의 작품들은 공통점이 있다. 작품에서 그려지는 세계관이 사회적 문제를 내포하고 있고 그것을 염세적인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연상호 감독의 <돼지의 왕>은 학교라는 배경을 통해 폭력적인 방식으로 위계화 된 사회를 고발했고, <사이비>는 사이비 종교에라도 매달리고자 하는 인간의 나약함을 보여준 바 있다. 최규석 작가의 <송곳>은 현실의 부조리함과 노동운동 속 인간군상을 사실적이고 냉정하게 그려냈다. 두 사람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세계관이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은, 세계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이 닮아 있고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유사한 측면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공통점 때문인지 두 사람이 함께 제작한 웹툰 <지옥>의 세계관 역시 다소 암울하다. 어느 평범한 하루, 갑자기 정체불명의 존재가 나타나 한 남자를 무참히 도륙한 후 불태워 죽이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목격한다. 이 불가항력적인 재앙에 대해 새진리회는 남자를 죽인 미지의 존재가 ‘신이 권선징악을 이룩하기 위해 보낸 사자’라고 말하고, 신이 그 남자의 죄를 벌하기 위해 지옥으로 간다는 ‘고지’를 내리고 심판을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충격적인 상황을 목도한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새진리회의 가르침에 매달리게 된다.
<지옥>은 끝까지 인물들이 겪는 그 끔찍한 일들이 왜 일어난 것인지 밝히지 않는다. 사람을 도륙하는 세 정체불명의 존재가 어디서 온 것인지, 지옥에 갈 것이라고 예고하는 커다란 여자 얼굴은 도대체 누구의 얼굴인지 같은 것은 작중 내내 명확히 규명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재앙’이다. 이 세계 속 인물들은 우연히 사건에 얽혀 들어가고 대부분 영문도 모른 채 죽고 만다. 마치 왜 그들이 그런 재앙을 겪어야 하는지 알 필요 없다는 듯이.
<지옥>은 제작자가 만들어낸 세계 속에서 이리 저리 휩쓸리는 인간을 관망하며 그들이 설계한 재앙 속에 인간성이 어떤 지점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를 실험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 실험은 인물들에게 가혹한 방향으로 전개된다. 최규석은 작중에서 환경적으로 유난히 빛이 밝은 공간을 표현할 때를 제외하고는 조명을 끈 듯한, 그늘진 장면을 주로 연출한다. 인물들의 얼굴에도 마치 절망이 스미듯 그림자가 져 있어, 암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공포에 굴복하는 인간의 나약함과 사회의 부조리,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점점 더 잔인해지는 인간의 모습 등은 연상호와 최규석이 그들의 작품에서 끊임없이 제기해 온 문제들이다. 인위적으로 가공된 세계관을 설정하여 더욱 극적으로 인간성의 한계를 실험한다는 점에서 <지옥>의 세계관은 일종의 실험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실험은 인위적인 제한과 통제를 통해 현실 세계의 어떤 문제에 대한 단서를 얻고자 하는 행위이다. <지옥>을 인간성에 대한 실험이라고 한다면, 작가들은 독자와 이 실험실을 들여다보며 인간에 대한 어떤 단서를 얻고 싶은 것일까.

<지옥>의 독특한 점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인물을 꼽기 어렵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만화의 서사에서는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특정 인물이 존재하고 그 인물의 시점을 중심으로 사건의 전개를 따라가지만, <지옥>은 굳이 말하자면 중요한 사건이 있고, 그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는 인물들이 서로 교류하고 반목하는 양상을 관조할 뿐이다. 사건을 대하는 인물들의 다양한 인간군상을 보여주기 위해 사건과 엮여 있는 다양한 인물들의 시점을 옮겨 다닌다. 소설의 경우로 치자면 3인칭 관찰자 시점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만, 관찰자가 고정되어 있지 않는 상황이다. 독자는 인물들이 처하는 상황 바깥에 위치하며 그들의 행동을 관찰하게 된다. 주목할 만 한 점은 이 작품에서 독백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이다. 인물들 간의 대화나 표정, 행동을 통해 인물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는 경우가 대다수이고, 인물의 내면 심경을 독백을 통해 직접적으로 접할 수 있는 장면은 많지 않다. 이것은 인물의 상황이나 심정에 독자가 이입하기 쉽지 않도록 거리를 두기 위해 의도적으로 연출된 결과물으로 보인다.
감정이입을 쉽지 않게 하는 것은 인물들의 성격적인 특성 역시 마찬가지이다. 작중에 등장하는 어느 인물이라도 크고 작은 차이는 있지만 과오가 있다. 새진리회 의장 정진수는 선행을 많이 베풀었지만 그것은 20년 전 고지를 받은 것을 만회해보기 위함이었다. 정진수를 추적하던 형사 진경훈은 올곧게 살기 위해 노력하지만 정진수의 음모에 아들이 연루되자 진실에서 눈을 돌린다. 새진리회는 악행하지 말라며 사람들을 억압하며, 소도는 그에 맞서 고지를 받은 사람들을 숨겨준다. 소도의 인물들이 정의로워보일지 모르지만, 태어나자마자 고지를 받은 아기가 나타나자 소도를 이끄는 민혜진 변호사는 아기의 시연을 공개하자며 아기의 아빠를 압박하기도 한다. 이처럼 선악구도를 무마하는 입체적인 인물의 형태는 어느 인물이라도 독자로 하여금 마음 편히 감정이입할 수 없게끔 한다. 여기에 흑백의 연출이 마치 필터를 한 겹 끼고 보는 것처럼 현실감에서 한 발짝 물러서게 하는데 기여한다.
작중 인물에 대한 거리두기에 신경을 기울이는 것은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여기서 거리두기는 독자가 작중 인물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작자의 작중 인물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작자는 독자와 마찬가지로 작품의 바깥에 있으면서 어느 인물에게도 방점을 찍지 않고 모두에게 가혹한 환경을 부여한다. 독자는 작중 인물 누구에게도 기울어지지 않고 상황을 관조한다. 작자와 인물, 독자와 인물 사이의 거리는 작중에 벌어지는 사건에 대해 누구도 관여하지 않는다는 일종의 합의를 가능하게 하고, 그로부터 객관성을 확보한다. 이것은 작위적인 세계 속에서 벌어지는 인물들의 행태를 현실보다 더욱 사실적이라고 느끼게끔 하는 다소 역설적인 효과를 낳는다. 작중 인간군상을 통해 현실의 인간성의 한계를 돌아보고 인간의 가치란 과연 무엇일지 한번쯤 생각해보게 하는 것이다.

<지옥>이 시종일관 암울하고 인간성의 적나라한 바닥을 드러냈기 때문에, 사랑과 희생이라는 작품의 결말은 다소 긴장감이 떨어지고 갑작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 나약한 인간, 어리석은 인간이 인간성의 현실적인 바탕인 것처럼 보이던 때에, 재앙을 비껴날 수 있는 힘을 가장 원론적이라 할 수 있는 가족의 사랑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옥>은 작품의 처음에서 끝까지 가족의 사랑을 도처에 숨겨두고 있었다. 형사 진경훈과 그의 아들, 민혜진 변호사와 그의 아픈 어머니, 박정자와 그의 자녀들. 다만 가족의 사랑은 항상 인간의 어리석음과 나약함에 좌절되어 왔기에, 그 사랑이 아기의 생존이라는 성과를 얻어냈을 때 그 성공이 얼떨떨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연상호와 최규석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그것일지도 모른다. 나약하고 어리석어 수십 번의 실패하지만 어쩌다 발견한 한 번의 성공. 그 한 번의 성공 때문에 희망을 놓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인간성이라고. <지옥>이 보여준 서사의 규모에 비교하면 소박하다면 소박하고, 전형적이라면 전형적일 수도 있는 결말이겠지만, 그들이 보여준 작은 따스함이 조금은 기분 좋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