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 통사 20년 : 스크롤이 탄생시킨 신(新)문학의 영토
1939년, 시인이자 평론가로 활동했던 임화는 《조선일보》에 「개설 신문학사(槪說 新文學史)」를 연재한다. ‘역사’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였지만, 사실 신문학사의 대상이 되는 시간은 겨우 30여 년 남짓이었다. 역사를 논하기에 턱없이 성급했을 그 시간을 그가 ‘문학사’라는 틀에 묶어낸 이유는 단지 시간이 쌓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서구 문학의 이식이자 모방이라는 혐의 속에서도 조선의 문학이 자기 고유의 계보와 정체성을 증명해야 한다는 절박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1896)의 창간 이후 잡지와 신문 등 인쇄 매체의 확산은 ‘독자’층을 만들어 냈고, 서구 문학 형식의 수용과 함께 작가, 작품, 비평 등을 아우르는 새로운 문학 체계가 자리 잡으며 ‘문단(文壇)’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조선의 문학은 근대 매체가 열어놓은 가능성을 통해 신문학이라는 하나의 역사적 대상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그리고 100여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우리는 또 다른 매체 전환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인쇄 매체가 신문학이라는 새로운 문학의 장을 열었다면, 디지털 매체는 스크린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서사와 향유 방식을 만들어 냈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웹툰이다. 2000년대 전후로 시작된 웹툰은 어느덧 20년이 넘는 시간을 축적하며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서사 형식으로 자리매김했다. 초창기 웹툰의 시발점을 <스노우캣>과 <마린블루스> 가운데 어디로 볼 것인가에 대한 물음은 미뤄두고, 최초의 웹툰 플랫폼인 다음(Daum)의 《만화속세상》이 2003년에 문을 연 이후 웹툰의 대중적 유통의 역사만 해도 벌써 23년이라는 시간이 쌓였다. 그러나 임화가 30년의 시간을 바탕으로 신문학사를 서술할 수 있었던 것이 단지 세월의 두께 때문이 아니었듯, 오늘의 웹툰 역시 시간의 양만으로 자신의 역사를 증명할 수는 없다. 웹툰은 여전히 ‘가벼운 오락물’이라는 오해 속에서 자기만의 문법과 미학적 계보를 증명해야 하는 시점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매주 수천 편씩 쏟아지는 웹툰의 방대한 데이터와 서사의 밀도는, 그 양적 축적을 넘어 웹툰이 자기 고유의 정체성을 서서히 증명해 온 시간이었다는 점에서 이제 ‘웹툰통사(通史)’를 이야기할 만한 충분한 역사적 무게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웹툰이 이룩한 것들 : 콘텐츠의 왕좌에 오르다
20년이라는 시간 동안 웹툰은 질적, 양적 전환을 이뤄냈다. 한때 인터넷에서 가볍게 소비되던 웹툰은 이제 한국 문화산업을 대표하는 콘텐츠로 자리 잡았다. 특히 2020년대에 접어들며 웹툰과 웹소설은 전 세계 문화예술 산업의 가장 뜨거운 화두로 부상했다. 글로벌 팬데믹이라는 특수한 공간 속에서 모바일 환경에 최적화된 ‘읽을-거리’로서의 웹툰 소비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국내 웹툰 산업은 2023년 처음으로 연매출 2조 원을 돌파하며 6년 연속 성장세를 보였다. 이제 웹툰은 K-콘텐츠 산업을 견인하는 콘텐츠의 왕좌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산업적 규모의 확장보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문화적 위상의 변화다. 글로벌 OTT 플랫폼이 급성장하면서 웹툰은 영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 게임으로 확장되는 원천 IP(Intellectual Property)의 보고(寶庫)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다. 휴대폰 스크린을 통한 장면 연출과 시각적 스토리텔링은 영상 제작에 필요한 청사진을 제공했고, OTT 플랫폼은 이를 세계 시장으로 확장시켰다. 디즈니+의 <무빙>과 <조명가게>, tvN의 <정년이>, 넷플릭스의 <광장>, <중증외상센터>, 그리고 최근에 공개된 <참교육>에 이르기까지 웹툰 원작 콘텐츠는 국내 흥행을 넘어 글로벌 시청자를 확보하며 한국 콘텐츠 산업을 이끌고 있다. 특히 <참교육>은 공개 이후 한국을 비롯한 19개국에서 1위를 기록하고, 85개국 Top10에 이름을 올리며 웹툰 IP의 글로벌 경쟁력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이러한 변화는 웹툰을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까지 바꾸어 놓았다. 과거에는 순수문학과 대비되는 대중 오락물로 취급되었던 웹툰이 이제는 문학과 문화연구에서 본격적인 연구 대상으로 다루어지고 있으며, 문학교육에서도 교과서 제재로 적극적으로 수용되는 등 제도권 교육 안으로도 편입되고 있다. 웹툰과 웹소설이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떠오르고 있는 오늘날, 문학의 개념 자체가 디지털 매체와의 융합 속에서 새롭게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흔들리는 판 : 복제되는 클리셰와 양산형 서사의 그늘
그러나 이러한 외형적 풍요 속에서 웹툰 생태계의 내부는 서서히 흔들리고 있다. 급격한 상업화와 대형 플랫폼 중심의 대량 생산 체제는 영화나 드라마 등 기존의 대중문화 산업이 이미 경험했던 구조적 문제를 고스란히 반복하기 시작했다. 플랫폼은 막대한 제작비와 마케팅 비용에 따른 위험을 줄이기 위해 이미 성공이 검증된 장르와 서사를 반복적으로 선택하고, 창작자는 치열한 연재 경쟁 속에서 독자의 즉각적인 반응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웹툰이 지녔던 실험성과 장르의 다양성은 점차 약화되고, 성공 공식을 답습하는 안전한 서사가 플랫폼을 채우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는 이른바 ‘회빙환(회귀·빙의·환생)’ 서사의 범람이다. 초기의 회빙환 서사가 기존 영웅서사의 공식을 뒤집는 신선한 상상력으로 기능했다면, 지금의 회빙환은 서사의 출발점만 다를 뿐, 압도적인 능력을 가진 주인공이 손쉽게 적을 제압하고 즉각적인 보상을 얻는 구조가 반복되는 하나의 공식으로 굳어지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플랫폼의 운영 방식과도 무관하지 않다. 매주 독자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연재 시스템과 조회 수, 별점, 댓글을 중심으로 한 알고리즘은 작품이 긴 호흡으로 완성도를 높이기보다 매 회차 강한 자극과 사이다 전개를 반복하도록 유도한다. 독자의 이탈을 막기 위해 갈등은 빠르게 해결되고, 인물의 내면을 축적하는 과정이나 서사의 긴장감은 점차 축소된다. 때문에 작품은 이야기의 완성도보다 다음 회차를 클릭하게 만들기 위한 방법에 몰두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획일화가 결국 독자의 피로감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성공 공식을 반복하는 소비 방식은 단기적으로는 안정적인 조회 수와 매출을 보장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플랫폼 전체의 서사적 다양성을 약화시키고 웹툰의 장점이었던 다양한 주제와 실험적인 전개 방식이 성장할 기회를 좁힌다. 소비의 속도가 창작의 속도를 앞지르고 알고리즘이 상상력을 대신하기 시작한 지금, 웹툰의 판은 화려한 산업적 성과 이면에서 흔들리고 있다. 이제 웹툰 산업이 다음 단계로 도약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실패를 감수하더라도 새로운 형식과 이야기를 수용할 수 있는 생태계의 회복일 것이다.
독자의 눈 : 웹툰의 성장과 함께 성장한 비평의 시선
다시 임화가 활동했던 1930년대로 돌아가 보자. 당시 문학장은 새로운 문학을 둘러싼 비평과 논쟁으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계급의식과 현실 참여를 강조한 경향문학과 예술의 자율성과 형식미를 중시한 순수문학은 문학의 존재 이유와 역할을 두고 치열하게 맞섰다. 문학은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를 둘러싼 논쟁은 수많은 작품과 비평을 낳았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런 논쟁으로 승패를 가르려고 했다는 것이 아니다. 문학을 둘러싼 팽팽한 논쟁 속에서 근대문학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며 성장할 수 있었다.
웹툰이 걸어온 지난 20여 년 역시 마찬가지이다. 스크롤 속에서 가볍게 소비되는 만화라는 평가와 새로운 시대의 서사 예술이라는 평가 사이를 오가며 끊임없는 논쟁을 일으켰다. 사회 현실을 날카롭게 포착하거나 인간 존재를 깊이 탐구하는 작품은 문학으로의 가능성을 인정받았고, 반대로는 상업성과 오락성을 앞세웠다는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 논쟁 속에서 작품에 대한 날선 감상은 웹툰이라는 새로운 매체가 어떤 방향으로 발전해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했다.
실제로 웹툰과 함께 나이 들어온 독자들의 존재는 최근 작품들의 경향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마흔이 되도록 홀로 남겨진 현실을 마주하고 뒤늦은 행복을 찾아 나서는 남자를 그린 <마흔 즈음에>, 오십 평생을 지나 이혼이라는 낯선 태풍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여자의 이야기를 담은 <송이연 50세, 이혼 한 달 차>는 더 이상 청춘의 성장통만이 웹툰의 주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이런 작품들이 인물의 한심함과 허물마저 가감 없이 그려내면서도 독자들의 폭넓은 공감을 얻는 것은, 웹툰과 함께 자라온 독자들이 이제 인물의 완성도와 서사의 밀도를 가려낼 만큼 성숙한 눈을 갖췄기 때문이다.
웹툰의 발전과 함께 성장한 독자는 작품을 수동적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댓글과 SNS 리뷰 등을 통해 작품을 함께 읽고 해석하며,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비평 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다. 과거 문학 비평이 소수 평론가의 전유물이었다면, 웹툰의 비평은 수많은 독자가 참여하여 집단적 독해와 토론의 형태로 확장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변화는 작품을 바라보는 기준 역시 바꾸어 놓았다. 회빙환 서사와 자극적인 사이다 전개에 대한 피로감을 가장 먼저 드러낸 것도 독자들이었다. 이제 독자들은 단순한 설정과 전개보다 인물의 입체성과 서사의 완성도, 그리고 삶의 복잡한 감정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는 작품을 더 오래 기억하고 평가한다. 말초적인 재미는 빠르게 소비되지만, 인간의 본질과 시대의 문제를 건드리는 서사는 스크롤이 끝난 뒤에도 독자의 기억 속에서 끊임없이 다시 읽힌다.

결국 알고리즘이 만들어 낸 획일화를 되돌릴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알고리즘이 아니라, 안목을 갖춘 독자의 선별 행위일 수밖에 없다. 조회 수와 별점이라는 수치가 서사의 다양성을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체감한 것이 독자였다면, 그 획일화를 교정하는 힘 역시 읽는 행위 자체의 질적 전환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웹툰의 성장은 산업 규모나 매출액이라는 숫자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작품을 읽고, 토론하고, 비평하는 독자 공동체가 함께 성장한 과정이기도 하다. 임화가 신문학사를 서술할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작품만이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치열한 비평과 논쟁이 하나의 문학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웹툰 역시 마찬가지다. 작품을 둘러싼 비평과 독자의 안목이 축적되었기에, 이제 웹툰은 하나의 역사와 미학을 갖춘 서사 장르로의 가능성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웹툰, 콘텐츠와 문학 사이 : ‘가난한 아름다움’을 읽는 시선
시인 박용래는 “내가 골몰하는 것은 다른 시인들이 다 보고 지나간 자리에 남는 가난한 아름다움에 눈을 주고 그것을 시로 다듬는 일”이라고 말했다. 문학이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쳐 버린 낮고 어두운 곳까지 기어이 시선을 던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문학이 독자에게 건넨 이러한 시선은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만든다. 문학평론가 김현이 “한 편의 침통한 시는 그것을 읽는 자에게 인간을 억압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에 대한 자각을 불러일으킨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문학은 우리의 감정을 일시적으로 흔드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가 얼마나 많은 삶과 고통을 외면한 채 살아왔는지를 깨닫게 한다. 문학의 기능은 다양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힘은 우리가 보지 못했던 세계에까지 시선을 확장함으로써 타인의 삶을 새롭게 이해하고, 결국 자기 자신을 성찰하도록 이끄는 데 있다.
만약 이러한 성찰의 힘을 ‘문학성’이라 정의한다면, 오늘날의 웹툰 역시 플랫폼이 요구하는 반복적인 이야기 구조와 즉각적인 카타르시스의 굴레를 넘어 이러한 문학성을 극대화시켜야 할 것이다. 우리는 흔히 책으로 묶인 활자만을 문학이라 부르지만, 근대 문학이라는 개념 역시 매체의 전환 속에서 정립된 지 100여 년 남짓 된 역사적 산물일 뿐이다. 신문과 잡지라는 대중 인쇄 매체가 문학을 정의했듯, 디지털 기기의 스크린을 중심으로 읽기의 방식이 바뀐 지금, 문학의 개념 역시 재정의 되어야 한다. 웹툰은 이미 스크롤이라는 새로운 매체의 문법 속에서 시적 여백과 극적 긴장, 이미지와 언어의 결합을 통해 문학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 이때 스크롤은 이동을 위한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웹툰이라는 문학의 문체(文體)가 된다. 인쇄 만화의 홈통(gutter)이 독자의 상상력에 맡겨진 정적인 공백이었다면, 웹툰의 스크롤은 그 공백에 ‘시간’이라는 물리적 차원을 더해 독자가 직접 읽기의 속도를 조율하게 만든다. 몇 번의 스크롤로 침묵이 강조되거나 반전이 일어나는 이 리듬이야말로, 웹툰이 갖는 문학으로서의 ‘스크롤의 시학’을 형성하는 것이다.
웹툰은 콘텐츠의 왕좌에 오르는 동안, 동시에 문학적 깊이를 요구받아 왔다. 그러나 이 둘은 애초에 대립하는 자리가 아니다. 임화가 신문학사를 쓰던 1930년대에도 문학은 신문과 잡지라는 대중 매체에 실려 팔리고 읽히는 상업적 산물이었다. 그럼에도 그것을 문학이 아니라 말하는 이는 없다. 웹툰 역시 마찬가지다. 조회 수와 매출로 증명되는 콘텐츠이자, 동시에 삶의 이면을 비추고 인간을 성찰하게 하는 문학이라는 두 정체성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 둘을 함께 끌어안을 때에만 웹툰은 비로소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된다. 지난 20여 년, 웹툰은 산업의 성장과 독자의 성장을 함께 이루어내며 이미 그 가능성을 증명해왔다. 이제 필요한 것은 자극적인 복제와 성공 공식을 넘어, 다른 이들이 지나쳐 버린 자리에서 ‘가난한 아름다움’과 소외된 삶을 발견하여 컷과 칸과 스크롤 속에 담아내는 일이다. 1939년 임화가 「개설 신문학사」를 통해 신문학에 스스로의 계보와 역사를 부여했듯, 오늘의 웹툰에게도 콘텐츠이면서 동시에 문학인 자신만의 ‘웹툰문학사’를 써 내려갈 시간이 필요하다. 그 역사가 쓰이는 날, 웹툰은 콘텐츠와 문학이라는 낡은 이분법을 넘어 우리 시대의 스크롤의 시학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