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간을 초월하는 예술여행
- 다니구치 지로 <천년의 날개 백년의 꿈>
김소원 (만화연구가, 만화포럼 위원)
다니구치 지로(谷口ジロ?)의 만화는 문학적이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이들은 사진의 선 하나하나를 따라 그린 듯 섬세한 배경 속을 느릿하게 걷고 맛있는 음식을 천천히 음미하듯 먹는다. 주인공들의 이런 우아한 움직임은 일본 ‘망가’의 빠르고 현란한 문법과는 분명 다르다. 네모반듯한 칸 속의 정갈한 연출과 긴 텍스트로 표현된 그의 작품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 특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 프랑스의 만화전문 출판사인 퓌튀로폴리스사가 출간하고 있는 ‘루브르 박물관 만화시리즈’에 이름을 올린 일본 작가 두 명 중 한 명이 다니구치 지로인 것은 필연이다. 이 시리즈는 2016년 11월 현재까지 총 열 두 권이 출간되었고 한국에는 미술서적 전문 출판사인 열화당에서 열 번째 책까지 번역판을 내놨다. 다니구치 지로의 <천년의 날개 백년의 꿈>은 이 시리즈의 열 번째 책이다.
이 작품은 다니구치 지로가 그 동안 작품 속에서 꾸준히 그려온 ‘산책’과 ‘판타지’라는 두 가지 세계를 동시에 구현한다. <산책>, <우연한 산보>, <에도 산책>의 주인공들은 걷고 사색하며 풍경을 깊이 음미했다. <열네 살>에선 중년남자가 자신의 열네 살 어린 시절로 돌아갔고 <창공>에서는 교통사고로 주인공들의 영혼이 뒤바뀐다. <천년의 날개 백년의 꿈>에서 주인공은 산책을 하며 많은 예술가와 그들의 작품과 조우하고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에 있는 것과 같은 신비한 경험을 한다. 몇 년 전 여름 루브르에 갔을 때 책으로만 봐왔던 많은 조각과 그림들이 눈앞에 고스란히 펼쳐진 풍경은 마치 내 자신이 책 속에 들어 온 듯 비현실적이었다. 박물관을 둘러보는 내내 가시지 않았던 흥분은 다니구치 지로의 만화를 통해 다시 재생된다.
일본인인 주인공은 루브르 박물관에 갔다가 ‘루브르궁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여인을 만나 루브르와 관계된 다양한 시공간을 안내 받는다. 거기서 주인공은 고흐와 카미유 코로, 아사이 주(1856~1907, 일본의 서양화가)와, 하야시 후미코(1903~1951, 일본의 소설가) 등을 직접 만나고 대화를 나눈다. 1939년 독일 침공 직전의 루브르에서는 예술품을 지키기 위한 목숨을 건 작품 반출 현장을 목격하기도 한다. 작가의 상상을 통해 그려진 장면들이지만 루브르가 품고 있는 예술품을 만들고, 목격하고, 지켜낸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이 거대한 박물관에 살고 있는 작품 하나하나에는 참으로 많은 이들의 영혼이 스며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다니구치 지로는 특유의 느릿하고 시적인 언어와 연출로 예술이 가진 기적과 같은 순간과 그 존재 이유를 역설한다.
주인공은 ‘백년의 꿈’을 꾸듯 여러 겹의 시간에 존재했던 많은 인물들을 만나며 현실과 환상의 시공간을 오고간다. 마치 페이드인과 페이드아웃을 반복하듯 부드럽게 겹친 두 개의 시공간은 독자들을 위화감 없이 자연스럽게 작품 속으로 몰입시킨다. 넓은 홀 한쪽 벽에 걸린 작지만 거대한 그림 ‘모나리자’, 거대한 화폭의 크기로 사람들을 압도하는 들라크루아와 다비드의 작품들, 드농관 중앙 계단에 서 있는 ‘사모트라케의 니케’ 등 루브르를 대표하는 걸작들은 다니구치 지로 특유의 섬세하고도 사실적인 묘사로 박물관 가이드북 이상으로 생생하게 전달된다.
이 여행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의 참사로 잃은 아내를 만나는 것으로 끝난다. 주인공은 눈물을 흘리며 아내를 보듬어 안지만 아내의 환영은 곧 사라지고 만다. 예상치 못한 결말이다. 대자연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자각하는 참담함은 일본인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아픈 기억위에서 작가는 “살아서 여기에 있다는 것”, “아주 사소한 일, 조그마한 물건 하나에도 ‘삶’의 순간이 있으며 이야기가 있다”는 대사를 통해 인간의 삶 그 자체가 예술임을 말한다.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의 방법으로 전해져 온 작가의 강한 메시지가 가슴을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