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니라
0. <파묘>

<파묘> 속 이도현과 김고은
출처:쇼박스
‘오컬트 장르에서의 스타일리시함’이라는 주제를 받았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콘텐츠는 영화 <파묘>의 트레일러 영상이었다. 영화 본편이 아닌 예고편 말이다. 김고은과 이도현은 무당 역할인데, ‘무당이 왜 르메르와 파프를 입고 있지?’라는 의문은 실제 영화를 보고 나서 ‘아, 그래서’라는 생각으로 일축됐다. <파묘>에 등장하는 르메르, 파프, 마샬, 컨버스, 아크테릭스 등의 브랜드들은 영화를 덜 고리타분하게 만드는 장치였다.
르메르와 파프를 입은 무당들이 역사적 소명을 위해 일본을 (말 그대로) ‘<파묘>’하는 영화를 약 1,200만 명이 관람했다는 사실은 한국 오컬트 장르의 문법을 어느 정도 짐작하게 한다. ‘르메르’, ‘파프’, ‘역사적 소명’, ‘<파묘>’는 어떻게 엮어도 한 문장 안에 동시에 담기 어려워 보이지만, 이 단어들의 나열이 오히려 영화를 잘 소개한다는 사실은, <파묘>가 무당을 ‘세련된 전문직’으로 표현하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각종 브랜드는 다소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수 있는 후반부 서사의 구심점인 무당들의 역사적 소명을 ‘MZ’하게 희석해 주는 동시에 그들의 ‘전문성’을 강조하는 역할을 했다.
물론 <파묘>에서 이화림과 윤봉길은 귀신이 아니라 무당이고, 귀신은 영적인 존재라기보다 <디 워>나 <킹콩>처럼 물리적으로 요격해야 이길 수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파묘>를 다루는 것이 원고 주제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굳이 <파묘>를 언급한 까닭은, ‘스타일리시’한 존재가 귀신이든 무당이든 상관없이, 최근 오컬트 장르에서 ‘스타일리시함’은 전문성을 상징하고 있음이 <파묘>를 통해 극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0.5. 스타일
잠시 변명을 하자면, 나의 아주 고질적인 문제는 어떤 주제에 대한 원고를 의뢰받으면 그 주제가 무엇인지부터 먼저 쓰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사실 변명이 아니라 예고였다. 지금부터 ‘스타일’이 무엇인지 간략하게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아래는 ‘스타일’에 대한 서로 다른(것처럼 보이는) 정의이다.
a) 스타일은 직업적 정체성, 젠더 및 인종 표현과 결부된 ‘주체의 입장’이다. 다시 말해서 스타일이란 “타인이 제공하는 라벨과 고정관념에 종속되는 과정뿐 아니라, 스스로 라벨을 붙이는 과정”의 산물이다.1
b) 스타일은 자신들이 인지하고 있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자유롭게 실천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문화적 산물이며, 자신이 선호하는 문화적 양식에 대한 표현이다.
아마 아무도 자신의 스타일이 ‘주체의 입장’이거나 ‘종속되는 과정’의 산물이라는 a의 설명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 b는 자신의 스타일이 선호의 표현이라는, ‘취향’과 ‘브랜딩’이라는 시대정신에 발맞춘 정의처럼 보인다. 문제는 a와 b가 상호 배타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자신이 선호하는 문화적 양식’과 ‘타인이 제공하는 라벨’은 분리될 수 없고, ‘자신들이 인지하고 있는 자신의 정체성’은 ‘고정관념’과 상호 참조적인 관계를 맺으며 형성되기 때문이다. a와 b의 차이는 기실 내용이 아니라, 우리가 느끼는 기분의 차이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화려함과 유려함을 특징으로 갖는 스타일리시함은 언제나 계급적 격차인 동시에, 바로 그런 이유에서 ‘개인적인 선호’의 반영이기도 하다.
1. <내일>

네이버웹툰 <내일>
출처: 네이버웹툰
네이버 웹툰 <내일>은 ‘스타일리시함’을 <파묘>와 동일한 방식으로 활용한다. 주인공인 저승사자 ‘구련’과 ‘임륭구’가 입고 있는 명품은 그들을 귀신이 아닌 인간처럼 친숙한 존재로 만들면서도 계급적 위계를 드러낸다. 그들의 ‘스타일리시함’은 이들이 오랫동안 능력을 인정받은 고위 공직자임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들이 인정받은 ‘능력’은 무엇인가? <내일>과 <파묘>가 공명하는 지점은, 스타일리시함을 통해 오컬트적 존재들의 ‘정의 구현’이 전문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점이다. 이들은 알 수 없고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방식으로만 정의를 구현할 수 있다는 전제 아래에서 움직인다. 그리고 그들의 정의 구현에 대한 신뢰도는 그들의 전문성, 즉 ‘스타일리시함’을 통해 확보된다.
나는 지금 정의 구현 서사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것이 아니다. 정확히는 ‘스타일리시함’을 활용하는 방식에 대한 불만이다. 대부분의 장르에서 ‘스타일리시함’은 세련미를 통해 주인공의 적수나 조력자가 주인에게 ‘자발적으로’ 굴복하게 만드는 장치이다. 복종이 자발적일 때 효과가 극대화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스타일리쉬함’이 모든 장르에서 계급 격차를 보여주거나 독자에게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 때 활용되는 것은 당연할 수도 있다. 문제는 ‘복종’ 이후이다. 스타일리시함이 타인이 제공한 라벨과 고정관념에 종속된 결과임을 피할 수 없다면,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활용하는 대신 타인이 제공한 라벨과 고정관념을 지우는 방식으로 활용하는 작품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오컬트 장르에서 ‘스타일리시함’이 ‘화려함’과 동의어가 되지 않는, 그런 작품은 없을까? 그래서 나는 오컬트 장르의 다른 ‘스타일리시함’을 찾아보고자 했다. 아주 상투적인 주제인 ‘사랑’에서 말이다.
2. 다시, 그리고 새로운 오컬트
사실 오컬트는 무엇보다 ‘믿음’에 관한 장르다. 이때 믿음은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믿음이라기보다는,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이 자신에게 어떤 변화를 일으킨다는 ‘믿음’에 더 가깝다. 재미없는 철학자 중 가장 재미있는 철학자라 불리는 흄이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에서 말했듯, 미신은 불확실성에서 비롯된 불안감이 가속되어 형성된 신념 체계다. 흄이 보기에 미신은 인간의 불안감을 자극해 정신을 나약하게 만드는 잘못된 믿음에 불과했다. 그가 미신의 처방책으로 ‘인간 정신 능력의 향상’을 제시하는 것은 진부한 결론일지 모르지만, 미신의 근원으로 ‘불안감’을 제시한 것은 탁월한 통찰이다. 모든 믿음의 근원에는 불안감이 도사리고 있고, 그것이 곧 오컬트 장르의 토대이다.
그렇다면 범위를 좀 더 넓혀 ‘장르’ 자체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믿음’과 ‘장르’는 모두 종국에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하게 만든다는 공통점이 있다. 믿음은 믿음이 실현될 것이라는 기대로, 장르는 장르적 문법을 통해 예측되는 결말로 자신을 재구성한다. 그렇다면 오컬트 장르에 관한 글에서 ‘믿음’과 ‘소망’에 대해 설명이 필요한 이유를 이해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오컬트 장르의 새로운 ‘스타일리시함’을 사랑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사실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은 본성상 ‘사랑 빼면 시체’니까. 이 사실은 문학동네 김해인 만화 편집자가 이미 설명해 두었다.
“사랑을 빼봐. 그리고 진짜 죽는지 아닌지 니 두 눈으로 지켜봐봐.”2
3. <횡단보도에서 수호천사를 만나 사랑에 빠진 이야기>

<횡단보도에서 수호천사를 만나 사랑에 빠진 이야기>
출처: 교보문고
<횡단보도에서 수호천사를 만나 사랑에 빠진 이야기>(이하 <횡단보도>)는 이희주 작가의 오컬트 단편 소설이다. 만화 규장각 웹진에서 이 소설을 소개하는 까닭은 작가의 소설이 지극히 만화적인 스타일을 견지하기 때문이다. 이희주 작가의 대부분 소설, 특히 <횡단보도>는 ‘만화적’이다. 이때 ‘만화적’이란 비현실적이거나 과장되었다기보다, ‘낭만적’이라는 의미다. 올곧은 정신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선택을 기꺼이 하는 ‘청춘만화’ 주인공들처럼 낭만적이다. 우정 대신 사랑이 들어간다는 점만 다르다. 이희주 작가가 자신을 ‘오타쿠’로 소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이희주는 사랑을 빼면 정말 죽는지 확인하는 작가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희주의 소설을 읽으며 ‘믿습니다, 아멘..’을 중얼거린다. 나는 이 소설이 내 마음을 흐물거리고 끈적한 액체로 만들어 통제력을 잃게 하는 일련의 실제적인 과정들을 믿는다. 흄은 나를 저급한 정신 능력의 소유자로 결론 내리겠지만 말이다.
<횡단보도>는 주인공 ‘나루세’가 말 그대로 횡단보도에서 수호천사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대지진 이후 ‘그것’들을 보게 된 나루세가 횡단보도에서 사고로 인해 ‘수호천사’, 즉 죽은 사람의 욕망을 먹는 ‘시체 청소부’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나루세가 ‘그것’들을 본다는 사실은 오직 누나인 아오이만이 믿고 있었고, 이것은 소설이 나루세가 아오이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구성된 이유이기도 하다.
“다르다는 건 벌을 받는 것과 같은 일”이라는 소설 속 대사와 아오이가 ‘누나’라는 점으로부터, 이 소설의 오컬트 설정이 퀴어와 타자에 대한 은유라는 해석이 곧바로 나올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해석을 진부하고 시시하게 만들 만큼 소설이 그려내는 압도적인 사랑이 궁금했다. 수호천사를 녹이고 싶다는 마음으로 했던 나루세의 키스, 달걀을 담아주던 사람에게 얼굴을 붉혔던 아오이, 사랑하는 사람의 목구멍에 사랑을 들이붓는 모습, 그리고 그렇게 사랑을 들이붓는 사람은 얼마나 자신을 게워내고 있을지가 궁금했다.
누군가는 그들의 사랑이 뭐가 그리 대단하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독자인 나는 그런 물음을 떠올릴 새도 없이 그들의 사랑에 납작 엎드리고 말았다. 이는 이 소설이 가진 특유의 스타일 때문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피와 내장을 핥아 먹는 시체 청소부이자 자신의 첫사랑이, 결국 자신마저 삼켜주길 바라는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마음에 압도되지 않을 수 있을까? <횡단보도>가 오컬트 장르인 이유는 기실 욕망 찌꺼기를 먹어치우는 수호천사나 괴이들 때문이 아니라 나루세의 마음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이 소설의 ‘스타일리시함’ 역시 수호천사나 괴이들 때문이 아니라 나루세와 수호천사의 사랑 때문에 생겨난 것일 수 있다.
4. to be continued

<오후의 광선> 아직 상반기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아주 유력한 올해의 만화 후보다
출처: 교보문고
오컬트 장르의 스타일리시함에 대한 에세이를 쓰면서 <횡단보도>로 글을 끝내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지만, 이 글이 주제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오컬트 장르뿐만 아니라 만화를 포함한 각종 콘텐츠에서 ‘스타일리시함’이 화려함과 세련됨, 전문성의 상징이 되는 경향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타일리시함은 작품이나 주인공을 전문적으로 보이게 할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기이함과 이상함을 완전히 배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컬트 장르는 전통적으로 ‘기이함’을 원천으로 삼지 않는가? 우리가 일상에서 배제했던 이상하고 기이한 마음들이 저 멀리서 우리에게 뚜벅뚜벅 걸어올 때 느끼는 ‘불안감’이 오컬트 장르의 핵심 요소가 아니었던가?
그런 의미에서 시체의 욕망을 먹는 수호천사와 나루세의 사랑에서 느껴지는 기이한 아름다움과 불안한 매혹은 오컬트 만화의 ‘기이함’을 복원할 수 있는 새로운 스타일을 보여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횡단보도>의 스타일을 공유하는 만화들을 짧게나마 소개하고자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내장을 ‘닭고기’ 주무르듯 주무르는 <히카루가 죽은 여름>과 페티시 자체가 오컬트적인 주인공이 등장하는 <오후의 광선>이 바로 그 작품들이다. 언젠가 이 만화들을 소개할 기회가 있기를 소망한다.
1 <패션 스타일리스트> 24p 엮: 아네 륑에요를렌, 옮: 이상미, 워크룸 프레스
2 <김해인의 만화 절경> 슬퍼할 줄 아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출처 : 채널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