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서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파리까지 13시간 비행, 그리고 프랑스 앙굴렘까지 고속버스로 가는 내내 비가 온다. 비가 서울에서 앙굴렘까지 따라오고 있었다. 프랑스는 겨울이 우기라고 한다. 비 오는 거리의 곳곳에 만화행사장의 하얀 임시천막 17개가 마치 도시의 요트처럼 곳곳에 떠있다.
오래 전 종이공장이 있던 마을에 그림 그리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그들이 그린 그림으로 마을잔치 같은 전시회를 열자 이웃마을에서 그리고 인근 도시에서 찾아와 지금은 세계 곳곳에서 참가하는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Angouleme FIBD - festival international de bande dessinee)로 발전한 것이라고 한다. 벌써 31살이라니…

한국만화부스

행사장에 입장하기 위해 줄을 선 관람객들
전형적인 유럽건물 곳곳에 만화그림을 그려놓아 마치 도시전체가 동화나라에 온 듯한 느낌을 준다. 과연 앙굴렘은 만화도시스럽다.
이번에 우리가 참가한 부스는 대형 만화 판매장으로 이곳엔 수많은 세계만화(대게는 유럽만화)들을 전시판매하며 만화를 산 독자에게 작가가 직접 그림을 그려주고 사인을 해주기 때문에 각 출판사의 판매대마다 많은 독자들이 소풍 온 아이들처럼 들떠서 몇 시간씩 기다린다.

그도 그럴 것이 유럽만화가들이 사인하는 스타일이 우리와는 달라서 책의 속표지에 뎃생을하고 펜으로 입힌 후 컬러까지 칠해준다. 그러니 한사람에게 사인하는 시간이 10분 이상 걸리는 게 보통이고 젊은이는 물론 나이 지긋한 중년부인이나 주부들도 기다리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표정을 짓는다.
이처럼 다양한 계층의 독자들은 1년을 기다려 각종만화를 사고 자기가 좋아하는 작가와 대화도 하고 작가의 원화를 콜렉션 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로 삼는단다.
만화 그림이 그려진 자동차
우리 한국 만화가들도 이곳에 6개의 부스를 마련하여 3개는 프랑스 시베데 출판사에서 프랑스어로 출판된 한국만화를 구매한 독자들에게 사인을 해주었다.
나머지 3개의 부스에서는 번역되지 않은 한국만화를 가지고 참가한(행복한 만화가게, 황매, 명상, 초록배매직스, 새만화책) 작가들도 글씨와 내용도 모르는 한국만화를 구매한 유럽독자들에게 한국만화를 소개하며 열정을 다해 사인을 했다.
현지의 어느 만화부스나 만화가들 못지 않게 우리작가 부스도 대성황이었다. 특히 황매출판사의 모해규 작가는 출판만화와 약간의 움직임을 가미한 cd만화부록으로 많은 독자와 현지출판인들의 관심을 모았다.
어찌 보면 참으로 무모한 도전이었고 참가였다.
번역되지도 않은 한국만화를 영어와 프랑스어로 번역된 팜플렛 한 장씩을 만들어 일일이 나눠주며 한국만화, 작가, 정서에 대해 설명을 한다는 작업이 말이다.
이 자리를 빌어 만화애니메이션센터 김종식 팀장, 이승원씨 그리고 통역?자원봉사를 해준 유학생들에게 감동과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그래도 이런 노력과 열정 덕분에 한국만화는 인텔리전트하고 스타일리쉬하다는 평가를 받지 않았는가. 한번 보고 던지는 일본만화에 비해 한국만화는 보면서 생각하는 여유를 주는 것 같다는 비교 평가를 받기도 했다.
여기서 일본만화를 폄하할 생각은 없다. 분명 우수한 일본만화들도 대거 현지에서 출판된 상태다. 하지만 그들은 일부 일본만화가 갖고있는 작품성과 예술성보다는 가볍게 보고 던지는 만화라는 인식을 먼저하고 있는 듯 하다. 어쩌면 여기에서 우리 한국만화가 유럽만화 시장을 공략할 수 있는 한가지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앙굴렘 시내 풍경
겉으로 보면 수십 년 수백 년 전 그대로의 모습이지만 유럽만화의 중심 앙굴렘은 변하고 있었다.
‘틴틴’ ‘아스테릭스’ ‘토갈’ 등 그들의 만화영웅 외에 새로운 무엇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유럽의 젊은 혹은 어린 독자들은 일본만화를 받아들이고 어른들은 대안만화라는 이름의 실험만화(소재와 그림체, 연출이 파격적인 우리의 언더만화 스타일)를 수용하려고 하고 있다.
이런 과도기적인 틈새를 우리 한국만화의 새로운 장르인 에세이 만화, 전자 만화, 인터넷 만화 등이 진출한다면 대안만화와 또 다른 한 축을 차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일본만화도 유럽에 10년의 공을 들여 오늘의 자리를 구축했단다. 우리 한국만화가 앙굴렘의 문을 두드린지 이제 4년차.
이번 참가를 통해 아직은 빗속의 풍경처럼 흐릿하지만 한국만화가 앉아야할 빈 의자를 보았다. 무모하게 팜플렛 한 장 달랑 들고 시작하는 발걸음이지만 서점마다 알록달록 자리할 한국만화의 내일을 본다.
유럽시장은 우리가 흠모하고 짝사랑한 먼 님이 아니라 우리가 안아주고 포옹해야할 연인이다. 그 옛날 징기스칸이 유럽에 아시아의 모래바람을 일으켰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만화를 타고 유럽에 황색바람을 일으켜보자. 나부터 말에 오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