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序-
2015년 한국 프로야구에서 가장 큰 화제가 되고 있는 팀은, 대전을 연고지로 둔 ‘한화 이글스’다. 1986년에 ‘빙그레 이글스’로 창단하여 1993년에 현재의 이름으로 팀명을 바꿨고 1999년에 코리안 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던 한화 이글스는, KBO리그 10팀 중에서 ‘영구결번’(장종훈, 송진우, 정민철)을 가장 많이 보유한 명문 팀이며, 지금은 메이저리그에 진출해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좌완 투수 류현진의 전(前)소속 팀이기도 하고, 메이저리그에서 124승을 거둔 ‘한국인 최초 메이저리거’인 박찬호의 고향 팀이자 마지막 팀이기도 하다. 그러나 2009년부터 ‘내리막길’을 타기 시작, 6년간 8-8-6-8-9-9위라는 매우 초라한 성적을 기록하며 길고 긴 암흑기에 접어들었다. 특히 2013년에는 ‘개막 후 최다 연패’(13연패)와 ‘KBO 최초 9위 팀’이라는 치욕적인 기록까지 더해지면서, 야구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꼴찌’라는 이미지가 각인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성적으로 응원하는 한화 팬들에게 네티즌들은 ‘부처’라는 슬픈 별명까지 붙여주었다.
그러나 2014년 정규시즌이 끝나자 야구팬들에게 ‘야신(野神)’으로 추앙받는 김성근 감독을 영입하고, 마무리캠프부터 김성근 감독의 트레이드마크인 ‘지옥훈련’을 시작하면서 모든 언론의 주목을 받는 ‘의도하지 않은 인기 팀’으로 변신, 단박에 야구계의 화제로 떠오르게 된다. 스토브리그 기간에는 타 스포츠에 비해 상대적으로 기사거리가 별로 없는 프로야구의 특성상 ‘김성근의 한화 이글스’는 매우 이례적인 주목을 받은 셈인데, 수많은 보도진들이 매일매일 ‘지옥훈련’의 실상을 매우 친절하게 디테일한 기사로 송고하면서, 기존의 한화 팬들은 물론이고 2015년 개막을 기다리는 야구팬들의 기대는 점점 더 높아졌다.
2015년 프로야구가 개막하자 전문가들을 비롯한 수많은 야구팬들의 궁금증은 오직 하나였다. ‘과연 한화 이글스는 다시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인가?’ 결론은 ‘예스(yes)’였다. 어느덧 8월도 다 가고, 팀당 총 144경기를 치르는 정규시즌이 이제 30경기 정도밖에 남지 않은 현재(2015.08.25), 한화 이글스는 5위 기아 타이거즈와 1.5게임차 뒤진 6위에 머물고 있다. 10개 팀이 경합하는 올 시즌부터 5위 팀에게 포스트시즌 진출 기회인 ‘와일드카드’가 주어지는 점을 감안한다면, 지난 6년간의 성적에 비추어볼 때 그야말로 일취월장한 성적표다. 8월에 7연패에 빠지며 6위로 내려앉긴 했지만, 시즌 내내 5할 승률을 유지하며 ‘최다 역전승 기록’까지 덤으로 얻어온 한화 이글스는, 주축 선수들의 부상과 결장, 용병 선수들의 교체, 선수 혹사 논란 등의 수많은 악재에 시달리면서도, 매 경기 접전을 통해 드라마틱한 명승부를 펼쳐내면서, 야구팬들에게 마약(痲藥)같은 야구를 선사하는 ‘마리한화’라는, 재미있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 이제 야구팬들에게 올 시즌 마지막 남은 궁금증은 ‘과연 한화 이글스가 포스트시즌에 진출할 수 있을 것인가?’이다. 이렇게 시즌 내내 모든 이의 주목을 한 몸에 받은 야구팀이 30년이 넘은 한국 프로야구의 역사 속에서 과연 있었는가 싶다.
도대체 왜, ‘한화 이글스’에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바로 한화 이글스에 ‘드라마’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암흑기에 빠진 팀-야신(野神)의 영입-지옥훈련-꼴찌들의 변신-강적출현-포기하지 않는 선수들-끈기 있는 접전-드라마틱한 승리’라는 큰 줄거리 속에 강적들과 라이벌의 출현, 음해와 시기를 일삼는 세력들, 불미스러운 사건(최진행 약물파동), 주축선수들의 부상(정근우, 김태균, 김경언, 이용규), 트레이드의 성공(이종환, 이성열), 투혼(鬪魂)을 발휘하는 선수(권혁), 역경을 극복한 선수(위암투병 후 완치판정을 받고 복귀한 정현석), 노장(老將)들의 활약(박정진, 조인성), 사연이 있는 신인의 등장(신성현, 송주호), 시즌 막판에 갑자기 나타난 수호신(守護神) 같은 용병(에스밀 로저스) 등의 디테일한 요소까지, 마치 ‘잘 만들어진 야구만화’에나 나올 법한 드라마틱한 경기와 비하인드 스토리를 시즌 내내 팬들에게 ‘실제로’ 보여주기 때문인 것이다.
원래 스포츠를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하지 않는가. 위 문단에서 짚은 ‘한화 이글스의 큰 줄거리’를 보면, 참으로 다양한 야구 만화가 떠오른다. 기존의 경쟁구도에서 소외(疏外)된 각자의 사연을 가진 선수들이 ‘지옥훈련’을 통해 변신, 승리를 쟁취하는 ‘루저(looser)들의 신화(神話)’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 77권이라는 엄청난 권수를 자랑하는, 에이스를 꿈꾸는 소년의 메이저리그 도전기 <메이저>, 프로야구의 ‘뒷세계’를 흥미진진하게 그려낸 <원 아웃>, 그리고 요즘 필자가 푹 빠져 있는(비록 프로야구가 아닌 고교야구지만) <다이아몬드 에이스> 등등, ‘야구’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한 명작만화들은 정말 많다. 이 리뷰에선 이 중에 하나를 골라 독자들에게 자세히 소개하고자 하는데, 필자가 고른 작품은 바로 테라지마 유지가 그린 열혈고교야구 만화, <다이아몬드 에이스>다.
-本-
1. 작품개요
<다이아몬드 에이스>(ダイヤのA)는 테라지마 유지가 그린 야구만화이다. <주간 소년 매거진>에서 2006년 제24호부터 2015년 7호까지 ‘주인공들의 세이도 고교 야구부 신입부원 시기(1학년)’를 그린 1부가 연재되었으며, 2015년 38호부터 2부(2학년 편) 연재가 시작되었다.
원래 고교야구를 소재로 다루는 일본의 스포츠만화는, ‘약체 학교’가 강호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 드라마틱한 내용(다르게 말하면 비현실적인 내용)이 많지만, <다이아몬드 에이스>는 지방의 무명(無名) 중학교 투수였던 주인공 사와무라 에이쥰이 ‘도쿄 지역의 야구 강호’인 명문 세이도 고등학교 야구부에 스카우트되어 ??입부원으로 성장해가는, ‘일종의 야구 유학기’를 다루는 독특한 소재와 고교시절에 야구부였던 작가의 경험담을 기초로 창작된, 리얼한 스토리 전개로 연재 초기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다.
2014년 일본 만화판매순위에서 468만 1031부를 기록하며 7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고, 단행본 발행 누계부수가 2,000만부를 넘어서면서, ‘국민인기작’의 대열에 들어섰다. 단행본은 현재(2015.08.) 일본에서는 47권까지, 한국어판으로는 43권까지 출간되었다.
2013년 10월 6일부터 ‘TV도쿄’ 계열에서 TV애니메이션으로 방영(총 75화)되었으며, 2015년 4월부터 “다이아몬드 A-세컨드시즌(ダイヤのA-SECOND SEASON)”이란 타이틀로 2부가 방영되고 있다.(한국은 ‘애니플러스’ 채널에서 방영)
2007년에는 제53회 쇼카쿠칸 만화상 소년부문을, 2010년에는 제34회 코단샤 만화상 소년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강담사 소년 매거진 연재작품 중에서 소학관 만화상을 수상한 작품은 <다이아몬드 에이스>가 최초이다.)
2. 작품 내용
중학야구 전국대회를 노리고 있던 아카기 중학교의 ‘열혈투수’ 사와무라 에이쥰은 예선 시합에서 자신의 폭투로 인해 패하고 만다. 자신들이 졸업하면 다른 중학교와 통합하면서 폐교가 되어 버리는 모교의 이름을, ‘전국대회 출장학교’라는 형태로 영원히 남기고 싶어서 부원들과 불철주야 노력했던 에이쥰이었지만, 지방의 약소 야구부에게 ‘전국대회’의 벽은 너무 높았던 것이다. 그러던 와중 지방의 숨겨진 인재를 발굴하기 위해 지방예선을 돌며 유망주를 찾고 있던 명문 세이도 고교 야구부의 부부장 타카시마 레이는, 에이쥰의 집을 방문해 도쿄로의 스카우트를 갑작스럽게 제안한다.
에이쥰이 견학차 방문한 ‘야구 명문’ 세이도 고교의 야구부는 그 규모와 설비부터 압도적이었다. 1·2그라운드에 우천연습장, 기숙사까지 갖춘 ‘야구 엘리트’를 위한 최고의 연습 공간부터 부원의 과반수가 전국의 학교에서 스카우트된 유망주로 이루어진, 말 그대로 ‘갑자원’을 진심으로 노리는 ‘강호’였던 것이다.
세이도 고교의 ‘돈으로 바른 듯한’ 압도적인 규모와 설비, 그리고 ‘야구 유학생’이라는 단어에 강한 거부감을 느낀 에이쥰은 졸업을 앞둔 3학년의 강타자, 고교통산 42홈런을 자랑하는 아즈마를 일부러 자극하고, 그가 제시한 ‘승부’를 받아들여 마운드에 오른다. 아즈마를 도발하는 에이쥰의 모습을 보고 흥미를 느낀 ‘1학년 천재 포수’ 미유키는 자신이 공을 받겠다고 자원하고, 에이쥰을 스카우트한 레이는 미유키에게 재미있는 공을 던지는 아이라며 그의 능력을 한계치까지 끌어내보라고 주문한다. 드디어 마운드에 오른 에이쥰. 그러나 큰소리를 친 마음과는 달리 에이쥰의 온몸은 긴장해서 뻣뻣하게 굳어 있었고, 그것을 눈치 챈 포수 미유키는 특유의 재능으로 에이쥰을 설득해 그의 장점을 살린 ‘탁월한 리드’로 아즈마를 제압한다. 에이쥰이 미유키의 미트에 던진 공의 개수는 총 11구, 그러나 시골의 야구부에서 친구들과 ‘재미’로만 하던 야구의 ‘참맛’을 알기에는 충분한 투구 수였다.
‘미유키의 미트를 향해 다시 한 번 공을 던지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세이도 교교에 입학한 에이쥰, 그러나 ‘엘리트 야구부’의 훈련은 상상 이상으로 가혹했다. 에이쥰은 처음 하는 기숙사 생활부터 기초를 다지는 트레이닝까지 모든 것이 낯설고 힘들었지만, 특유의 낙천성과 성실함으로 하나하나 극복해나가기 시작한다.
3. 작품 분석
야구는 9명이 한 팀으로 공격과 수비를 번갈아가며 9번 교대하는 규칙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스포츠’다. 축구나 농구 같이 시간 제한이 있지 않으며, 개인경기인 동시에 단체경기이기도 한, 무척 재미있는 특성을 지닌 스포츠이기도 하다. 야구에서 점수를 내는 기본적인 규칙은 ‘홈(HOME)’이라 불리는 타석에서 상대편 투수가 던지는 공을 타자가 방망이로 쳐 안타를 만들거나, 볼넷·사구 등의 방법으로 1루로 출루한 후, 다음 타자의 공격 때 2루, 3루를 거쳐 최종적으로 홈으로 돌아오면 1점이 나는, 매우 복잡한 룰을 지니고 있다. 공격 기회는 회당 3번, 3명의 타자가 아웃(OUT)되면 공수교대가 된다. 이 기본적인 규칙 외에도 경기장 바깥으로 공을 날려버려서 점수를 내는 ‘홈런(HOME RUN)’, 투수의 공을 라인 바깥으로 날려서 플레이를 ‘무효화’시키는 ‘파울(FOUL)’ 등등 다양한 규칙들이 세세하게 존재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야구란, 홈-1루-2루-3루를 잇는 마름모꼴의 라인을 주자가 한 바퀴 돌면 점수가 나는 것으로, 예로부터 야구의 본질을 상징하는 그라운드의 모양이 바로 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다이아몬드인 것이다. ‘에이스’는 그 팀에서 가장 잘 던지는 투수이자 가장 믿을 수 있는 투수를 뜻하며, 통상 고교야구에서는 백넘버 1번을 달고 있는 선수가 그 팀의 에이스라고 보면 큰 무리가 없다. 즉 작품??? 제목인 <다이아몬드 에이스>란, 도쿄의 야구 명문교에 들어간 지방출신 주인공 사와???라 에이쥰이 팀의 ‘에이스’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의 ‘야구 유학기’인 것이다.
야구 만화로서 <다이아몬드 에이스>의 특징을 몇 가지 소개하자면, 첫 번째로 ‘기존 고교야구만화의 장르적 공식’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파괴 및 전복’시킨다는 데 있다. 주인공이 몸담은 세이도 고교는 전국에서 재능 있는 유망주들을 끌어 모아 막대한 자본과 고급 전문 인력을 투입, 철저하게 훈련시켜 갑자원의 정상을 노리는, 전통의 강호로 불리는 명문야구부를 가진 사립 고등학교다.
어느 전문가의 말을 빌리면, 세계에서 야구를 ‘프로 스포츠’로 즐기는 나라 중에서 고교야구의 수준이 가장 높은 나라가 일본이라고 한다. 사실 일본의 고교야구는 말이 좋아 학생 스포츠지, 그 실상은 프로야구 ??비군을 길러내는 일종의 인프라이자 전문인력 양성소로 변한 지 꽤 오래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이런 분위기로 변한 현재의 고교야구를 비판하는 세력도 꽤 있다고 하는데, 어찌됐든 5,000개가 넘는 고교야구 팀이 치열한 예선을 거쳐 단 49개 학교만이 본선에 오르는 ‘갑자원’(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 대회에 출전함으로써 학교의 인지도를 높이려는 교육계의 장삿속과 양질의 신인자원을 안정적으로 수급하려는 ‘프로야구계’의 목적이 일치되어 지금과 같은 ‘엘리트 야구’가 정착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일본의 야구만화, 특히 ‘고교야구’와 ‘갑자원’을 소재로 한 만화에서는 세이도 고교 같은 엘리트 강호 학교는 주인공이 반드시 넘어서야 할 ‘벽’이나 타도해야 할 ‘악의 세력’처럼 그려지곤 하는데, 주인공의 앞을 막아서는 ‘강적’ 또는 ‘악역’의 역할인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아마도 이는 “약자가 단합, 노력하여 강자를 쓰러트리는 행위”에서 유발되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또는 대리만족)를 독자들이 느낄 수 있도록 장치한 ‘소년만화의 장??적 공식’에서 기인한 것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약자가 강자를 이기는)은 현실에선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책상 위에서 경쟁하는 시험공부도 아니고, 타고난 힘과 재능이 일반인들과는 아예 차원이 다른, 선수들이 경쟁하고 있는 스포츠계에서는 더더욱 힘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위의 장르적 공식이 많은 이들에게 환영받는 것이고, 만화를 통해서라도 위안 받고 싶은 많은 이들의 바람이 담겨 있는 설정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다이아몬드 에이스>는 주인공을 아예 엘리트 강호 학교로 설정해서 가혹한 경쟁 체제 안으로 밀어 넣어 버린다. 그리고 초반부터 독자에게 진지하게 묻는다. “그 누구보다도 더 야구를 잘하고 싶다! 그런 일념만으로 겨우 15살 소년이 부모 곁을 떠나, 보다 혹독한 환경에서 자기 능력을 갈고 닦는다. 그런 각오와 향상심을 가진 선수들을 진심으로 존경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라고 말이다.
물론 대다수의 장르적 공식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반감이 일어날 만한 설정이다. 그래서 작가는 영리한 수를 한 가지 착??해낸다. 작가인 테라지마 유지는 실제로 고교야구 선수였다고 하는데, 자신의 고교야구선수로서의 경험을 최대한 살려내고, 치밀한 취재와 인터뷰를 통해, 야구 엘리트 고교의 실제 생활을 아주 디테일하게 묘사하는 것이다. 그들은 어떤 식으로 훈련하고 어떤 모습으로 생활하고 있는가? 그들은 정녕 어른들의 욕망에 희생당하는 ‘갑자원’에 가기 위한 부속품일 뿐이고, 승부에 이기기 위해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는 영악한 고교생인가? 이러한 모든 의문들을 한방에 날려버릴 정도로, 디테일한 묘사와 사실적인 내러티브가 <다이아몬드 에이스>에서는 매 화, 매 지면마다 펼쳐진다.
사실 <다이아몬드 에이스>에서는 소년 만화의 주인공으로서 아주 적절하고 모범적인 캐릭터, 주인공의 라이벌, 동료의식 넘치는 조연 캐릭터들, 대회 예선마다 등장하는 새로운 강적들 등등 ‘기존의 장르공식’에 등장하는 모든 성공요소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주인공만 ‘약체 고교’에서 ‘강호 엘리트 고교’로 ??꾸었을 뿐, 나머지 내러티브의 방식은 이미 성공이 입증된 ‘장르의 공식’을 충실하게 재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독자들은 기존의 재미와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고교야구만화에 또 하나의 색다른 재미(엘리트 고교의 리얼한 생활상)가 얹혀진 <다이아몬드 에이스>에 열광하기 시작했고, 이렇게 작가와 소년 매거진 편집부의 ‘새로운 시도’는 성공한다.
두 번째의 특징은 마치 실제 야구 경기를 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고 박진감 넘치게 그려진 경기장면이다. 아마 이런 훌륭한 결과물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작가의 ‘선수경험’도 상당부분 작용했을 것이고, 일본 만화산업계의 집약된 기술력과 노하우도 한몫 했을 것이다. 작가인 테라지마 유지의 안정적인 작화력과 연출력도 매우 큰 성공 요인이다.(스포츠 만화의 전설 <슬램덩크>조차도 연재 초반엔 작화와 연출이 많이 어설펐는데, <다이아몬드 에이스>는 1권부터 정련된 프로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훌륭한 작화와 연출을 선보인다.)
야구 경기의 매 회, 매 순간을 마치 프레임으로 쪼개듯 세밀하게 장면을 구성하는 방식이라든가, 어떤 때는 과감하게 생략하여 여운을 주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한 회의 짧은 승부를 한 권 넘게 길게 그릴 때도 있다. 무엇보다도 ‘경기의 흐름’을 독자들이 쉽게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한, 친절한 해설과 강조된 연출이 돋보인다. <다이아몬드 에이스>에 등장하는 야구시합 중에서 ‘의미가 없는 시합’은 한 경기도 없을 정도로, 매 경기마다 느껴지는 생생함과 쫄깃함은 정말 근래에 본 야구만화 중 최고였다고 생각한다.
세 번째의 특징은 ‘이야기의 흐름에 맞춰 아주 잘 배분된 웰메이드(Well-made) 캐릭터’다. 세이도 고교 야구부는 전국 각지에서 유망주들을 끌어 모아 가혹한 스파르타식 훈련을 실시하고, 엄격한 내부 경쟁을 통해 엘리트들을 또다시 솎아냄으로서, 시합에 나갈 ‘선발멤버’를 선별하는, 대단히 무섭고 잔인한 곳이다. 100명이 넘는 전체 야구부에서 1군에 뽑히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를 매우 디테일하게 묘사하면서, 세이도 고교 야구부라는 엘리트 강??? 학교가 얼마나 힘든 노력과 치열한 내부 경쟁을 조직의 구성원에게 유발하는 곳인지, 독자가 직접적으로 체감할 수 있도록 작품의 내러티브를 구성하고 있다.
<다이아몬드 에이스>에서는 이 선별의 과정을 아주 디테일하게 묘사하면서, ‘팀원’이 아닌 ‘개인’의 입장에서 각각의 캐릭터들을 세심하게 조명한다. 사실 감동의 엔딩이라는 목표지점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는 장편극화라는 장르에서, 주인공을 비롯한 몇몇 중심인물들을 제외한 나머지 캐릭터에 지나치게 많은 디테일을 부여하는 것은, 자칫 스토리의 산만함을 불러와 작품 전체의 방향성을 망가뜨릴 위험이 크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장편극화란 ‘결론’이라는 꼭짓점을 향해 쉼 없이 산을 오르는 등산과도 같은 것이다. 정상을 목전에 두고 아래나 옆을 돌아볼 여유 따윈 사실 등반에서 필요가 없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작가인 테라지마 유지는 ‘위’가 아닌 ‘옆’(또는 ‘아래’)을 보는 방식을 선택한다. 그는 아주 세심하고 자상한 시선으로, 선발경쟁에서 밀려난 부원들이나 시합에 진 상?? 선수, 선수들을 뒷받침하는 프론트(감독 및 코칭 스텝, 트레이너 등등)의 노고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사연을 만들어주고 그들만의 개성을 부여해주려 노력한다. 결과적으로 볼 때, 작가의 이와 같은 ‘여유로운 방식’은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작가의 세심한 배려는 등장인물들에 대한 독자들의 감정이입을 극대화시켰고, 그 결과 <다이아몬드 에이스>에서는 주연, 조연을 가리지 않고 등장하는 캐릭터 모두가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생명력과 힘차고 역동적인 생동감을 얻게 된 것이다.
앞서 설명한대로 <다이아몬드 에이스>에서는 그간 악역으로 등장해왔던 야구 엘리트들이 주역으로 등장한다는 색다른 재미가 있다. 이들의 가장 큰 적은 어쩌면, 상대 팀의 선수들보다도 자기 자신과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쓰는 동료일 수 있다. 세이도 야구부에는 1군과 2군뿐??? 아니라 기초 훈련만 하는 3군도 있다. 100명도 넘는 야구부원들 중에서 경기에 나가 벤치에 앉을 수 있는 주전선수는 단 20명뿐이다. 소속에 따라 사용하는 그라운드도 다르고, 팀 내에서의 위치와 책임도 확연히 다르다. 하나의 팀 안에 존재하는 동료들 사이의 명확한 차이, 그래서 이들의 목표는 오직 하나, ‘주전 선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주전선수들은 자기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더욱 더 혹독하게 노력한다. 같은 팀의 내부에 존재하는 이 무서운 경쟁구도는, 읽는 이로 하여금 독특한 긴장감과 진한 안타까움을 유발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 가혹한 경쟁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살아남은 이들이든 밀려난 이들이든 그들은 밖에 나가면 모두 세이도 야구부라는 ‘하나의 팀’이다. 그래서 한때의 라이벌(심하게 얘기하면 ‘내부의 적’이었던)이었던 모든 동료가 상대 팀과의 시합에 나가게 되면 하나로 똘똘 뭉쳐 ‘단단한 팀워크와 엄청난 기세’를 만들어낸다. <다이아몬드 에이스>의 시합장면이 마치 전투와 같은 긴장감을 조성하며, 읽는 이로 하여금 간절히 세이도가 승리하길 기도하는 ???유가 여기에 있다. 야구라는 스포츠의 본질을 명확히 꿰뚫고, 본질이라는 뼈대 사이사이에 존재하는 각각의 근육과 지방을 디테일하게 묘사하는 것, 그것이 읽는 이 모두가 세이도 야구부의 팬이 되게 만드는, 작품의 뜨거운 혈액인 것이다.
기존의 다른 야구 만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이런 야구 명문고의 일상을 자연스럽고 재미있게 다룸으로써 <다이아몬드 에이스>는 아주 기발하고 독특한 재미를 독자에게 선사한다. 아주 좋은 재능을 타고 났으나 써먹는 방법을 몰라 아직 발현되지 못한 투수, 구위와 제구 모두 뛰어나지만 체력이 받쳐주지 못하는 투수, 불의의 사고로 부상을 당해 경쟁에서 밀려난 천재 포수, 탁월한 센스를 타고난 자신만만한 포수, 자의식 과잉의 발 빠른 야수, 주전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형제, 선천적인 재능을 따라가진 못하지만 묵묵히 노력하는 것으로 차이를 메우려는 동기, 후배에게 밀려났지만 언젠가 찾아올 기회를 위해 열심히 단련하는 선배 등등 세이도 야구부를 벗어나 상대 팀까지 그 저변을 넓히면, 팬들이 따로 ‘인물 도감’을 만들 정도로 <다이아몬드 에???스>에는 정말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이렇게 세심하게 구현된 ‘???메이드 캐릭터’들이 승리를 향해 온몸을 내던져 격돌하는 바로 그 ‘승부의 순간’에 독자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재미와 감동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독자들은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 순간을 위해 얼마나 땀을 흘렸고, 어떻게 눈물을 닦았으며, 얼마만큼의 노력을 해왔는지를 말이다. 승리를 얻기 위해 그들이 보낸 ‘두껍고 무거운 고통의 시간’을 독자에게 아주 세세하고 자상하게 보여줌으로써 <다이아몬드 에이스>는 ‘승패’라는 결과여부에 상관없이 마침내 목표한 ‘정상’에 다다르는 것이다. 감동을 유발하는 드라마의 본질이란 본래 그런 것이다.
-末-
2015년 5월 12일 대구구장, 한화 이글스와 삼성 라이온스의 ‘팀 간 3차전’이 열렸다.
3-4로 뒤진 삼성 라이온스의 8회 말 공격, ??드하고 있던 한화는 ‘필승조’를 가동했고, 수순에 따라 박정진에 이어 권혁이 마운드에 올랐다. 2002년 삼성 라이온스에 입단해서 바로 작년까지 뛰었던 친정팀과의 경기, 승부의 갈림길에서 그가 등판했다.
그가 팀을 옮긴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팔꿈치 수술 이후의 구속 저하, 팀 내에서의 입지는 점점 좁아졌고 당연히 등판 기회는 점점 줄어들었다. 팀에서의 보직도 승리를 지키기 위해 투입되는 ‘필승조’에서, 흔히들 팬들이 ‘패전처리’라고 부르는 ‘추격조’로 바뀌었다. 어느 날, 어린 딸이 물었다. “아빠는 왜 맨날 잠깐 나왔다 들어가?” 아빠의 직업이 ‘중간계투’라는 걸 모르는 어린 딸의 순진한 질문이었지만, 그의 마음은 그때 무척 아팠나 보다. 그래서 그는 ‘더 많이, 더 오래 던지기 위해’ 새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정들었던 대구를 떠났다.
첫 타자는 바로 작년까지 그의 공을 받아준 삼성 라이온스의 주전포수 진갑용이었다. 8회 말 1점 차, 팀은 살얼음 리드를 지키고 있었다. 권혁은 풀카운트 승부 끝에 진갑용을 유격수 땅볼로 유도하며 아웃카운트 하나를 잡아냈다. 다음 타자는 대타 김상수, 권혁은 3구 삼진으로 김상수를 돌려세웠다. 세 번째 타자는 나바로, 치열한 볼카운트 싸움 속에 결국 6구째 볼넷으로 내보냈다. 다음으로 등장한 타자는 삼성 라이온스의 떠오르는 신성(新星) 구자욱. 초구는 볼, 2구째 구자욱의 배트가 힘차게 돌아갔다. 공은 우측 펜스까지 굴러갔고 1루 주자 나바로는 폭풍처럼 내달려 홈으로 들어왔다. 4-4 동점이 되는 순간, 연이은 연투로 등판 때부터 많이 지쳐보였던 그는, 고개를 숙였다.
시간은 벌써 오후 10시를 지나고 있었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졌다. 한화는 9회 초 다시 승리의 기회를 잡았다. 선두타자 대타 이종환이 볼넷으로 출루에 성공했고, 다음 타자 강경학이 외야 좌중간을 가르는 적시 3루타를 터트렸다. 5-4, 다시 역전.
한화의 9회 말 마지막 수비, 그가 다시 마운드에 올랐다. 상대 타순은 최형우-박석민-이승엽, 이름만으로도 상대 팀을 긴장시키는 존재감 넘치는 타순이었다. 비가 거세졌다.
그는 선두타자 최형우를 2루 땅볼로 잡아냈다. 원아웃. 다음 타자 박석민에게는 볼넷을 허용했다. 비로 인해 엉망이 된 마운드의 상태는 그의 자세를 계속 무너트리며 피칭을 방해했다. 결국 이승엽 타석 때에는 마운드 흙에 발이 미끄러지면서 보크 판정까지 받았다.
그러나 한화 벤치는 움직이지 않았다. 다음 투수의 준비가 안 끝난 것인지, 아니면 그를 신뢰해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진흙 때문에 발조차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던 마운드 위에서의 그는, 참 외로워 보였다. 저러다 부상이라도 당하면 어쩌나, 지켜보는 팬의 입장에서 마음이 답답하고 무척이나 안타까웠다. 잠시 후 어느 정도 숨을 고르고 나서, 다시 한 번 눈앞의 타자에 집중하려 포수의 미트로 시선을 돌린 그의 온몸에서 희뿌연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비 때문인지, 그의 몸이 너무 뜨거워서였는지 몰라도, 그 모습은 마치 만화???서나 등장할 법한 ‘수호신의 아우라’ 같았다.
다음 순간 그는, 이승엽을 투수 땅볼로 유도했고, 이 과정에서 2루 주자 박석민을 2루와 3루 사이에서 협살로 아웃시켰다. 투아웃,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타자 박찬도를 좌???수 플라이 아웃으로 처리하며 쓰리아웃, 천금 같은 팀의 승리를 지켜냈다. 투구 수는 43개였다.
그는 경기가 끝난 이후 많이 지쳤는지, 한동안 무릎에 손을 갖다 대고서 몸을 숙이고 있었다. 비는 계속해서 그의 온몸을 적셨다. 그의 숙여진 넓은 등 위로 여전히 희뿌연 수증기가 강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의 지친 모습을 보면서 난 <슬램덩크>의 정대만을 떠올렸다. 지쳐 쓰러지기 일보직전에도 3점 슛을 계속 꽂아 넣는 ‘불꽃남자’, “농구가 정말 하고 싶어요.”라고 말하며, 안 선생님 앞에 울면서 무릎 꿇었던 뜨거운 남자.
근데, 그의 그런 모습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다음 날 포털사이트의 스포츠 섹션은 그의 이름으로 온통 도배되어 있었다. “불꽃남자”, “우리는 권혁이라 쓰고 투혼이라 읽는다.”, “이글스의 정대만”, “난 ???코 쓰러지지 않는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언가를 가끔 가만히 집중해 보고 있으면, 현실과 픽션은 닮은 구석이 참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픽션’이라는 창작행위 자체가 현실에 기반을 두고 이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각본 없는 드라마’라는 스포츠와 ‘각본에 의해 만들어진 드라마’인 만화는 ‘현실과 허구’라는 본질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누군가가 온힘을 다해 격돌하는, 치열한 ‘승부의 순간’에는, 의도치 않게 자연스러운 감동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에 반드시 동반되는 ‘긴장감 넘치는 재미’는, 아주 고마운 덤이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다이아몬드 에이스>를 추천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