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라 불린 남자의 뜨거운 이야기
- 미야자키 마사루 글, 요시모토 코지 그림 <블랙·잭 창작비화~테즈카 오사무의 작업실에서~>
김소원 (만화연구가, 만화포럼 위원)
매우 열정적으로 그리고 필사적으로 자신의 작품 세계를 구축했던 한 남자가 있다. 일생 동안 그린 만화가 600여 작품, 원고로는 약 15만장. 1946년에 데뷔해 1989년 위암으로 사망하기까지 작가로 활동한 기간은 40년 남짓. 데뷔 후 매일같이 약 9장의 원고를 완성한 사람. 만화의 ‘신’ 테즈카 오사무의 이야기이다. 한국에서도 <철완아톰>, <정글대제>, <리본의 기사>(<우주소년 아톰>, <밀림의 왕자 레오>, <사파이어 왕자>와 같은 번안제목이 더욱 친근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등의 TV 애니메이션이 방영되었으니 만화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 이름은 많은 이들에게 친숙할 것이다.

책의 뒤표지에 보면 재미있는 문구가 적혀 있다. ““신”의 열정에 부채질 당해 함께 달린 남자들의 기억.” 일본인들은 테즈카 오사무를 만화의 ‘신’이라고 부르는 데에 주저하지 않는다. 스토리 만화의 문법을 정착 시켰고 주 1회 방영이라는 당시로서는 불가능했던 스케줄로 TV 애니메이션을 제작했다. 지금 많은 이들이 즐기고 있는 일본 만화와 아니메를 이야기하다 보면 반드시 만나게 되는 것이 이 사람이다. <블랙·잭 창작비화>는 편집자, 어시스턴트, 문하생, 동료 만화가 등 테즈카 오사무 주변 인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블랙·잭>이 연재되던 무렵 테즈카 화실의 풍경을 그린 작품이다. 천재 만화가의 제작 현장을 들여다 볼 수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가볍게 펼쳐 들었지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만화 같은’ 이야기의 연속이다.
테즈카 오사무가 센디에이고 코믹콘에 참가하기 위해 미국으로 출장을 갔던 일화. 공항을 오가는 차 안과 비행기 안에서 원고를 그리는 정도는 애교이다. 미국 현지에서 인물 그리기를 끝낸 테즈카 오사무는 마감을 맞추기 위해 국제 전화로 사무실의 어시스턴트들에게 작품에 들어갈 배경 작업을 지시하는데 ‘어떤 작품 몇 권 몇 페이지에 있는 주택가’ 라거나 ‘가운데 책장 맨 밑의 어느 책의 몇 페이지에 있는 사진’이라는 식으로 배경에 쓰일 자료를 지정해준다. 놀라운 것은 <불새> 원고를 받기 위해 미국까지 쫓아가 호텔방에 함께 있었던 잡지 편집자의 증언이다. 당시 테즈카 오사무는 온전히 자신의 기억만으로 모든 배경 작업에 대한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텅 빈 테이블 앞에 앉아 자신의 작품과 자료집의 ‘몇 권 몇 페이지 몇 번째 칸에 있는 어떤 그림’을 마치 페이지를 넘겨보듯 막힘없이 이야기하는 장면은 웃고 넘기기에는 어딘지 무섭기까지 하다. 미국 일정 대부분을 호텔방에서 작품 그리는 데에 보내 버린 테즈카 오사무를 보며 요즘처럼 스마트폰으로도 간단히 이메일을 보낼 수 있고 사진과 동영상의 촬영과 전송도 손쉬운 시대였다면 그를 호텔방에서 잠시 해방 시켜줄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부질없는 상상도 해본다.
천재답게 테즈카 오사무의 생은 그리 길지 않았다. 60을 조금 넘긴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대신 수백편의 작품이 남았다. 자신의 재능을 치열하게 쏟아 부은 그는 병상에서도 원고를 그리고 있었다고 한다.
경영하고 있던 애니메이션 제작 회사의 도산과 거액의 빚, 예전만 못한 작품의 인기 등으로 테즈카 스스로가 ‘겨울’이라고 표현했던 몇 년의 부진을 씻어 내게 해 준 것이 바로 <블랙·잭>이었다. 이 작품의 성공으로 예전의 인기를 회복했던 만큼 <블랙·잭 창작비화>라는 타이틀은 절묘하다.
중간 중간 관계자들의 인터뷰 장면을 챙겨 넣은 것을 보면 작품 속의 거짓말 같은 이야기가 실화임을 강조하고 싶었던 작가의 고민이 눈에 보인다. 일본에서 ‘이만화가 대단해 2012’ 1위를 차지한 작품인 만큼 작품성과 재미 모두 좋은 평가를 받았다. 단,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것은 만화가를 꿈꾼다면 이 작품을 읽고 부디 ‘이 정도는 되어야 만화가’라고 생각하고 미리 좌절하지는 말아주길. 그는 만화의 신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