赤淚 (적루)
『이것이 일본만화다』에서 프레드릭 L. 쇼트는 “일본만화를 처음 접하는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접시 모양의 눈, 바싹 마른 다리, 그리고 금발인 듯한 머리카락을 보며, 왜 이렇게 많은 ‘백인’이 일본만화에 등장하는지 궁금해한다”고 전한다. 이러한 의문은 일본만화로부터 ...
2004-05-18
노수인
『이것이 일본만화다』에서 프레드릭 L. 쇼트는 “일본만화를 처음 접하는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접시 모양의 눈, 바싹 마른 다리, 그리고 금발인 듯한 머리카락을 보며, 왜 이렇게 많은 ‘백인’이 일본만화에 등장하는지 궁금해한다”고 전한다. 이러한 의문은 일본만화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한국만화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특히 초기 순정만화는 서구역사물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순정만화가 ‘서구 콤플렉스’를 조장한다는 비난도 심심찮게 쏟아졌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역사물에서 현대물에 이르기까지 순정만화의 무대가 한국 혹은 동양으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김대원의 작품세계는 특히 주목할 만하다. 그가 1998년 발표한 단편집 『답신』은 순정만화에서는 드물게 동양적이면서 고전적인 세계를 담고 있다. 그림은 물론이고 내용이나 말투에서도 동양적인 멋을 자아내려고 노력한 것이 인상적이다. 이후로도 그의 작품에서 풍기는 은은한 향취를 그리워하던 차에, 『적루(赤淚)』(글 강주현)를 만날 수 있었다. 고대 중국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 이 작품은, 각 화마다 주인공과 사건은 다르지만, 일관되게 ‘운명적인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 『적루』의 전개방식은 이어달리기를 연상시킨다. 1화에 나왔던 조연이 2화의 주인공이 되고, 다시 2화의 조연이 3화에서 주인공이 되는 식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1화 『은수 이야기』에서는 세심하게 그려낸 옛 여인네의 머리장식과 나부끼는 천 자락 등이 동양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며, 볼모가 된 황녀, 바꿔치기, 원수와의 사랑 등 흥미진진한 요소가 가득하다. 마지막에서 함께 떨어져 죽는 연인의 모습은 가슴속에 싸한 슬픔을 남긴다. 2화 『윤 이야기』는 ‘남장 여자’라는 소재를 동원해 ‘동성애’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서로 사랑하는 주인공들이 유일하게 결실을 맺는다. 3화 『정 이야기』는 서로 어긋나는 ‘짝사랑’을 다루고 있다. 정작 원하던 상대와 인연을 맺지는 못하지만, 어부지리로 얻은 사랑의 미래가 밝을 것을 암시하며 끝난다. 이전 이야기들에 비해 다소 밝아진 분위기가 마치 에필로그 같은 느낌을 준다. ‘한국적인’ 혹은 ‘동양적인’ 만화란 과연 무엇일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이 김대원의 작품이라고 주장하고 싶진 않다. 한국인이 그린 것이라면, 비록 그것이 서구 역사물이나 SF, 팬터지라고 할지라도, 한국적인 혹은 동양적인 감수성과 사고가 배어 나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능하면 다양한 작품을 음미할 수 있기를 바랐고, 그런 의미에서 김대원이라는 작가의 등장이 반가울 따름이다. 그는 최근 격주간지 「케이크」에서 『소녀행』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그다운 풍취가 유감없이 발휘될 것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