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 파괴의 유쾌한 상상력
- 무적핑크 <경운기를 탄 왕자님>
김소원 (만화연구가, 만화포럼 위원)
무적핑크의 작품 세계를 한 단어로 정의하라면 주저 없이 ‘상식 파괴’라고 대답하고 싶다. 모바일 메신저를 통해 서로 주고받는 대화, 그것도 조선시대 역사 속 인물들의 가상 대화만으로 작품을 이끌어가는 과감한 구성을 시도한 <조선왕조실톡>(2014, 네이버)은 ‘만화=그림+글’ 이라는 공식을 파괴했고 유명한 고전과 동화 그리고 영화를 사정없이 비틀고 패러디한 <실질객관동화>(2009, 네이버)와 <실질객관영화>(2013, 네이버)는 많은 걸작들이 가진 작품의 대표 이미지를 파괴했다. 기발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는 무적핑크의 작품은 그래서 항상 흥미롭고 유쾌하다. 그 중에서 <경운기를 탄 왕자님>은 네이버 웹툰 최연소 현역작가라는 타이틀로 화려한 데뷔를 치른 작가의 두 번째 웹툰이다.
‘백마 탄 왕자님’은 너무나 식상하지만 <경운기를 탄 왕자님>은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다. 이 웹툰은 강남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농사’이야기를 그린다. 경운기와 왕자님, 강남과 농사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무적핑크’라는 이름이라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과 허를 찌르는 반전은 이미 전작인 <실질객관동화>에서 아낌없이 드러난 터였다.
무적핑크 작가의 <경운기를 탄 왕자님>은 2013년 네이버에서 연재된 작품으로 강남-한강의 남쪽, 강남 3구의 어느 동네가 아닌 2호선 강남역 주변의 번화가-의 대로변에서 농사를 짓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작품 속의 대사처럼 이곳은 “촌스러운 ?? 죄”인 동네이며 옳고 그름과 좋고 나쁨을 초월한 대한민국의 수많은 모순을 상징하는 곳이기도 하다. 강남대로와 테헤란로가 교차하는 길모퉁이에 배추가 심어진 150평의 땅, ‘500억 원’의 가치가 있다는 강남땅 한복판에 배추를 심고 감자를 심는 이???기는 분명 허황되지만 기발한 유머 코드로 승화된다. ‘농사 웹툰’을 표방한 이 작품은 작가가 학교에서 ‘생활원예’수업을 수강하던 중 우연히 교내 부지에서 진행된 주말농장 ???로젝트에 참여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스토리는 간결하다. ‘라이프 타임즈’라는 잡지의 기자인 은아가 길을 가다 우연히 경운기를 몰며 강남대로를 유유히 지나가는 남자를 목격하고 그 남자의 인터뷰를 진행하게 된다. 강남의 금싸라기땅에서 농사를 ???고 직접 기른 농산물을 수확하는 것이 이야기의 큰 줄기이고 장편 연재 웹툰으로는 비교적 짧은 16화에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그러나 이 작품의 진짜 매력은 스토리 보다는 등장인물에 있다.
무적핑크의 <실질객관동화>, <실질객관영화>에서 최근의 <조선왕조실톡>까지 모든 작품들은 특정 주인공이 등장하지 않는 옴니버스 작품이다. 그녀의 작품 중 기승전결의 장편 스토리를 가진 웹툰은 현재로서는 <경운기를 탄 왕자님>이 유일하다. 따라서 이 웹툰은 무적핑크의 작품들 중 인물의 생각과 개성이 가장 강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며 ???물에 의해 스토리가 진행되는 유일한 작품이기도 하다. 그만큼 이들이 가진 의외성과 개성은 독자들에게 큰 웃음으로 작용한다. 아쉬운 부분은 이야기의 마지막까지 설명이 완전히 되지 않은 인물들이 있어 이야기가 미완으로 끝난 것 같은 느낌을 준다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는 작가의 매력과 장점이 긴 호흡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치밀한 스토리 구성이 아니라 일상에서 기발한 웃음 코드를 찾아내는 데에 있기에 충분히 타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독특한 개성과 의외성을 가졌다. 최은아는 초등학생 때 꿈이 부?? 남편을 만나 고급차를 타고 백화점 쇼핑을 즐기는 것 이었던 야무진 ‘된장소녀’였다. 어른이 된 지금도 남자를 만날 때는 그가 어떤 차를 타는지가 중요하고 소매 아래로 살짝 드러난 남자의 시계가 얼마짜리 명품인지 대번에 알아보는 비상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주인공은 땅투기로 부를 일군 아버지 덕에 강남 한복판에서 배추를 기르는 ??우 비능률적인 취미생활을 유유자적 즐기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가 손에 쥐어준 경제적 여유는 어머니와 자신의 소박한 행복인 따뜻한 가정과 맞바꾼 것이었다. 주머니를 돈으로 채운 아버지는 가정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어머니는 불행해 졌다. 부모님의 불화는 고스란히 주인공에게 돌아갔다. 주인공은 많은 드라마 속의 ‘왕자님’이 그러하듯 경제적인 풍요 속에서도 채울 수 없는 어떤 결핍감을 느끼고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어머니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늦둥이 배다른 동생이 있고 가정에 무관심했던 대가로 아내는 아들만 남겨두고 떠나버려 돌보아야 하는 어린이가 둘이나 있는 가장이기도하다. 친구가 추천했던 요리만화를 밤새 독파하고는 직업 요리사를 꿈꾸게 된 고3 여학생 민아는 전형적인 ‘강남 8학군’의 학생이지만 엄마 몰래 영어 학원 대신 조리 학원에 다니고 있다. 대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농사를 돕고 있는 신나나는 주인공이 농사일을 벌이는 결정적인 계기를 준 인물이지만 이마저도 단순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야기의 후반부에 잠시 등장하는 나나의 학교 선배로 대학원 석사과정에 재학중인 전형적인 초식남 천남성에 이르기까지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어딘지 불균형하지만 세속적이지 않은 뚜렷한 자신의 의지와 목표를 가진 인물들이다.
이 ‘웃긴’인물들은 별나지만 정직하고 진지하다. 이들은 돈 많은 남자보다는 자신의 일을, 돈 보다는 즐거움의 가치를, 목적을 상실한 대학입시 보다는 자신의 적성을 찾아낸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작품 전반에 흐르는 상식 파괴와 엉뚱한 상상력 위에서 기발한 유머를 만들고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역할을 한다. 독자들은 ???들이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이 꿈꾸지만 쉽사리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일들을 실천하는 모습에 잠시나마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특히 ‘대한민국 고3’ 민아는 공부를 병행하며 반창고투성이의 손으로 엄마 몰래 조리사 자격 시험에 합격한다. 독자들은 민아의 엉뚱하지만 용기 있는 선택과 정직한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성적순이 아닌 적성으로 자신의 진로를 선택하기란 강남땅에 배추를 심는 것만큼이나 무모한 행동인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매력은 엉뚱한 상황에서 쏟아지는 웃음이???만 ‘농사’라는 행위를 통해 전달되는 매우 소중한 메시지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감상 포인트이다. 인류가 생존을 위해 아주 오랫동안 해 왔던 농사는 기술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늘에 많은 것을 기대야 한다. 시간과 노력만큼의 대가가 주어지며 지름길이나 요행을 바라기는 힘들다. 그러한 면에서 농사는 참으로 정직하다. 작가는 농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잊고 살았던 삶과 인생의 가치에 대해 웃음을 섞어 잔잔하면서도 제법 단호한 메시지를 발신한다.
배추를 뽑으며 배추의 잔털에 찔려 손이 아프다는 은아에게 “배추도 까칠해야 자기 몸 지키죠”라고 하거나 농사일에는 “시간이 쫓아오”고 “게으름 피우면 농사 망치거든요”라는(2화) 주인공의 대답은 사뭇 철학적으로 들린다. 이 작품은 농사를 주제로 하지만 농사를 짓는 구체적인 방법이나 그에 대한 지식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작가는 농사 자체 보다는 농사를 짓는 행위에 집중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등장인물들이 저마다 얻는 가치와 깨달음을 독자들에게 전한다. 작가는 ‘농사’를 통해 서울의 도심 한복판이란 풀씨 하나 날아올 곳도 없는 삭막한 공간이지만 그와 동시에 깨진 돌 틈으로 고개를 내민 풀이 자라는 곳, 결국에는 사람도 풀도 뿌리 내리는 생활의 공간임을 이야기한다.
배추를 뽑으며 배추의 잔털에 찔려 손이 아프다는 은???에게 “배추도 까칠해야 자기 몸 지키죠”라고 하거나 농사일에는 “시간이 쫓아오”고 “게으름 피우면 농사 망치거든요”라는(2화) 주인공의 대답은 사뭇 철학적으로 들린다. 이 작품은 농사를 주제로 하지만 농사를 짓는 구체적인 방법이나 그에 대한 지식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작가는 농사 자체 보다는 농사를 짓는 행위에 집중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등장인??들이 저마다 얻는 가치와 깨달음을 독자들에게 전한다. 작가는 ‘농사’를 통해 서울의 도심 한복판이란 풀씨 하나 날아올 곳도 없는 삭막한 공간이지만 그와 동시에 깨진 돌 틈으로 고개를 내민 풀이 자라는 곳, 결국에는 사람도 풀도 뿌리 내리는 생활의 공간임을 이야기한다.
"겨울은 매년 올텐데, 그때마다 다 죽어버리면 세상에 남은 식물 하??? 없???요?” “모든 식물엔 살아갈 힘이 있어요.”, “살다보면 고3보다 힘들때도 있을텐데 10주도 못 견길거면 평생 하면 안된다고 생각해요.”(4화)와 같은 대사들은 작가가 독자들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고 메시지이다. 웃음의 사이에 등장하는 진지한 대사는 깊은 울림을 주지만 작가는 독자들에게 어설픈 감동을 강요하지 않는다. 얕지만 넓고 촘촘히 깔린 웃음 사이로 고개를 내민 메시지를 발견하는 재미가 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