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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케묵었지만 반 고흐, 예술가로 산다는 것

AI 시대, 평범한 만화가, 예술가로 삶에 대한 이야기

2024-05-16 최윤주

| ‘또 AI 이야기야?’

이 글을 열어본 사람이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AI(인공지능) 이야기를 하지 않기가 어려울 것 같다. 이번에 내가 요청받은 것은 ‘자본의 착취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 무한경쟁이 된 시장 속에서 작가의 삶을 유지하는 방법’이라는 주제인데, 지금 창작자들에게 가장 의식되는 경쟁 상대가 인공지능이기 때문이다. 멀리 갈 것 없이 여기 디지털만화규장각부터가 그 이야기로 소란스럽다. 인공지능의 개념과 동향을 설명하는 글부터 인공지능을 활용해 혹은 대항해 살아남는 법을 다룬 글, 인공지능이 가져올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를 상상한 글까지. 인공지능을 둘러싸고 많은 글이 게재되었다. 지면이 아닌 대면으로 창작자들을 만날 때도 다들 걱정의 말들을 꺼냈던 것을 생각하면, 방금 언급한 다양한 톤과 각도의 글들에서 불안감만큼은 공통적으로 읽히는 것이 착각은 아닌 듯하다.

놀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인공지능 문제에서 예술만큼은 마지막 보루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술은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인간다운 “인간만의 것”이니까, 인간이 아닌 AI는 넘보기 힘들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알파고에게 바둑의 승기를 넘겨준 이후로 절대 질 리 없는 성역이 존재한다는 믿음은 깨졌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이렇게 빠를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 내가 ‘사람들’이나 ‘했던 것 같다’, ‘것이다’ 같은 말들로 인공지능에 관한 착각을 교묘하게 3인칭으로 서술한 것을 눈치챘을지 모르겠다. 내 생각은 조금 달랐기 때문이다. 다들 모르는 것을 나는 알았다고 우쭐대려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이렇게 될 것 같았다. 반 고흐의 그림체가 AI로 흉내 가능한 것이 되었다는 2015년의 기사에서, 그때 이미 예술가의 대체 가능성에 대한 질문이 던져졌다고 생각한다. 지금 상황이 새로운 질문을 마주한 것이 아니라 진작 넘겨받은 질문의 선명도가 올라간 것뿐이라 느껴지는 이유다.


[ 그림 1, 해당 기사문에서 발췌. 놀라운 인공지능의 붓질…당신이 고흐·피카소 명화로, 전자신문, 2015년 11월 28일 ]


| AI와 반 고흐, 예술가의 대체 가능성

AI가 반 고흐를 대신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고흐가 보여준 독창성과 탁월함에 근거해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인공지능이 고흐의 그림체를 흉내 낼 수 있는 것은 고흐가 일궈낸 고유의 그림체가 선행했기 때문이며, AI는 학습한 빅데이터에 기반해 흉내를 내는 것일 뿐 그것을 창작이라 하기는 어렵다는 것이었다. 완성도 면에서도 고흐의 실제 그림과 비교해서는 한참 부족하다는 평가였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창작은 원래 학습이란 이름의 모방에서 출발하는 법이다. 독창적인 그림체로 유명한 ‘그’ 고흐도 다른 화가들을 흠모하고 흉내 내며 자기 그림을 만들어나갔다. 고흐가 밀레의 그림을 모사해 남긴 <씨 뿌리는 사람>은 그 숱한 흉내의 증거 중 하나다. 더불어 고흐는 언제고 자기 그림의 완성도를 아쉽게 생각했다. 그 아쉬움을 메우기 위해 그는 그리고 또 그렸다. 예술보다는 기술에 더 어울릴 것 같은 반복적인 훈련을 누구보다도 지독하게 해냈던 이 역시 고흐였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말하는 독창적인 그림체라는 것이 기존의 것을 모방하고 모방하다 드물게 발생하는 성공한 연금술 같은 것이라면, 그런 일이 AI에게도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을까. 탁월함 역시 마찬가지다. 무언가 반복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탁월함이라면, 탁월함이야말로 곧 추월당할 것이거나 이미 추월당한 것이나 다름없다. 2015년 이후 지금까지 AI들은 잠도 자지 않고 학습해왔으니 탁월함을 기준으로 그들을 보며 열패감을 느끼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 되었다.

인공지능에 대항하기 위해 그것이 할 수 없는 일을 부단히 찾아내려는 노력들 앞에서 힘이 빠지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나는 인공지능과 예술에 관한 이야기가 너무 가능과 불능에 관한 논의로만 치우치지는 않았으면 한다. 매번 ‘할 수 있다’와 ‘없다’로 끝나는 문장들이 옅게나마 남아 있을, 혹은 늦기 전에 발명해야 할 희망을 이야기하기에 도무지 충분치 못하다고 느껴서다. 오늘은 맞았으나 내일은 틀린 말이 될 만큼 변화의 속도와 방향이 종잡을 수 없는 탓도 있겠으나, 가능형으로 말할 때만큼 예술가의 존재가 작고 무력해지는 때도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만약 반 고흐의 독창성과 탁월함이 AI에게 진다면, 그것으로 인류가 예술을 할 명분은 사라지고 마는 것일까? 반대로 반 고흐의 독창성과 탁월함이 AI를 이긴다면, 그것이 과연 다른 창작자들이 창작을 지속할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결국 이렇게도 이어질 수 있다. 반 고흐만큼 독창적이고 탁월하지 못한 이는 예술가로 살 수 없는 것인가. 우리가 예술을 할 자격이 그런 식으로 비교급이나 최상급을 통과해야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일까.


| 평범한 예술가로 산다는 것

자신을 대체할 수 있는 뛰어난 사람들은 도처에 널려 있다. 나는 이게 아니면 안 되는데, 내가 아니어도 상관없는 일터와의 불균형이 그렇지 않아도 힘든 일을 한층 더 불안하게 만든다. 언제든 대체될 수 있다는 불안. 오늘은 해냈지만 내일은 해낼 수 없을지도 모를 이유가 안으로나 밖으로나 이렇게나 많다.

한 창작자의 AI로 인한 고통을 기록한 수기, 라고 해도 믿을 위의 인용구는 내가 이곳 디지털만화규장각에 썼던 2021년의 글이다. “언제든 대체될 수 있다는 불안”과 “오늘은 해냈지만 내일은 해낼 수 없을지도 모를 이유”는 AI와 무관하게 쓰인 구절들이다. AI와는 무관하게 당시의 내가 만화평론을 쓰며 견뎌야 했던 마음의 부침들이며, 여전히 매일같이 나를 괴롭히는 일상이기도 하다.

그저 독창성과 탁월함만이 예술의 기준이 된다면, 사실은 AI 이전에 반 고흐야말로 나를 무력하게 하는 존재다. 압도적으로 독창적이고 탁월한 솜씨와 굴곡 많았던 한 편의 영화 같은 삶, 그리고 그의 그림과 삶에 사람들이 품는 경외와 애정 앞에서 나는 종종 내 글과 삶이 한없이 작아짐을 느낀다. 예술을 흠모하는 마음은 눈물이 날 만큼 순정한데, 반 고흐 앞에서는 그런 순정한 마음마저 부끄러워지고 만다. 나의 진심이 고작 이런 최선에 담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 쉽지 않다. 나도 안다. 내가 한없이 평범한 예술가라는 사실을. 어느 날엔 재능과 노력이, 어느 날엔 돈이, 어느 날엔 운이 없어 그만둬야 할 것 같다. 그런데도 나는 저 글을 이렇게 마무리 지었다. “앞으로도 어디로 가게 될지 모르고 언제까지 갈 수 있을지도 몰라 가끔은 펜을 쥔 손이 버겁고 가슴이 죄어오기도 한다.” 그렇지만 “아직은 펜을 놓지 못할 것 같다.” 지금도 여전히 같은 마음이다.

가망 없어 보이는 예술 앞에서 가능성을 초과하는 욕심에 어쩔 도리가 없을 때, 역설적이게도 나는 반 고흐의 편지를 찾아 읽는다. 고흐의 탁월함이나 특별함이 아니라 그가 예술을 위해 분투했던 시간과 그 시간 안에 담긴 마음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다. 그렇게 들여다볼 때, 고흐는 적이 아니라 예술할 용기를 주는 존재가 되어준다.

선교사로 살다 뒤늦게 화가가 된 고흐는 화가로 살았던 10년 동안 동생과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그 편지에 예술하던 고흐의 마음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다. 사실 많은 이들이 알고 있듯 고흐는 평생 예술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화가였고 그러한 현실에 스스로도 무척이나 괴로워했다. 그래서 동생과 주고받은 10년간의 편지는 점점 더 채도가 낮아진다. 초기의 편지에는 그림을 막 시작한 사람으로서 가졌던 기대와 의욕이 눈에 띈다.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주는 환희가 활자를 뚫고 선명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화가로서 산 10년간 879점의 그림을 남긴 고흐가 생전 판매한 그림은 단 한 점이었다. 육체는 늙고 머물던 사람은 자꾸 떠나가며 삶의 가능성과 기쁨이 수축하는 와중에 모든 것을 걸었던 예술가로서의 삶마저 어두워갔으니 마음이 구겨지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생을 마감한 해에조차, 그는 그림을 그리는 일에 대해 말한다. 아직 그리지 못한 그림과 그리고 싶은 그림을 향한 마음이 어두워가는 삶 속에서 완전히 꺼지지 않고 명멸한다. 그가 그린 사이프러스 나무와 별이 빛나는 밤하늘에서, 붓질과 색감을 통해서 그가 도달하고 싶었던 그림, 그러나 도달하지 못해 생긴 틈새를 읽는다. 빈자리에 맺힌 그의 의욕과 기대, 조급함과 아쉬움, 절망과 미련, 고독, 기쁨을 읽어본다. 그 독해의 과정에서 예술하는 마음의 무게 중심이 결과가 아니라 과정으로 조금씩 이동한다. 예술이라는 행위를 지속하는 동안 느끼는 기쁨과 슬픔만큼은 온전히 나의 몫이라는 사실이 더없이 반갑게 다가온다. 그 기쁨과 슬픔만큼은 양도될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잠시나마 안전하게 지켜주는 듯하다.


| 밤에 빛나는 별을

만화가들의 말을 읽는 것 역시 내게는 반 고흐를 읽을 때와 같은 울림의 용기를 준다. 천계영 작가는 만화가로 사는 일을 무척이나 사랑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일만큼은 너무 힘들어 3D 작업 방식을 익혀나갔다. 그림을 그리지 않으며 만화를 하게 된 지금이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랑또 작가 역시 그림 그리는 일을 몹시 귀찮아한다. 하지만 만화를 너무도 사랑해서 만화를 그리는 일에서 가장 싫어하는 과정조차 다른 일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아한다고 말했다. 바쁜 연재 도중에도 매주 서로 다른 컨셉으로 캐릭터 일러스트를 그려내던 그를 보면 만화를 사랑하기로 맹세했다는 말이 조금의 장난도 섞이지 않은 진담이라는 것이 실감된다.

반 고흐의 편지에는 유독 ‘싶었다’거나 ‘하겠다’로 끝나는 말들이 많다. 만화는 너무 좋은데 그림이 괴로워 십수 년에 걸쳐 그림 그리지 않는 연재법을 익힌 작가와 만화를 너무 사랑해서 가장 싫은 그림조차 좋아할 수밖에 없는 작가의 말들에도 의욕과 결심의 말들이 그렇게나 많다. 말들이 가리키는 방향은 분명하다. 예술하고 싶어하는 마음. 결국 예술을 예술답게, 그리고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그 ‘마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30년 전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가 남긴 실감이 점점 더 선명해지는 것을 보면, AI에게 언제까지 마음이 없을지도 모를 일인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이 글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AI에게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이었다. ‘할 수 있다’와 ‘없다’는 말로만 가득 찬 편지보다는 ‘싶었다’와 ‘하겠다’는 말이 쓰인 편지를 오래도록 읽고 싶은 것처럼, AI가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말하는 대신에 인간이기에 가지고 있는 것,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일자리가 소멸되고 전쟁 위기가 거론되는 와중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안일하게 들릴 수 있단 것을 안다. 마음이 전부가 될 수는 없음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예술을 하며 겪는 기쁨과 슬픔, 각별함과 절실함을 외면하면 우리가 예술을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 수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무한경쟁 시대, 자본의 침투에 대항해 작가로 생존하는 일에 대해 칼럼을 써달라는 청탁을 주셨을 때 담당자님이 기대한 것은 이렇게 물기 가득한 글이 아니었을 것 같다. 명령어와 상관없이 자기 멋대로 쓰는 고집과 열기가 가끔은 글을 쓰는 나 자신도 부담스럽다. 그래도 AI가 아닌 인간이기에, 명령보단 충동과 무지를 따르기로 했다. 위기는 보통의 사람들을 주어로 서술하면서 돌파구는 자꾸 최상급으로 쓰이는 것이 서글퍼 평범한 예술가들을 위한 글을 남기고 싶었다. 이런 제 멋대로인 필자 따위 AI에게 대체될지도 모르지만, 얼마 안 남은 글이라 생각하니 더욱 타협 없이 쓰고 싶었다. 인간의 마음이란 게 그렇다.

깜깜하고 혼란스러운 밤이 계속되는 와중에, 도무지 앞을 보고는 갈 수가 없어 이 유약한 마음을 등불 삼아 걷는다. 밤에 빛나는 별은 거기 있다고 믿으면서. 너무 멀지 않은 곳에서 빛나고 있을 다른 마음들이 꺼지지 않고 함께 이 밤을 비췄으면 좋겠다.




(1) 파토, 인공지능은 만화가의 꿈을 꾸는가, 디지털만화규장각, 2021년 6월 25일, https://www.kmas.or.kr/webzine/column/28275.
(2) 놀라운 인공지능의 붓질…당신이 고흐·피카소 명화로, 전자신문, 2015년 11월 28일, https://n.news.naver.com/article/030/0002419669?sid=105.
(3) 최윤주, 고막이 찢어져도 계속되는 마음 : <우리는 갈대>, 디지털만화규장각, 2021년 9월 29일, https://www.kmas.or.kr/webzine/column/28466.
(4) 만화가 천계영, “정말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 수 있을까요?” - 『드레스 코드』, 채널예스, 2012년 8월 21일, https://ch.yes24.com/Article/View/20435.
(5) 작가의 블로그 글에서 2017년 9월 7일과 같은 해 9월 29일 글을 재구성한 것이다. https://m.blog.naver.com/PostList.naver?blogId=narrace.
5) 빈센트 반 고흐, 『반 고흐, 영혼의 편지』, 예담,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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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주

만화평론가
2021 대한민국 만화평론공모전 대상
2019 만화평론공모전 신인부문 대상, 2020 만화평론공모전 기성부문 가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